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8)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죄인 구원 담화 (1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1-8)

 

니고데모의 궁금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들어야 할 좋은 소식이라고 선언합니다.(롬 1장) 그 이유로 구약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고 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둘로 설명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은 절대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주시는지 또 누구에게 구원을 주시는지라는 두 가지 의문이 따라오게 되는데 먼저 첫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구원에 관해 질의하여서 응답받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답변하신 말씀이 그 첫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됩니다. 

 

니고데모는 바울처럼 모세 율법과 장로의 유전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입니다. 그리고 입법, 사법, 행정 세 가지 기능을 전부 관장하는 70명으로 이뤄진 유대 최고위 정부 기관의 관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이라 인간사회에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이 다 갖추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였습니다.(1절)

 

그런데도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계속 그를 괴롭혔는데 마침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예수 운동이 어쩌면 그 숙제를 풀어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한 랍비가 안식일에도 중환자를 치료해주고 구약성경 특별히 율법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가르쳤으며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등 여러 표적을 일으켜서 일반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는 사역 초기에서부터 공회의 권위와 유대 사회의 기존 전통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관원들의 미움을 사서 산헤드린의 감찰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공회원인 니고데모로선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야 했기에 밤중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첫마디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였습니다.(2절) 구원의 방안을 직접 대놓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자신보다 위치나 신분이 높은 사람과 면담할 때는 항상 상대에 대해 경하하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먼저 주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인정했으므로 단순한 인사말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거나 표적을 목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이미 유대 땅에선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의 구약성경 강론을 들은 백성들이 그 가르치는 권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르다고 인정했고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하늘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는 소망이 생겼다는 간증도 들려왔습니다. 

 

그는 관원으로서 나라와 백성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로마와 유대 양쪽 당국에 세금을 내야 했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로마에 수탈당해 그 삶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위세는 세상 어느 나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헬라 제국이 분열되어서 서로 권력을 다툴 때 메카비 혁명이 성공해 잠시 독립국 체제를 유지한 적 있었으나 이스라엘이 지금도 과연 로마를 상대로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서 언제 어떻게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 줄지 최소한 그런 용의가 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뜻뿐이라면 굳이 남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 깊은 그만의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같은 관원의 입장에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 행하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기보다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만 눈이 어두운 것 같습니다. 성전의 제사는 형식으로 흐르고 로마총독부와 성전 장사치들과 결탁해서 자행되는 부정부패의 고리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산헤드린부터 개혁의 대상이었으나 자기 혼자선 역부족이었습니다. 

 

거기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현실적으로 부족할 것이라곤 하나 없어도 여전히 자기 마음이 갈급하고 공허한 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민이라 구원을 완전히 얻었다는 인식이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원시 복음은 물론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의 의미가 매우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행하는 것으로 여호와의 택한 백성으로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데 충분하다면 굳이 메시아가 오신다고 성경이 예언할 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구약성경을 성실히 연구하면 할수록 모든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준행이 구원의 궁극적인 길이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자기부터 관원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의로운 모습과는 달리 수시로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교만과 탐욕이 솟아오르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야 하는 관원의 입장을 떠나서 꽉 막혀 있는 자기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만한 하늘의 계시나 경건한 가르침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유대의 어떤 인물과는 다른 신적인 권능을 가진 예수에게서 뭔가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결책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셔서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의 교육을 받았고 절기마다 성전 순례를 했으며 유대의 역사와 전통과 관습도 익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에 따라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정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의 가장 깊숙한 심령까지 그 본인보다 더 정확히 꿰뚫어 아시는지라 니고데모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무엇이며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으니까 곧바로 그가 바라던 답을 제시해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 첫째 답변은 개인의 구원은 물론 인간 공동체의 모든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첫째가는 해결책이 됩니다. 주님은 먼저 ‘진실로’를 두 번 반복했고 강한 긍정을 뜻하는 이중부정의 표현법을 사용했으므로 네 번이나 강조한 셈입니다. 거기다 그 같은 말씀을 두 번 했으므로 총 여덟 번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교급과 최상급 표현법이 따로 없는 히브리어에선 반복법으로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이고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으로 간주하는데 지금 여덟 번 강조했으니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서 간절한 심정을 담아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인 영적 진리 하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데 성령으로 거듭나서 당신의 나라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해결책은 전혀 없는데 예컨대 로마에서 독립을 쟁취한다고 이스라엘과 니고데모의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방인은 물론이고 여호와를 아는 유대인들 모두가 니고데모보다 더 어리석고 더 죄를 많이 짓는 완악한 죄인인데 어떻게 각자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 공동체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육체적 출생을 뜻하는 단어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니고데모로선 생전 처음 듣는 이상한 구원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나면 한 번 죽으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당시에 유행하던 플라톤 사상처럼 육체는 허상으로 무익하니까 죽어서 실체와 본질인 영으로 살면 된다는 철학적인 가르침도 아닙니다. 니고데모로선 성인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이스라엘의 선생인데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나(10절) 그를 꾸짖으려는 뜻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그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거듭남의 구원방식을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처음 접하면 반발만 하며 교인 중에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원죄의 문제도 이 성령의 거듭남이 유일한 해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니고데모더러 그런 반문을 하게끔 이끌어서 구원 진리를 단계별로 정확히 가르치는 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인이 모태에 다시 들어가서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즉, 거듭남이 두 번의 육체적 출생이 아니라 영혼이 새롭게 되는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육으로 난 육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그것은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므로 영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죄로 더럽혀진 영혼을 씻어서 더 의롭고 경건하게 고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한 죄인의 영혼을 완전히 싹 갈아엎은 후에 새로운 영혼을 심어주어야만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야 한다고 계속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했는데 각기 방식이 다른 두 번의 거듭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그 물이 양수가 터지는 실제 물을 상징한다고 보는데 무리한 해석입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모태에 다시 들어가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판국에 주님이 더 혼동될 수 있는 양수라는 의미로 설명할 리가 없습니다. 또 요한이 준 물세례라는 해석도 본문에선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로 죄를 씻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도덕적 회개는 구원과 무관하며 다른 일반적 종교와 같아지는 데다 요한의 세례를 받고도 나중에 예수님을 떠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님은 구약 선지자들이 마지막 때에 부어주실 하나님의 영과 새 생명을 물과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를 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미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어법을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 물과 성령은 동일하게 메시아가 부어주실 새로운 영을 뜻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님은 ‘다시’(영어로 again)라는 헬라어를 이중적 의미를 가진 ‘아노덴’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단어는 ‘다시’라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영어 성경은 ‘born anew’ 혹은 ‘born from above’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가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 궁금해했으니까 문맥상 다시라고 번역해야 타당합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영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뜻도 함께 강조하며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이 바로 원시 복음과 이사야 같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자이고 또 그런 방식으로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본문을 비롯한 요한복음 3:1-21은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으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이 구원 진리에 관해 직접 가르치셨기에 복음의 본질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외에 다른 구원의 방안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성령이 강림하여서 한 죄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해주는 구원이라 복음입니다. 또 그 일에 인간은 눈곱만큼도 힘을 보태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니까 복음입니다. 

 

바람처럼 역사하는 성령

 

문제는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그러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영도 자기 이성으로는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로선 여전히 성령으로 새로운 영이 나게 한다는 일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7절) 성령 하나님이 죄인의 영혼에 일으키는 그 과정을 가시적 물리적으로 실감할 수 없다고 해서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성령의 거듭남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8절)라는 비유로 설명해주었습니다.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선 바람이 어떤 물리적 작용에 의해 어떤 방향에서 어떤 세기로 불어오는지 구체적으로 측정도 안 되고 그 원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바람의 소리는 들리므로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고 나면 흔적이 남기에 방금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바람이 부는데 힘을 전혀 보태지도 못하고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성령의 거듭남도 이와 동일한 방식이라 인간의 지정의로 언제 어떻게 자기 영혼에 역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바람의 소리가 들리듯이 뭔가 나에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그에 대한 내 생각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 줄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는 이유가 대체로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고난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가장 잘 낫고 자기 능력으로 무슨 일이든 다 성공할 것처럼 설쳤습니다. 그러다 현실 고난이나 중병이 생기면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됩니다. 절대자가 어떤 분인지 또 그분에게 어떻게 간구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만약 세상사 전부를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면 제발 저를 도와달라고 생전 처음으로 기도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바람을 불어서 그 주변에 서서히 인생의 풍파가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설마 그런 고난이 하나님이 불러일으키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모릅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당연히 인간의 고난을 막아주고 현실적 형통을 주어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바뀝니다. 현실 고난을 해결하러 왔으나 막상 문제의 근원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자기를 자기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힘든 일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도 그분의 의로운 뜻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정말로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며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온갖 잘못에 대해서도 겸허한 도덕적 성찰과 회개가 따릅니다. 전혀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치사하고 완악하며 추한 죄악이었고 또 그런 죄를 아무런 가책 없이 지었고 심지어 즐겼던 자신이 지나고 보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나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자신의 지난 모든 실패와 잘못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까닭임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라 창조 통치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이제부터 범사를 성경에 계시가 된 그분의 절대적인 영적 진리에 따라 분별 판단 선택 결단 시행하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을 부패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었던 인간인 자신 중심에서 오직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여서 구원해주시고 그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거룩하게 주관해주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그런 내면의 변화가 자기가 봐도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만이 너무나 완악하고 추한 자신의 죄를 깨끗게 해줄 수 있다는 기독교의 복음을 순전히 믿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종교적 광신자들이 지어낸 궤변일 뿐이라고 반발 비난만 해왔습니다. 교회 출석한 후로도 고난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었지 의지적으로 그 진리를 믿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감 부담감 없이 저절로 그 진리에 대해 확신하고서 반드시 그 진리대로 살고 싶다는 소원과 열정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불고 있는 성령의 바람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랐던 이전의 삶과 인생이 너무나 헛된 낭비였음을 철저히 깨닫고 다시는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살았던 삶을 따르려고 결단하며 실천합니다. 성령이 역사한 과정은 여전히 모르고 또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어도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확하게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그 본인이 압니다. 성령의 바람이 강력하게 불고 지나간 흔적이 자신의 영혼에 깊숙이 파인 것입니다.

 

당시의 니고데모에겐 주님의 이 비유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추가로 질문했습니다.(9절), 주님은 21절까지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겪었던 불 뱀 사건에 비추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 추가 설명에 대한 그의 반응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끝까지 십자가 구원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쩌면 이전보다 더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이 열등했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 말씀 그대로 아직 성령의 바람이 그에게 불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중생과 그 결과로 본인이 회심하는 것은 실제로 본인이 겪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구원으로 예정은 되었어도 막상 구원의 은혜가 실현될 때가 아직 아니었을 뿐입니다. 

 

니고데모의 구원은?

 

그러나 성경은 결국은 그가 구원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회원이자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날 밤에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서 주님의 시신을 거두어 가기를 요청하여 허락받았습니다.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백 근쯤 갖고 와서 함께 요셉의 가족 묘지에 유대식 장례 예법대로 주님을 안장했습니다.(요19:38-42) 아무 잘못 없는 주님을 누명을 씌워서 죽인 산헤드린의 잘못을 같은 관원으로서 대신 사죄한 것도 아니요, 또 예수님과 같은 일당으로 몰릴까 두려워서 숨어있는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측은지심에서 대신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설명한 그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펴본 대로 육으로 태어난다는 일차적 의미는 육체를 뜻하지만 문맥상 자연인 상태의 영혼도 됩니다. 불신자의 영이 도덕적으로 추악한 죄를 짓겠다는 마음으로 차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게 지어진 흔적이 누구에게나 정도는 달라도 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기본 원리는 도덕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선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 두 사람은 예수를 알기 전부터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육으로 난 영혼은 이브가 하나님을 무시 외면하고 자기가 그분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원죄를 범했던 그런 마음 상태입니다. 근본적인 가치관이 인간인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에 고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 행해야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는 모두 원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으로 종교도 자신이 고안해 내고 특별히 그래서 착한 자가 천국을 가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교묘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지 모르고 자신은 남보다 더 선하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만 가지고 사회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지만 객관적 합리적으로만 따져도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부패한 죄인인 줄 사실상 판단이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알게 모르게 인식했어도 치사한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로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성과 다르게 위선적인 의를 행하는 것이 육입니다. 

 

결국 예수 십자가의 조건 없는 용서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육입니다. 자신이 천하 죄인 중의 괴수로 그 죗값을 갚으려고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죽었다는 구원 진리에 절대 동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령이 역사해야만 그 완악한 마음이 바뀌는데 예수 믿는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한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흘간 실제적인 죽음을 체험할 때 성령의 바람이 그의 영혼에 강력히 불어주어서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 자라고 자랑하던 사울에서 겸손하게 작은 자로 시인하는 바울로 바뀐 후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헬라인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유대인은 걸림돌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도 했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겐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볼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예수님 그분은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위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이 굳이 저주할 자라고 말한다고 표현했습니까?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 그렇게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주에 앞장섰던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생생한 중생 체험을 바탕으로 성령이 아니고는 그 저주를 그치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저주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이 역사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바람이 불며 지나갔다는 흔적이 남아야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主, the Lord)는 언제든 자기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어도 군말 없이 기꺼이 곧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거듭남의 구원을 실제로 체험하고서 예수님과 실제로 교제 동행하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분만의 십자가의 긍휼과 권능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만 그분이 사셨던 삶을 따라가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인생의 첫째가는 아니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던 방향과 정반대로 자기 인생을 유턴했어야만 영으로 난 것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밤중에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서 자기 가족묘에 안장한 것이 바로 그렇게 되었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모든 정황상 유대의 공회원 지위를 잃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전의 안락하고 풍요롭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기꺼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온갖 멸시 비방 핍박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도 아마 처음에는 예수님이 장로의 유전과 율법의 인식일 규정을 예사로 어기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라고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자들이 당신들의 모든 것과 흔쾌히 맞바꾸며 예수님을 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분명히 성령의 거듭남입니다. 

 

본문의 대면 이후 니고데모는 혼자만의 영적인 갈등을 겪다가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때 일어난 신령한 사건들을 보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이라도 그에게 성령의 바람이 개별적으로 미리 불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헤드린 공회원 70명 중에 최소 두 명의 당신의 남은 자를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또 다른 생생한 증거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기독교 교리를 배워서 수긍 동의하는 관념적인 구원이 절대 아니며 실제로 성령이 한 죄인에게 역사하여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체험적인 구원입니다. 사탄을 주로 모시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이미 되어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 보십시오. 아직도 육을 앞세우는 본성은 살아 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열정은 있습니까? 다시는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는 각오는 물론 비록 더디더라도 그 실천이 따릅니까? 그렇지 않고 범사를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판단 시행하면서 교회에서도 자기 형통과 안일만 구하고 있습니까?

 

구원받았는지 점검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왜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구원해주셨는지, 또 지금도 수시로 죄를 짓고 있는데도 왜 참아주고 계시는지,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왜 생기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의로운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이 심어주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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