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12 사후 심판이 없다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4:2)
성전 미문의 나면서 못 걷는 걸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해주자 놀라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두 번째 설교를 행했다. 오순절 첫 설교 때보다 더 많은 오천 명이나 회심하자 제사장들이 아주 싫어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로선 부활하신 예수님이 인간 만사를 다스린다고 가르치니 현실정치 지도자의 입장에서 더욱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다시피 사후심판을 믿지 않고 이 땅의 형통에만 관심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성전제사를 주관했다. 참으로 모순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오직 이 땅의 삶만 주관한다는 뜻이기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도 혹시 죄가 그분께 복을 받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는지 염려한 까닭뿐이다. 현실 불행은 물론 질병마저 본인의 죄와 제사의 부족에서만 원인을 찾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이 실제로 갖고 있던 신앙관이자 현재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바 내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기복주의 신앙이다.
결정적으로 무엇이 빠졌는가? 속죄제를 드림에 자신의 성결을 위한 목적이 없다.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당위성과 절박성이 크게 결여 된다. 그분 뜻을 따라야 현실 복을 받는다고 여기니까 율법계명을 실천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것은 그분이 복을 주시는 최소한의 요구사항 내지 전제조건일 뿐이라 여긴다. 필연적으로 율법을 단지 문자적으로 해석적용하게 되며 형식적 습관적 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세상 사람들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목적과 동일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출세 형통할 수 있는지만 묻는다. 천지신명의 뜻을 알아서 실천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율법을 실현하고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현실 형통뿐인 사두개인들의 생각이 그들과 다를 바 전혀 없지 않는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성전에서 치유사역과 설교를 하는지 따진 이유도 동일하다. 종교자체도 세상영달의 수단 내지 출세한 증거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독점하는 권세를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는데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사도들은 그 질문부터 잘못되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았느냐고”(9절) 질문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사후심판을 부인하고 현실에만 관심 갖기에 영혼구원은 안중에도 없지 않느냐 반문한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구원을 주실 메시아를 소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물론 제자들마저 자기들 기득권을 훼방하는 경쟁자로만 여겼다.
사후 심판이 없다면 가장 현명한 인생은 감옥가지 않는 범위 즉, 실정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최대한 풍요롭게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두개인들이다. 사후 심판이 있다면 가장 먼저 심판받을 자들이다. 현대에 대입하면 기복주의를 가르치는 목자들이다.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하는 자들이다. 사도들처럼 성령에 충만하여 자신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 않고 예수 외에 구원의 이름이 결코 없다고 담대히 선포하지 못하는 목사들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