출애굽의 영광은 애굽을 위한 것이었다.

조회 수 244 추천 수 0 2017.10.05 11:42:37

출애굽의 영광은 애굽을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기 강해(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14:15-20, 31)

 

 

의심스런 홍해 기적의 역사성

 

출애굽은 성경에 기록된 단일 사건으로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최고로 엄청나다. 특별히 홍해의 기적이 더 그러하다.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은 바다가 갈라진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넜다. 밤새 추격한 애굽 군대는 물에 빠져 몰살했다. 인간의 이성만으로 따지면 이 기적은 사상 최고의 뻥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반면에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상 최대의 은혜가 된다. 그렇다고 믿겨지지 않는데 무조건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에 폭풍이 몰아쳐 파도에 배가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 즉, 배와 그 호수의 전문가인데도 죽게 되었다고 불안에 떨며 피곤해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꾸짖자 곧바로 잠잠해졌고 제자들은 이이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지 의아해 했다.(마8:26,27)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능력을 가졌는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말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역사성과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했다고 그칠 것이 아니라 왜 꼭 바다를 가르는 방식으로 구원했어야만 하는지를 따져야 한다.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경외했고 그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31절) 바로 어제 애굽이 추격해오자 공포에 질려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광야에서 죽느니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퍼붓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사백 년 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지금 홍해를 건넌 자가 2백만이 넘는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역사한 것 중에 출애굽 그 중에서도 홍해의 기적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한다. 이백만 명이 함께 거짓을 꾸며내서 후손에게 계승 가르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구약성경은 심오한 철학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고상한 도덕적 계명도 그리 많지 않다. 형이상학적 진리는 더욱 찾기 힘들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였고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자기들 체험을 있는 그대로 아주 평이하게 서술해 놓은 책이다. 누가 읽어도 그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다. 조금만 묵상해도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까지 깨달을 수 있다.

 

애굽의 입장은?

 

피해 당사자인 애굽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라.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 받는 바로의 무덤이 도굴되었다. 군대와 병거 600 승이 수장되었다. 만약 사실이 아니면 자기들을 히브리인들이 완전히 갖고 논 셈이다. 적극 반발해야 마땅하다. 독도 같은 작은 돌 섬 하나 두고도 한국과 일본은 조금만 연관되는 고대 기록을 발견하면 영유권을 입증하는 자료로 얼마나 치열하게 국제적으로 홍보에 열을 올리는가?

 

애굽은 지금껏 그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기록을 제시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자기 나라가 패전을 하거나 치욕을 당하는 사건은 역사에서 축소시키거나 말소한다. 대신에 승리는 부풀려 기록하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의 고대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유일한 예외다. 이스라엘의 치욕, 타락, 음란한 행위 모든 것을 수정 누락 없이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 예수님이 태어난 유다 가문의 선조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맺었다. 또 다른 조상 중에는 이방인 창녀 라합도 있다. 지금도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불효자식은 호적에서 빼버린다고 야단치지 않는가? 제 아는 어떤 분은 아들이 국제결혼 한다고 그런 으름장을 놓았다.

 

표현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님의 가족사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교인을 불러 모으기보다는 거꾸로 오려던 자들마저 쫓아낼 판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인해 실족을 하여 가까이 오지 않더라도 거짓을 말할 수는 결코 없지 않는가?

 

성경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기록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영적 실상이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제일 먼저 또 가장 강조해서 계시하고 싶은 내용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너희 모두가 죄 중에 빠져 당신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그 죄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3,500년이 지나도록, 또 예수님 오신 후로 따지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만큼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이 생생하고 엄청난 체험이었던 것이다. 또 예수가 아무리 많은 기적을 베풀었어도 모세가 일으킨 것과 비교가 안 된다는 뜻도 있다.

 

홍해의 기적이 세속의 기록에 없고 성경만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실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애굽이 부인하지 않고 있으니 오히려 그 역사성은 더 확실히 증명된다. 놀랍고도 흥미롭게도 본문도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다. 반드시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했어야만 하는 목적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애굽에게 물어보라.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애굽에 행한 큰일을 보았다고 한다.(34절)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큰일을 보라고 해야 더 매끄러운 표현이지 않는가? 바로 앞 30절과 연결된 설명으로 바닷가에서 애굽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문맥에서의 일차적인 뜻은 애굽에게 하나님이 큰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구태여 이스라엘에게 큰일을 행했다고 성경이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4대가 함께 손을 잡고 건넜다. 후대에게 전승하려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 성경도 구태여 다시 그렇게 기록할 이유도 없다. 요컨대 혹시라도 이 기적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면 애굽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더 확실하게는 17, 18절에서 애굽의 병거와 마병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얻었고 애굽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홍해의 기적을 목도하면서 느낀 감동이나 충격은 이스라엘보다 애굽 사람들에게 더 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보다 애굽으로 정신 차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어떻게 하든 당신에 대해 인정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특별히 애굽 군대가 그러길 바란 것이다.

 

홍해까지 추격해 온 것은 열 번째 재앙에서 장남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 전의 아홉 재앙은 애굽에서 자주 발생하는 자연 재앙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래서 모세가 우연의 일치로 그것들을 이용해 속임수를 썼다고 여기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 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이다. 혹시라도 모세가 간만의 차이 즉, 자연의 섭리를 활용했다고 또 다시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다. 애굽 군인들도 그 정도 지식이 없을 리 없다. 물이 들어올 때에 따라 들어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애굽 군대가 추격을 시작한 시점을 새벽이라고 했다.(24절) 다시 물이 덮은 시간도 새벽이었다.(27절) 몇 시간의 시차가 있었다는 힌트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30절에는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군인들의 시체를 보았다고 한다. 바다를 건넌 후에 반대편 육지에서 본 것이다. 그만큼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바짝 붙어서 쫓아 온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밀물이나 썰물 때와 아무 상관없이 바다를 가르고 또 다시 덮었던 것이다.

 

애굽 군대의 신앙고백

 

하나님이 애굽에 행한 마지막이자 가장 큰일의 대상으로 군대를 선정했다. 그들은 애굽이 얼마나 강하지 제일 잘 아는 자들이다. 애굽의 군사력에 대적할 세력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그러니까 열 번의 재앙을 당했음에도 히브리 신과 얼마든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병거를 몰고 홍해까지 쫓아 온 것이다.

 

바로는 지금 스스로 신이라고 큰 착각에 빠져 있다. 바로의 눈치를 보며 함께 부화뇌동한 주술사나 일반 백성에 비해 군대는 다르다. 그런데 그들의 병거 600승이 일순간에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고철 덩어리로 변하고 타이타닉호처럼 바다에 수장되었다.

 

여호와가 병거의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히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25절) 건너편 바다에까지 시체가 떠올랐기에 처음부터 아예 추격 못하도록 바퀴를 벗긴 것이 아니다. 한창 추격 중에 물이 다시 덮쳐 땅이 진흙이나 모래로 변해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육백 대의 전차 모두 속도가 늦어졌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건넜다. 이백 만 명이 지나갔으니 그것만으로 딱딱해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로 눈앞에 황급히 도망가는데도 말이 모는 전차가 도무지 쫓아갈 수 없었다. 당시상황을 상상해보라. 애굽 군인들이 얼마나 황당했고 두려웠겠는가?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미국의 ICBM 핵폭탄 수천 개가 일시에 그 탄두에 장착된 농축 우라늄이 사라져 폭발도 못하는 단순 로켓으로 변한 꼴이다. 미국 군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리 북한을 완전히 전멸시킨다고 큰소리 쳐봐야 트럼프와 미국보다 더 크고 더 센 존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주관자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25절의 여호와가 그들을 위해 싸워 우리를 친다는 고백의 의미다.

 

히브리 신을 가장 인정하기 어렵고 싫어하는 것이 애굽 군대임에도 홍해의 기적 앞에 완전히 항복했다. 최소한 히브리인들의 신에게 인간은 물론 애굽 신들 전부 동원해도 도무지 대적이 안 되고 아예 그 능력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것만 목적이라면 해안 지름길에 주둔하는 블레셋 군대를 또 기적으로 무너뜨리면 된다. 구태여 홍해까지 우회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면 애굽 군대는 여전히 자기들이 세상에서 최강이고 자기들을 대적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출애굽의 결론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경외했다고 아주 단순하고 싱겁게 말하고 있다. 그 숨은 의미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기 제일 힘든 애굽 군대도 여호와를 인정했는데 이스라엘 너희는 더더욱 그래야 할 것 아니냐? 앞으로 어떤 믿음으로 살아갈지 내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하늘에서 관념하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 놓고 좋아하는 하나님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애굽 군대가 수장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17,18절) 아무리 이스라엘을 4백 년 넘게 학대했고 열 번이나 하나님을 완악하게 거역했어도 지금 수백 수천 명의 군인이 죽었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어떤 면에선 아무 죄가 없는 자들이 애꿎게 죽었지 않는가?

 

그런데 그 일로 영광을 얻었다고 하니 구약의 하나님은 정말로 냉혹하고 잔인하게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인가? 그보다는 성경이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평강을 베풀었으니 여호와가 영광을 얻었다고 해야 더 은혜롭지 않는가?

 

여호와가 히브리인을 대신해서 싸운다는 고백을 한 애굽 군인들은 누구인가? 황급히 바다에서 도망쳤거나 미처 들어가지 못한 후발 부대원이다. 그들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저 엄청난 파도가 곧 우리도 덮치리라는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전혀 그러지 않는다.

 

그 때 문득 히브리 신이 아홉 번의 재앙을 내렸어도 인간의 생명에는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냈을 것이다. 열 번째는 어쩔 수 없이 경고의 의미로 장자들만 죽였다. 그러나 지금도 애굽이 자랑하는 최신예 무기가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큰 이적을 일으키면서도 바닷가에 남은 자기들은 죽이지 않는다.

 

뭔가 히브리 신은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고대에는 신들이 싸워 누가 힘이 더 센지를 다퉈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오히려 살려주었다. 지금 열 번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 모두가 애굽을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인간들을 다스리는지 알게 해주려는 뜻임도 깨달았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들 우상 신들과 전혀 다름은 깨달았을 것이다.

 

히브리 신은 이름도 없다. 화려하고 장엄한 형상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더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도무지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 되심을 증명했다. 그렇게도 완악하게 그분을 거역했음에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품고 또 품어주는 신이다. 애굽이 출애굽과 홍해에 대해 적극 반발하지 않는 까닭 중에는 자기들이 긍휼을 입었음을 인정했다는 의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어떤 기도를 하셨는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당신께서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죽음으로 인해 영광을 얻는다고 한다. 출애굽 본문처럼 인간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냉혹하고 잔인한 하나님처럼 여겨지지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에게 모든 죄 값을 물어서 죄인으로 삼아 죽임으로써 흑암의 세력에 눌려 절망뿐이었던 인류에게 하늘의 참 빛을 비추시었다.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소망을 갖게 했다.

 

아무 죄 없고 흠도 없는 독생자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라도 되찾으면 하늘에서 잔치가 열린다.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며 또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

 

신약성경의 이 하나님이 구약 본문의 출애굽 때의 하나님과 다를 수는 없다. 출애굽을 통해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은 이스라엘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했고 그 영광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맺을 때부터 그 후손 이스라엘은 그분의 영광스런 백성이 된 것이다.

 

본문에서도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이 뒤로 옮겨졌다.(19,20절) 애굽 군대로 어둠에 휩싸여 더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에 이스라엘로 애굽 군대가 보이지 않게 되어 불안을 떨고 단잠을 잘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전에 고센 땅에 구별되어서 전혀 피해가 없었던 것도 이미 하나님의 영광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에게 남은 일은 무엇인가? 애굽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시 인간 세상의 최고 권력인 애굽을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애굽 군대다. 그들로 하여금 히브리인들의 신 여호와에게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고백을 저절로 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통해서 영광을 받았는데 그 일은 사백 년간 당신의 백성들로 학대를 받게 한 결과였다. 이스라엘 사람 즉, 당신의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바탕이 되었다. 하나님이 죄로 타락한 인간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 원리를 이제 알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식은 전혀 없다. 오직 그 방식 하나 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부터 그들은 주님의 영광 안에 완전히 들어온 것이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께 세 번의 용서를 받은 후에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결국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는 주님의 영광을 완성시켰다. 하나님은 베드로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가 오순절에 설교하여 회심한 삼천 명과 곳곳에 세운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다.

 

며칠 전 우연히 TV에서 오랜 미국 영화를 하나 보았다. 두 여자 간호사가 아주 친한 사이로 룸메이트였다. 한 여자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난 후에 임신한 것을 알고는 아비 없이 키우느니 낙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미혼이지만 곧 결혼할 남자 친구가 있는 다른 친구가 그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 대신 키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낙태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태어날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픔과 슬픔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낙태를 막은 것은 생명을 준 것이며, 엄마까지 되어주는 것은 더 풍성한 생명을 주는 일이었다. 낙태하려 했던 여자가 그 친구에게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맡아 키우면 남자 친구와 힘들어지고 아무래도 여러 부담이 많을 텐데 안 그래도 된다면서 꼭 rfo야 할 이유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 외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신자가 나태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스런 백성이 되었다. 생명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으로 불신자를 주님과 화목 시키는 직책을 맡았다.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주님을 알게 하고 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흔히들 우리는 언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가? 찬양 예배, 기도 모임, 수련회 같은데서 은혜 받았거나 기도가 응답이 되어 문제와 고난이 해결되었을 때 등이다. 틀린 말이 아니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모두가 우리가 받은 영광이다. 사실은 예수 믿을 때에 이미 주님의 영광은 확보했으니 다시 확인한 것뿐이다. 다른 이를 통한 영광 드림이 없어서 반쪽만의 영광이다. 엄밀히 말해 그런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실까 의심스럽다.

 

예수 십자가 복음의 권능이 얼마나 엄청난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 앞에 끝까지 항거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정말로 그분의 임재 앞에 맞닥뜨리면 어떤 인간도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일순간에 완전히 얼음처럼 얼어버리는 것과 같아진다. 그래서 베드로나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분의 영광 권능이 너무 엄청나고 자신들은 너무 가난하고 추해보여서 제발 자기를 떠나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다. 그분 앞에 무너지지 않을 영혼은 없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무리 극악한 자라도 변화시키지 못할 자는 없다.

 

신자가 이웃에게 특별히 불신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다.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까 도무지 자신이 없는가? 다른 이를 섬기는 태도, 방식, 열성, 감정까지 최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가 너무 불쌍해서 끝까지 안타깝게 여기면 된다. 내가 도우지 않으면, 그 영화에서 대신 엄마가 되어주려는 친구처럼, 힘들게 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된다.

 

우리가 낮아져야 하고 수치와 상처와 핍박을 받을 수 있다. 끝까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당장에 열매가 안 열리고 실망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아무리 적은 자를 섬길지라도 정말로 순전한 마음으로 상대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섬겼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가 섬긴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 곁에 당신께서 영광을 받을 자들을 붙여 주신다. 불쌍하고 고달픈 사람만이 아니라 때로는 싫고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로 바로 우리 가까운 주변에 있게 한다. 단순히 인내심이나 담력을 키우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 채워줄 수 없는 필요 위로 격려 도움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바로 절망 내지 죽음으로 내몰린다. 도무지 소망이 안 보이고 도움도 없어서 자칫 자살을 할 수도 있다. 아주 적은 도움 혹은 한 순간의 위로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을 건지는 구원이 된다. 우리가 그 일을 등한히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열매가 즉,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영광을 받을지 몰라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

 

가만 두면 죽음으로 지옥으로 가는데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는가? 내가 아니면 도울 자가 없기에 바로 내 곁에 하나님이 붙이셨는데도 말이다. 신자가 어려운 자를 모른 척하고 지나치는 일을 법정용어로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가만 두면 절망 내지 죽음인 줄 알고도 가만 두었지 않는가?

 

신자의 죄책감 의무감을 강조해서 겁을 주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생명력, 맡은 직분의 권세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바로 그 일을 신자가 행해야 한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권능인가? 세상 사람은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자만의 특권이다.

 

9/2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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