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평강이 있느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19,20)
안식 후 첫날 즉 부활절이 시작되는 시점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한곳에 모여 숨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무덤에 간 마리아로부터 스승의 부활 소식을 이미 들었고 베드로도 단걸음에 뛰어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너무나 기뻐해야할 시점에 왠 두려움입니까? 그들의 믿음이 그만큼 형편없고 성금요일 저녁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던 것처럼 여전히 비겁하고 소심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마27:64) 염려했습니다.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파숫군을 세우고 무덤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무덤의 돌은 열렸고 예수님은 세마포는 그대로 둔 채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이날 저녁 때 쯤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 대한 소문이 성중에 쫙 퍼졌을 것입니다. 당연히 산헤드린에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정작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계신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연락하여 앞으로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지 의논하러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문들을 닫아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산헤드린에선 제자들의 출신지인 갈릴리로 급히 관원들을 파송했을지 모릅니다. 제자들로선 각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유다 전 지역에 흩어져 숨어버리면 더 안전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함께 모인 것만 해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으라고 도망치기 바빴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너무나 긴박하고 당황되는 순간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제자들의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닫힌 문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홀연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첫마디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못과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 자국을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제자들로선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약속대로 죽음을 뛰어넘은 스승이야말로 메시아임을 완전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틀림없이 지난 2,3일 동안 급박하게 진행된 일들에 온전한 정신으로 대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의 원인, 과정, 추후 결과는 물론 그 의미를 전혀 짐작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사실, 그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스승의 뜻대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스스로도 주체 못할 살의(殺意)에 가득차서 정신없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당혹되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몇몇 여인네들은 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까지 따라간 베드로나 도망가 먼발치에 숨어버린 제자들 모두는 혹시나 스승이 큰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숨죽이고 주시했습니다.
그러나 스승만 그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평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제자들로서도 스승이 정말 메시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어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미 사태는 자기들 손에서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일이 스승의 뜻과 계획대로 되었던 것뿐입니다.
그 안식일 후 첫날의 제자들의 심경 변화를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난의 성금요일과 기쁨의 부활절을 완전히 몸 전체로 실감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절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소망의 정상으로 단숨에 올라왔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또 그들의 품성과 인격이나 기질이 바뀐 것도 하나 없습니다. 딱 하나 바뀐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제 스승은 닫힌 문과 상관없이 제자들 앞에 섰습니다. 그럼에도 손과 옆구리에 찔린 자국을 남긴 몸을 지녔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 아닙니까?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듯이 신기루 같은 영상이 스르르 육체로 변환된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없고 영혼만 떠다닌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신령한 육신을 입은 것입니다.
닫힌 문들을 통과했다는 것은 당신께서 물질에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질을 만드신 분이 그에 제한될 리는 없습니다. 물질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공간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공간과 물질 즉, 전 우주의 창조주이자 운행자이자 주인이신 분입니다.
거기다 또 신령한 육신을 입었습니다. 물질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으시는 분이기에 당신만의 신령한 부활체를 입은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항은 물질이 물질로만 있어선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에 생명과 영혼이 함께 내재해야만 물질로서 온전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도 당신과 방불한, 정확하게는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당신을 대신하는 주관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시간과 공간 즉, 물질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시공간과 물질에 매여야 하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제한받는 존재들을 다스리는 존재이기에 당연히 이 땅에 제한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또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 땅의 시공간을 넘어선 영원의 영역과 연결되어진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알고 교통할 수 있는 영을 허락하신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영이 아담의 원죄로 스스로 그분과 교통할 수 없을 만큼 부패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 메시아로 오셨는데도, 그분과 삼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당시까지 없던 절대적 진리를 배웠으며, 그 진리가 이 땅에 실현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심지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까지 해놓고, 막상 십자가에 달리게 되자 제자들조차 다 도망갈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신령한 육체를 보여주어서 저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까?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해야 합니까? 유대인들의 핍박을 이겨내도록 고무 격려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당신과 교통하도록 부패한 영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22절) 까닭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성령을 받고서 그 온전한 임재 아래 들어가야만 온전한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지할 사항은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기 전에 이미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와 함께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었던 길을 제자들도 똑같이 걸어갈 때에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길을 걸으려 해도 평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닫힌 문들을 통과해 불현듯 나타나고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도 너무나 확실합니다. 신자에겐 천국 영광은 이미 확정되어있는 일인지라 굳이 믿으려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마음을 턱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비유하자면 슈퍼로토에 걸린 자는 돈을 타러 가기 전에도 땡전 한 푼 없지만 배가 부르며 무엇이든지 계획하며 시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대신에 신자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이미 보내셨으므로 실제로 보내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만나는 이마다 복음을 말로 전해 전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떤 존재라도 자신의 본분 됨을 온전히 지킬 때에 평강이 있지 않습니까? 사자를 토끼 짓 하게 만들면 안절부절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절대 평강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릴 때에 인간은 인간됨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며 그럴 때에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통치를 실현해보여서 인간더러 천국을 소망토록 하려고 오셨습니다. 신자들 또한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아니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아래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부패된 영혼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평강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단계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신자에게 성령이 와있고 영원토록 떠나지 않을 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fact)입니다. 천국이 기다리고 있고 시공간을 초월하고 물질과 무관한 신령한 육체를 입을 부활도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 모든 은혜들이 이미 이뤄진 사실이기에 신자로서 정작 해야 할 바인 세상에 보내지고만 있으면 성령의 큰 선물인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수난의 성금요일과 기쁨의 부활절 둘 다 온몸으로 이미 체험한 자입니다. 예수를 몰랐던 자신의 이전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너무나 헛것이었음을 철두철미 깨달아 두 번 다시는 그런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게 된 자입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시공간과 물질에 제한된 삶을 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령하고 경건한 도사가 되어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말해 세상이 다 미쳐 돌아갈 때에도, 거기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 배반하고 도망 가버려도, 주님처럼 자기 혼자만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럴 때에 자신은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이미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삶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전적인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음도 알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손에 붙들린 자기 인생이 바로 지금도 하늘 보좌로 올라가고 있는 중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힘센 것이라도 주님이 붙든 그 손을 놓게 만들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지금 만약 우리가 온갖 현실적 문제와 환난으로 겁에 질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잔뜩 웅크리고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을 때에 주님이 들어오신다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이겠습니까? 그보다는. “너희에게 평강이 어디 있느냐?”이지 않겠습니까?
즉, “너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 골고다 언덕과 요셉의 빈 무덤을 다 통과했지 않느냐? 시공간의 물질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왜 아직 평강이 없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중심이 우리가 주님의 큰 능력만 붙들고서 형통을 이루려 하는지, 아니면 평생토록 예수님이 나의 손을 붙들고 있기에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참 평강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회복한 참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 묻지 않겠습니까?
1/14/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