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0-42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조회 수 408 추천 수 11 2009.09.19 01: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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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1:40-42)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는 기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에게 그런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또 복음서에 치유 기사들이 많은 것도 그런 간과(看過)에 일조(一助)를 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단순히 한 문둥병자를 고쳐준 이야기로 지나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치유나 이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기록되어졌어야만 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가 반드시 있었다는 뜻입니다. 본문도 당연히 그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우선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릴 정도로 그 믿음이 돋보입니다. 최고로 존경하는 예를 갖추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문둥병자들은 성 밖에 격리되어 살았기에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엎드린 것보다는 찾아온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 격리된 곳에 문둥병자가 한 명만 있었을 것은 아닌데도 이 사람만 찾아온 것입니다. 그 곳에 어느 날부터인가 한 젊은 랍비가 모든 병을 고쳐준다는 소문이 흘러들어 왔었는데 다른 병자들은 다 무시했지만 그만이 자기 인생에 한 가지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단순히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쯤은 시도해보지 하는 정도의 희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원하시면”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기 싫은 사람도 있었고 또 문둥병 같이 불결한 병이라 혹시 꺼려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한 뜻이  아닙니다.

벙어리 귀신이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온 한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9:22)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이 사건과 비교해보면 “원하시면”은 믿음에서 “할 수 있거든”의 다음 단계를 의미합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관해선 아예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능력이 문제가 안 되면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또 다시 예수님이 환자의 믿음이나 상태를 보고 당신의 선호(選好)를 구분해서 치유를 선택할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아비의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셨지만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었지 않습니까? “원하시면”이란 예수님의 전적인 주권에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고쳐주시면 고쳐주시는 대로, 또 그냥 돌려보내도 돌려보내는 대로 자기로선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고쳐주지 않은 것이 예수님이 자기를 싫어하고 미워했거나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만의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그대로 순복하겠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만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 믿음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겼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간절히 열망했다”는 뜻입니다. 병자의 고통을 목격하고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져 치유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일부 사본에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독법으로도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 병으로 한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사단의 세력에 대해 통분히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너무나 당연히 예수님으로서도 병을 치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병자의 현재의 영육간의 상태에 대해 지극한 긍휼과 애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만약 이 기록에 “민망히 여기사”라는 표현이 빠져 있다면 그야말로 당신의 능력만 발휘한 셈이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든 치유할 능력을 갖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특별히 민망히 여기실 때에, 즉 당신이 원하실 때에 그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예수님께 자신이 민망하게 보여야 합니다. 일부러 불쌍하게 보이려고 가장(假裝) 내지 과장(誇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 응답만 받으려 기를 쓰고 고함지르거나 눈물 콧물 쏟아가며 기도하려 애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한 속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눈물 콧물을 보여야, 아니 예수님은 이미 보고 계십니다. 정말 심령이 갈급하고 비탄에 빠져 이 세상에선 어떤 위로와 능력도 없기에 오직 예수님 당신만 바라보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당신이 주시는 선물만 받으려 엎드려 봐야 예수님이 모르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속으로만 민망히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직접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었습니다. 어느 누가 쉽게 문둥병자에게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당시 관습으로, 아니 하나님마저 부정한 자를 접촉하면 그 접촉한 자도 부정하게 되기에 율법으로 금지시켰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만으로도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 병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또 더러운 세력에 대해 통분히 여기는 열정이 없이는 절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율법을 수여한 하나님이시기에 얼마든지 그 율법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율법의 근본정신도 바로 사랑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당신이 바로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원하시면” 자기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도 할 필요 없이 마음만 먹어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는데 천하에 더러운 문둥병자를 직접 만져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만지기는커녕 쳐다보지도 곁에 오기도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그가 느낀 감격은 세상의 어떤 문호(文豪)라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이 와 닿는 순간 그로선 평생에 처음으로 참 사랑을, 완전한 사랑을,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을 맛보아 정말 영육간이 완전히 치유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한 사람의 랍비나 능력 있는 은사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근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과 자신의 영이, 인격과 인격이, 존재와 존재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그의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천하의 볼품없고 부정한 한 문둥병자와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일대일로 개인적 대면(對面)이 이뤄진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과 이 문둥병자와의 아름다운 교제 안에 개입, 아니 그 의미조차 추측할 수 없습니다. 오직 두 사람만의 비밀스럽고도 특수한 관계가 생긴 것입니다. 정말 문둥병자 머리카락까지도 예수님의 세인 바 되었고 그의 침 삼키는 순간도 예수님에게 붙잡힌바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참다운 의미는 바로 예수님과 나만의 비밀스런 관계를 맺고 날마다 새롭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분이 신랑이요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사랑하는 두 연인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다른 유일한 차이는 애정의 세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 사랑하니까 연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오직 두 사람 만이 아는 교제의 비밀을 날마다 새롭게 쌓아가며 또 그것을 아주 소중이 여기며 가꾸어 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원하며 또 실제로 하고 있는 예수님과의 교제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당신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직접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제 모든 진심과 열심과 정성을 다 동원해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고쳐주지 않습니까? 말만 해도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 왜 이리 지체하십니까?”

아직도 예수님께 꾸중들은 그 아비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양 믿고 있지만 오히려 전혀 믿음이 없음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만한 착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있음을 안 믿는 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불신자도 치유의 이적이 기독교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기까지 합니다. 그들도 최후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기도원으로 찾아오지 않습니까?    

신자의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민망함을 정말 하나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다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자신을 볼 때에 벌써 민망함을 느껴야 합니다. 정말 자신의 모든 영육간의 상태가 가난함을 절감하고 애통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 없이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능성과 소망이 없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그분 앞에 엎드리셔야 합니다.

복음서의 수많은 치유의 기록을 보면 그 상황과 이루어진 치유 과정이 다 다릅니다. 같거나 아니 비슷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환자에게 각별히 개인적인 애정을 표시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며 가장 유익하며 그 무엇보다도 당신과 진정으로 비밀스런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틀림없이 요한 사도가 증언했던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에 아무 것도 아닌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두가 큰일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신자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며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납니다.

문둥병자 세리 죄인 고아 과부같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멸시받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분과 일대일의 관계만 맺게 되면 곧바로 당신의 자녀이자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천국을 다 소유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됨에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벌거벗고 민망함까지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한 가지 조건을 빼고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하며 교회에 봉사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심지어 배우자도 모르고 당신과 예수님만이 아는 비밀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11/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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