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充滿)하더라.”(요1:14)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한없는 부러움을 가집니다. 주님과 함께 3년이나 동고동락했으니 너무나 풍성하고도 깊은 영적 깨달음과 충만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얻었으리라 짐작되니 사뭇 시기까지 납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아버지의 영광에 비견하고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묘사했듯이 말입니다.
주님을 직접 뵙고 싶다는 소망은 신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합니다. 또 그 소망은 그분을 닮으려는 열정과 천국 영광에 대한 기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말씀 속에서 그분의 실체를 희미하게 만나나 천국에 가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것입니다. 또 이 땅에서 우리가 가졌던 어떤 의심, 불만, 오해, 무지, 불신의 찌끼라도 모두 태워 없애서 시원케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냉정히 따져 보십시오. 우리가 당시 유대 땅에 살았다 해도 그분의 제자로 택함 받았을 가능성이 과연 있었겠습니까? 그보다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고함치는 군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 않습니까? 또 만에 하나 택함 받았다고 해도 우리가 추측하는 만큼 주님을 따름에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을까요?
주님의 열두 제자들은 우리의 막연한 추측과는 달리 마지막 날 밤에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바람 같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이 복음서를 쓴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쫓아간 의리파 베드로도 결국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주님 생전에 바라보기는커녕 믿음으로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수난 받은 종의 모습이었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마치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이 멸시를 받았고 귀히 여김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사53:3)
요한도 본문에 앞서서 참 빛이신 주님이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10,11절)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 제자들 사이에도 눈에 띌만한 풍채나 영광은 없이 아주 평범한 모습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왜 하나님의 독생자의 충만한 영광을 우리가 보았다고 말합니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반사되는 광채조차 눈이 부셔서 유대인들이 도저히 쳐다볼 수 없어 수건을 가렸다고 합니다.(출34:29-35)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마도 요한은 모세의 성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던 사건을 연상하며 본문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쉐키나)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40:34,35)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홍해의 기적으로 출애굽시킨 의미나, 거룩한 율법을 수여한 이유나, 성막을 짓게 한 목적은 하나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백성 중에 함께 거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만 온전히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거하고 행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영광도 모세의 성막 위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임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오심도 바로 그런 의미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나단 선지자가 말리면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삼하7:5,6) 다윗이 사방 대적을 물리치고 평온을 얻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함께 거하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이 그곳까지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때부터 그 후손들이 만민에게 복을 나눠주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겐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당신의 소유이자, 당신에 대해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출19:5,6)으로 삼겠다고 이전의 약속을 재차 확충하며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제사장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어, 당신의 일을 행하시고, 함께 영원토록 거하심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 행하심의 단적인 예들이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는 것과,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고, 성막에 구름으로 가득 차게 했던 것입니다. 아직 성경이 저작되기 전이었고 예수님도 오시기 전이라 당신의 영광을 가시적 현상으로 실제 목격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상천하지(上天下地)의 유일한 하나님임을 확신시키고 또 당신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증할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시적 영광은 그 되어진 모든 일의 배경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표시일 뿐입니다. 그 영광 자체가 그분의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신 사건은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 본체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영광스런 하나님이셨습니다. 구태여 영광스런 사건을 일으켜서 따로 보여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모세에게처럼 영광의 빛을 반사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이 바로 참 빛이라고 요한이 선포했지 않습니까? 이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고 설명했지 않습니까? 또 성전 위 구름의 모습으로도 그 영광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성전이 존재할 목적과 의미였고, 나아가 성전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강도의 굴혈로 변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습니다. 건물 성전을 헐면 영적 성전인 당신이 다시 살아나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한 이후에야 스승에게서 독생자의 충만한 영광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받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스승의 가르침과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더니, 그 구원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했음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입니다. 스승이 바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영광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요한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주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영광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환상이나 입신의 체험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을 짐작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주님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충만하고도 온전하게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신자가 다시 찾고 구할 영광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인류에게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영원토록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신자는 그 빛 가운데서 거하며 행하는 자입니다. 십자가 죄 사함의 은혜 앞에 더럽고 추한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렸다면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십자가의 진리 가운데 이미 들어간 것입니다. 신자는 독생자의 영광을 찾아서 실현하고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의 영원하신 은혜와 진리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의 사람들 안에 거했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 땅 위의 사람들 안에 거하게 만들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는 방식이 바로 그분을 닮은 성육신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모습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는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이미 자기 안에 모시고 있기에 모세처럼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속에서 빛이 비춰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그리고 항상 주님의 영광 안에 살고 있기에 그 영광의 빛을 이웃에 얼마든지 퍼져나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서 예배자들이 서있을 수도 없었던 그런 체험(대하5:13,14)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분의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어진 성경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대로만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약속만 받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이 실현된 이후에, 성경의 완전한 진리와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모자랄 하나님의 영광 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행하시며 거하십니다. 항상 문제는 우리입니다. 혹시라도 그분 말씀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분의 영광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진리는 모르고, 우리가 영화스런 모습으로 변해야 그분의 영광도 올라간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습으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복음의 가장 기초도 모른 채 말입니다.
11/18/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