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4:29-31) 예수님은 두 번 재림하시는가?

구원 완성 담화 (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9-31)

 

우주 판타지 쇼 같은 종말?

 

때가 차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주님은 재림 전의 징조와 당신께서 재림하시는 모습 두 단계로 나눠서 예언해주셨습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마지막 징조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탄이 신자들에게 극심한 핍박을 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을 감해주려고 당신께서 곧바로 오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재림하시는 모습에 대한 예언을 알아볼 차례인데 유감스럽게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씀만 하셨습니다. 우주 전체가 완전히 전복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고 그런 가운데 당신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땅에선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이라고 합니다. 

 

천체 물리학이 발달해 다른 행성에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볼 때도 황당할 정도의 엄청난 말씀입니다. 과학적으로 미개했던 당시에 갈릴리 시골 출신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성경 해석에서 가장 먼저 행할 과제는 저작 당시의 의미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첫째는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사13:10)라는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는 엄청난 규모의 재앙을 겪으며 완전히 멸망 당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지 실제로 바벨론이 하나님께 심판받을 때 하늘과 천체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사34:4)로, 이는 에돔 같은 열방들에 임할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고 완전한 멸망을 상징할 뿐입니다.

 

이외에도 구약성경 곳곳에서(사13: 9,10, 겔32:7,8 욜2:10,31, 3:15, 암8:9 등) 종말적 심판을 하늘이 전복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우선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내실 때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기 전 마지막 아홉 번째로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고센 땅을 제외한 애굽 전역에 사흘간 흑암의 재앙으로 벌하셨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출10:21-23) 그래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도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죄로 철저하게 응징받았듯이 바벨론과 열방들도 완벽하고도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점성술이 성행했고 또 거의 모든 족속들이 해, 달, 별들을 숭배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계획과 노력대로 인생사가 진행되지 않고 온갖 고난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방해한 탓이라고 여기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해 보이는 존재가 하늘의 천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과 정반대로 하늘의 뭇별들은 물론 그 별들을 품고 있는 하늘마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 당신께서 언제든 없앨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그런 표현들은 마지막 날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심판이 임하므로 온 세상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구약의 이런 예언들에 익숙하기에 굳이 문자적으로 그 의미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되는 사시사철을 끝까지 그대로 두시겠다고 노아에게 주신 약속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로선 마지막 날의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도 역사 이래 최고의 환난이 일어나면 구약성경이 계시한 대로 스승이 마지막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오해가 전혀 없었기에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알아야 할 본문의 정확하고도 유일한 뜻입니다. 

 

구름 타고 오실 주님?

 

성경의 실질적 저자이신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을 포함해 장래 일을 육하원칙에 따라서 명료하게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인간 선지자들도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만, 그것도 비유 상징 묵시를 통해 대언(代言)만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 예언을 해석하는 첫째 원칙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인 진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도 완전한 종말적 심판이라는 주제에 비추면 몇 가지 영적 원리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했습니다.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마지막 적그리스도로 인한 대환난이 있겠지만 곧바로 하늘에선 마지막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환난의 날을 당신께서 감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다시 다짐한 것입니다. 환난과 재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몰라도 대환난에 신자들이 다 죽도록 절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때’를 반복한 평행구조이므로 두 사건이 시차가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하늘에서 강림하시는 모습을 모든 족속들이 다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구의 반이 낮이면 나머지 반은 밤이기에 아무리 장엄한 모습으로 강림하셔도 그 반대편의 전 세계 절반의 사람들은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미국 목사가 지금은 SNS로 생중계되므로 모든 이가 동시에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기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간단하고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대신에 영적 진리를 찾아야 하는데 무슨 문제든 다른 성경 말씀 안에 해석의 근거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스승을 앞으로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 못내 아쉬워서 제자들이 목을 빼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곁에 나타난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주님이 올라가신 모습을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고 표현했습니다. 그럼 재림 때도 예수님이 하늘의 구름 속에서 서서히 내려오신다는 뜻입니까? 아무도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하늘로 올라갔으니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보다는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야단치듯이 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오시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스승이 명하신 대로 너희들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이끌어주실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인자로서 지상에서 십자가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기에 다시 성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웠던 본체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올라가신 모습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도 제2위 하나님으로서 그동안 열려있던 구원의 길을 마감시키려고 오신다는 뜻입니다. 아기 예수로 초라하게 초림하셨던 모습과 정반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구름이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고 했으니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로켓처럼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권을 넘어서 성층권으로 계속 쭉쭉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름 사이로 오르시다가 홀연히 영계의 천국으로 들어가심으로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재림 때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천국에서 홀연히 오신다는 것 이상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따지면 구름은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허공에 밀집해 있는 현상입니다. 비행기를 타보면 알 수 있듯이 막상 구름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수많은 물방울 외에 특정한 실체가 없으므로 손오공처럼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없습니다. 출애굽 후에 광야를 통과할 때 성막 위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보호 인도해준 구름은 여호와가 임재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소에 가득한 구름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왕상 8:10,11, 대하5:13,14) 고대에는 구름까지 올라가 관측할 수 없었기에 하늘은 물론 구름도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입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신다는 말씀도 고대인의 이런 관념에 맞춘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통곡하는 모든 족속들?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라는 말씀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주님이 장엄한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모습을 본다고 해도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부터 할 리는 없습니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얼어붙어 꼼짝달싹도 못 할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을 혹은 그분 같은 거룩한 존재를 대면하니까 죄에 찌든 인간들로선 필연적으로 공포심과 경배심이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통곡하는 대신에 손뼉을 치며 환호할 것입니다. 간혹 운다고 해도 감격에 겨워서 흘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들”은 지난주에 설명해 드린 대로 하늘을 소망하지 않기에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며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모든 불신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재림 모습을 보고 이왕이면 예수 믿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잠시 후회는 해도 곧바로 통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정통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은 착한 자가 천국 가야 옳고 자기는 평균 이상으로 착하다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심판이 두려워서 진심으로 회개하며 통곡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그들이 결국 통곡할 수밖에 없는 심판을 곧바로 행할 것인데 그때 가서 아무리 통곡해도 이미 늦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와 상반되는 의미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나팔은 왕의 대관식이나 행차, 전쟁의 출정식 같은 국가적 행사에서 울려 퍼집니다. 나팔 소리가 울리면 천사들이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으신다고 했으니 본문에선 심판보다는 구원이 곧바로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결국 예수님 예언의 요점은 당신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러 오셨다는 사실을 모든 이가 곧바로 확실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과 땅만 바라본 족속들을 정확히 구분할 것이므로 사람들이 어떤 변명과 핑계도 댈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남은 일은 불신자에겐 통곡이, 신자에겐 환희뿐입니다. 

 

주님의 이 예언은 재림의 물리적 상황이 아니라 그 의미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홀연히 오셔서 홀연히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어 홀연히 완성할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 재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대해석하려 들면, 천사들이 주님 승천 때에 제자들을 꾸짖은 그대로 꾸짖을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아. 예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영광스러운 심판주로 오실 것이니까 그 시기와 징조를 끼워서 맞추려 하지 말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깨어서 준비하라.”고 말입니다. 

 

두 번의 재림?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실상은 여전히 그런 꾸중을 듣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의 재림 시기나 그 전의 징조에 대해서 온갖 억측이 난무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모습에 관해서도 도가 넘치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님이 공중에 재림해 계시다가 지구상에 대환난이 끝날 즈음에 다시 지상 재림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두 번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재림하실 때는 지상의 신실한 신자를 휴거시켜서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7년간 기거하게 한 후에 그들과 함께 지상으로 강림해서 사탄을 멸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시킨다고 해석합니다. 온전히 믿지 않고 형식적으로 교회만 다니는 신자들을 그사이에 지상에 남겨 두어서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환난을 견디는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면 불신자와 사탄과 함께 영원한 심판에 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에 대해 직접 예언하신 본문에는 두 번 강림한다는 언급은커녕 그런 힌트도 전혀 없습니다. 구름 타고 오시는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만 했지, 사람들을 그 구름 위로 끌어올리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했으나 모으는 곳이 하늘의 구름이라고 해석될 여지는 없습니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라는 말은 주님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강림하신다는 앞의 말씀과 연결된 표현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하늘에서 볼 때 세상의 이 끝과 저 끝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표현 그대로 해석하려면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럼 더더욱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이 공중 들림을 받는 것과는 무관해집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은 택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택한 자를 빠짐없이 다 모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택한 자가 지상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더 이상 구원도 없습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처럼 지상에 남아 있는 선데이크리스천들이 대환난을 이겨내는 조건으로 구원을 주면 주님의 십자가 은혜 구원 진리와 상충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강인한 의지력 테스트이지 순전한 믿음의 구원이 아닙니다. 환난 기간에 휴거 되지 못하다가 다시 구원받은 자는 두 가지 공포심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첫째는 당장의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박해와 둘째는 만약 그 박해에 지게 되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럼 비유컨대 인간을 사각 링에 올려놓고 7년 동안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견뎌내면 신자로 인정해주겠다는 냉혹하고 잔인한 하나님이 됩니다. 구원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지 않고 인간의 노력 그것도 담력의 세기에 따라 인간이 쟁취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일차 공중 재림하였을 때 신실한 신자들이 일시에 다 휴거 되면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부 불신자들이 뒤늦게나마 적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보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심과는 관계없이 그런 자들도 구원해주어야 한다는 불합리한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모든 이단이 겉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서 그 숨겨진 본질은 두 번 재림 주장처럼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강조하는 행위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순전히 믿게 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처음부터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다시 오신다고 강조하셨고 바로 앞에서 환난의 날을 감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후”란 적그리스도의 환난을 감하다가 완전히 종결된 후입니다. 적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멸망시킨 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목격하면 곧바로 불신자들은 통곡하고 신자들은 불러 모은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 후까지 사탄이 맘껏 신자들을 괴롭힌다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신에 사탄을 멸하려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만 있습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

 

물론 그들 나름대로 두 번 재림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의 부활에 관해서 설명한 살전4:13-18에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문구 하나입니다. 그 구절이 속한 문단 전체를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으므로 주님 재림의 모습이라는 주제와 관련되는 내용만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성경은 반드시 당시 상황에 비춰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고 상징과 묵시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 해석의 절대적 원칙입니다. 종말에 관해선 더더욱 그래야 하나 두 번 재림 이론은 이런 원칙들과 완전히 어긋나는 해석입니다. 문맥상의 의미를 따지라는 것은 저자가 강조 내지 설명하려는 주제에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주제를 쉽게 알려면 서론과 결론을 보면 됩니다.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중 부정 즉, 강력한 긍정으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문단의 주제는 예수님 재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걱정하고 있는 ‘자는 자들’이 어떻게 될지 가르쳐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도 자기가 설명해준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AD 51년경에 저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보다 몇 달 뒤에 저작된 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11,12) 이제 곧 주님이 다시 오셔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니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무위도식하는 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예배 때마다 각자가 만들어 온 음식을 나누며 교제했는데 음식도 만들어오지 않고 남의 음식만 축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언제 오시던 그때까지는 생업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남에게 피해는 주어선 안 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부활 때까지 음부에서 잠을 잔다고 여겼습니다. 살펴본 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세대 안에 다시 오신다고 믿었기에 그때 살아 있는 신자들은 문제없지만 이미 죽은 신자들이 부활에 참여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또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해서 부활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죽었거나 예수 안에서 아직 살아있는 자 둘 다 아무 차별 없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죽은 신자는 그동안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가 함께 강림할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문제의 공중 들림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했듯이 바울도 천사들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강림하신다고 예수님이 직접 예언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부터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고 상징적 의미를 살펴야 했듯이 바울의 이 말씀도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방점은 후반부에 찍힙니다. 먼저 죽은 신자나 살아있는 신자나 함께 부활하여 같은 장소에서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맥상의 주제가 자는 자들의 부활도 보장되니까 안심하고 서로 위로하라는 것이지 공중 들림 받을 수 있으니 신나게 기대하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자는 자들이 부활에 제외될 것만 걱정했을 뿐 공중 들림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제2의 구원 기회?

 

나아가 바울 스스로 자기가 전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12:4,6) 낙원으로 이끌려 간 그를 안다고 했지만 곧바로 주어를 ‘내’로 바꿨으니 바울 자신이 입신하여 천국을 보고 온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되는 엄청난 천국의 비밀을 듣고 왔다고 합니다. 바울이 천국에 가서 가장 먼저 무슨 비밀을 알아보려 했겠습니까?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잠시 영혼만 천국을 방문했기에 다시 일상적 의식으로 돌아오면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추측건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신자들이 그러하듯이 바울도 가장 먼저 주님께 언제 다시 오시며 어떻게 오시는지 물어봤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 할 말을” 들었다고 했으니 그 질문에 대한 해답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주님께 들은 말이니까 그대로 전해도 분명한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이지만 자신의 글을 읽거나 가르침을 듣는 신자들이 오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할까 봐 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해 가장 관심이 많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그런 맥락에서 멸망의 아들과 먼저 죽은 신자의 부활에 관해서 주님의 예언을 일차로 인용하되 그 근본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 본인이 공중 들림을 절대 문자적 극단적으로 해석 적용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셈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성경 말씀을 이쪽저쪽에서 부분적으로만 인용해 주님이 두 번 재림한다고 억지로 꿰맞추고 있습니다. 

 

입이 아프도록 강조해도 부족한데, 구원과 심판에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것도 아주 짧기 때문이며 죽은 후에는 곧바로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집니다. 어떤 교파처럼 죽은 후에 모두 한곳에 모여서 회개할 수 있는 제2의 기회는 없습니다. 두 번의 재림자체가 없으니까 그사이에 다시 예수님을 순전히 믿을 수 있다는 주장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 두 번 재림이 있다 쳐도 언제 있을지 모르는 먼 훗날의 일인데다 제2의 기회가 있으니까 굳이 미리부터 믿어서 세상 풍요와 쾌락을 멀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쪽 발은 교회에 담그고 열심히 봉사하고 다른 발은 세상에서 활보하며 세상 사람처럼 살면 됩니다. 주님이 공중 재림하실 때 교회 봉사한 공로로 들림 받으면 다행이고, 그러지 못해도 죽기 살기로 환난을 이겨내면 지상 재림 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마저 실패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때 가서 염려할 문제라고 손쉽게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도하면 많은 이들이 세상 재미 좀 보다가 나중에 믿겠다고 반응하듯이 말입니다. 

 

두 번 재림이 옳다면 예수님이 공중 재림할 때 땅에 남은 신자는 두 번의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그 전에 이미 올림을 받은 신자와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게으른 자를 무익한 종이라고 야단치며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마25:30)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개인적인 구원의 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땅 전체의 구원은 당신의 재림 때까지 잠시 연기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된 후에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14절) 모든 이를 이미 구원으로 초대했으니 다시 오신 후에는 구원 사역을 다시 수행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초대를 거부한 자들을 심판만 하십니다. 

 

죽은 지 나흘 된 오빠 나사로에 대해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4,25)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는 자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그의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재림은 물론 부활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당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신자로 죽어야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지 불신자로 죽으면 영원한 죽음의 부활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전체 내용은 오직 예수를 믿으라는 한 마디로 축약됩니다. 원시복음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레미야 언약을 거쳐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까지 그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예 예수가 처음이자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라고 강조하면서 그에 보태거나 줄이면 생명책에서 빼버린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뿐으로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밖에는 영원한 죽음이요 예수 안에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굳이 알아보려 수고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와 있음에 항상 감사하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 모든 족속에게, 즉 가까운 이웃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면 됩니다. 

 

(1/2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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