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7:25,26 하나님을 과연 잘 알고 있는가?

조회 수 452 추천 수 45 2012.03.09 0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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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과연 잘 알고 있는가?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어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5,26)


하나님 본체(本體)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때까지 사탄에 미혹되어 이 땅의 보이는 것들에만 묶여 있던 인간들더러 참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성육신의 목적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밝힌 대로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껏 당신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었지만, 이제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계시를 완성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확히 몰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알게 하였다”는 헬라원어는 지식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삼년 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예수님께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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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기노스코’는 히브리어 ‘야다’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3)라고 이스라엘에게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여기서 ‘안다’(야다)는 뜻도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모든 일을 항상 함께 함으로써, 당연히 성관계도 포함해서, 상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다 아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결혼하였을 때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창4:1) 우리말로는 “동침하매”로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영어성경은 원어의 뜻을 살려 knew라고 번역했습니다. “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결혼해서 성관계를 맺음으로 서로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간으로 하나님을 정확히 알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시켜준 결혼입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브를 돕는 배필로 아담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아내와 함께 평생을 서로 사랑하며 생육 번성하여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평생 배우자와 함께 하겠다는 엄숙한 약속으로만 간주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초의 언약을 실현하는 즉, 창조의 근본목적을 이루는 핵심적 방도입니다. 부부가 이혼하면 하나님께 한 약속을 어겼으므로 죄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려는 그분의 일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 부부는 그 일을 신실하게 실현키 위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기에 그 일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혼은 그런 소명을 외면, 거부하는 그분에 대한 또 다른 배역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도 단순히 체험적 앎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그분과 맺은 언약관계에 입각한 앎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뤄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그분에 대한 반응도 단 한 치의 어김없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정확히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그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족장들에게 이어지다가, 모세를 통해 더 구체화 되었던 언약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니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이런 언약대로의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가안 땅을 향한 지리적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전부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안전과 행복을 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서의 그것들을 구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들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서 하나님을 아는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통로의 역할을 했어야 함에도 자기들만 복 받으려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들로 인해 정작 다른 민족들이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동참하는 민족은 복을 받고 그러지 않으면 복 받지 못합니다. 바로 그런 뜻으로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는데 그 역할에 충실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왜 택하시고 불러내셨는지 정확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다른 민족은 체험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은혜로 보호하고 인도하신 까닭도 온전히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들을 궁극적으로 어디까지 인도하실 지에 관해서도 분명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데,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낸 뜻부터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신학자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없이는 존재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된 목적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없으면 아무런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하에서만 존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힘든 일을 겪더라도 인내하며 소망을 키우고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하나님의 약속을 소지하고 있고 또 그분이 그들을 통해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자기들만 받으려 했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데에 실패했기에 하나님의 복을 온전히 받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뜻은  “이스라엘이 체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모든 민족으로 당신을 알게 하는 것”으로 구약전체에 일관되고도 명료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계시되어졌고, 또 수많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통해 발전적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인간들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묶여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 속에 포함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즉, 동정녀 탄생으로 성육신하실 메시아가 사단의 권세를 깨고 모든 이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계시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보다 더 앞선 하나님의 모든 인간을 향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또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 2백여 개가 넘는 구절로 상징, 묵시, 혹은 직설적으로 계시되어졌습니다. 다윗의 시편들이나, 이사야 선지자의 처녀가 아이를 낳은 임마누엘 예언과 수난 받는 종으로서 메시아 예언 등으로 확장 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구속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외쳤던 호세아 선지자도 동일한 맥락의 계시를 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6:1,2)

본문에서 이틀과 삼일은 관용적 표현으로 지체하지 않고 즉, 곧바로 이스라엘을 다시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으킨다”는 단어가 육체적 부활도 의미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온전히 알 때에 이스라엘도 제대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이 율법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임을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방도도 모세오경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의 언약을 자기들에게만 적용하여 율법만 제대로 지키면 여호와가 자기 나라를 솔론몬 시대의 영광으로 다시 되돌려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도 큰 이적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면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어야 하는데도 그럴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 조상에게 주신 언약 이전에 예수님의 성육신 언약이 있었음을, 그리고 실은 자기들의 언약도 바로 그 원시 복음의 언약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새삼 이스라엘의 실패를 논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날의 우리를 정확히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자기들 말 ‘야다’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그분을 더 깊이 알려고 힘써 노력했습니다. 자기들이 그분의 언약을 소유한 것도 알았고 그 언약의 성취를 인내하며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준 언약이 이스라엘을 부강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의 일환임을 몰랐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구약의 모든 언약이, 자기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는 언약도 당연히 포함해서, 성취되었음을 전혀 몰랐고 지금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약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서 잘못된 반응을 했기에 아무리 체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알았어도 그분의 구원 밖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옛 자아를  벗어버리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의 모든 언약들이 오직 골고다의 십자가로 향하고 또 그곳에서 완성되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세상은 당신을 모름으로써 하나님도 몰랐고, 제자들은 당신을 앎으로써 하나님도 알았다고 합니다. 세상은 우선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더욱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어차피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교인은 꽤 됩니다. 기도해서 병이 낫고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신령한 체험만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야다의 앎”을 했다고 여깁니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과 똑 같은 실패를 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아니 창조 때부터 인간을 참 인간답게 만들려는 계획을 온전히 실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은 잘 모릅니다. 그 언약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언약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기에 그 안에 들어와 있지도 않습니다.

예컨대 신자의 부부 생활은 십자가 언약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모습이어야만 하는데도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이혼 안하겠다고 서약한 정도로만 치부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만 서로 섬겨야 합니다. 자신은 죽더라도 상대를 살리는 모습의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예수님만을 머리로 모시는 교회를 가정 안에 세우고 성령님의 인도로 부부는 물론 모든 가족 간의 관계가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정작 문제는 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 그 자체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천국 언약은 분명히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근본 동기가 한 가지 목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민족의 부강에만 초점을 맞추어 언약에 반응했듯이, 신자도 자신의 안일과 행복만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전혀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공간적 이동만 했을 뿐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재물에서 찾으려들면서 하나님의 힘만 빌리려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체험에 의한 앎이지, 언약관계에 바탕을 둔 체험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신앙은 체험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으며, 이스라엘이 구원 밖에  버려진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스승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성령으로 거듭나 자신의 옛사람은 죽여 버리고, 생명까지 바쳐가며 스승이 가신 길을 끝까지 따라 갔던 제자들의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체험적 앎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체험하면 그분을 닮기를 자연히 소원하게 되고, 또 기꺼이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서게 되며, 그러면 자기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됨을 생생히 체험케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또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단순히 기도 응답 받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택하시어 새 생명으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큰 은혜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란 천국의 영광은 “이미 실현된 소망”으로 소지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할 그분과의 언약을 실제로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이 없으면 존재치 못하듯이, 신자 또한 주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는 십자가의 언약이 없다면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부터는 더 이상 언약 밖의 즉,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꾸시는 그 놀라운 역사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길은 그분이 거룩하게 통치하는 나라 안에 살면서 그분과 함께 그 나라를 풍성하게 실현시키는 체험을 통해서 뿐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권세를 자기 주위의 가장 적은 자가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도록 나눠주는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 말입니다.    

3/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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