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야곱 바로 알기 (1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창29:21-27)

 

똑같이 당하는 야곱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피한 야곱은 둘째 딸 라헬을 깊이 사랑하였고 칠년의 노력 봉사를 마친 후에 드디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을 마치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장녀 레아가 자기 곁에 누어있었습니다. 신부가 바뀌었는데도 몰랐을 정도로 그는 만취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당시의 결혼 풍속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헬과 다시 결혼하려면 칠 일을 채우라고 라반이 요구했는데(27절) 결혼잔치를 7일 간 거행한다는 뜻입니다. 친척 친지 주민들을 불러서 일주일 간 푸짐한 음식과 술을 대접했는데 주빈인 신랑이 일일이 인사하며 접대해야 합니다. 마지막 7일 째 밤에 비로소 신방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때 처음으로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아비 이삭을 속일 때에 성경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말합니다. 술에 만취하면 눈앞의 물건이 흐리게 또는 두세 개로 겹쳐서 보입니다. 이성적인 판단력은 흐려지고 감정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인데 야곱은 어서 빨리 신방을 치르고 싶은 마음이 앞서 더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레아로선 행동거지와 말투와 표정 등에서 라헬과 똑같이 보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며 야곱이 의심스러워하면 더 애교부리며 라헬이라고 시침을 뗐을 것입니다.

 

당시에 가부장 제도가 엄격해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다 해도 결혼은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사입니다. 이미 라헬과 혼약이 되어있기에 본인이 싫으면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레아가 아비의 음모에 가담하려면 야곱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거나 최소한 싫지는 않았어야 합니다. 아비 이삭이 형 에서에게 장자권을 줄 것이 확실한데도 야곱이 장자권을 너무 갖고 싶어서 뻔뻔하게 아비를 끌까지 속일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창29:17)라고 증언합니다. 문자적 의미로 눈이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가 모자란다는 히브리어 숙어입니다. 이어서 라헬은 아름답다고 하니 레아는 외모나 지혜에서 라헬보다 많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레아는 나이가 들수록 시집갈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며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흔쾌히 아비의 공범자가 된 것입니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야곱이 아비를 속인 사건과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등장인물과 위장방식과 진행과정은 물론이고 그로 인한 결과까지 같습니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뒤바뀌는 것은 장자권과 마찬가지로 야곱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너무나 중대한 일입니다. 야곱의 개인적인 욕심이 앞서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속였더니 거꾸로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려는 아버지 라반과 딸 레아의 공모에 그대로 속임을 당했습니다. 돌아가는 형편을 모르고 가만히 앉아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라헬이 에서처럼 친형제인 것까지 같습니다.

 

최선을 다한 라반

 

이 사건을 보면 당장 떠오르는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심은 대로 거둔다”가 그것입니다. 속담은 인간사회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하기에 사실상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입니다. 나아가 인간사회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관 통치하시므로 그분의 보편적인 뜻이기도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듯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심겨진 것이 콩이므로 열매도 콩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중도에 비바람이 불거나 가뭄이 져도 그 결과는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어떤 죄라도 일단 범해지면 그 부정적인 결과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납니다. 외부의 자극과 상관없이 콩이 반드시 열리듯이 하나님이 구태여 죄에 대해 벌을 주지 않아도 반드시 그 대가는 치르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 후반부에 기록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그 완악하고 상실한 마음의 정욕대로 그대로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고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등의 부정적인 결과로 발전 확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또 다른 한국 속담이 성경의 이 진술이 진리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문의 라반의 사기 사건이 야곱이 아비를 속인 죄를 벌주려고 여호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라반의 잘못된 마음을 그대로 둔 것입니다. 그리고 라반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그것도 정상참작을 해줄만한 딱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시집 못 갈 언니를 배려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야곱 본인은 물론 그가 관여된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의 나이가 이미 77 세였다는 사실을 항상 감안해야 합니다. 라반이 야곱을 만났을 때는 누이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 간지가 이미 97년이 지났으니 최하로 잡아도 백이십 세가량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시집 안 간 과년한 딸이 둘이 있었습니다.

 

고대에 자식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그만큼 많은 복을 받았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원시적인 농경사회에선 소중한 노동력이 되니까 현실적으로 생활이 윤택해지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자꾸 노쇠해 가는데 라반에게  그 당시에는 아들이 없었거나 있어도 아직은 많이 어렸던 것 같습니다.(창31;1) 그러니까 라헬이 양을 치고 있었으며 그럼 분명히 나이도 꽤 되었을 텐데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의 항의를 듣자마자 라헬도 곧바로 칠일 후에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라헬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이미 레아를 먼저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먼저 결혼지참금 조로 칠년을 무임금으로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으니까 레아도 아내가 되었으니 공평하게 똑같은 지참금을 내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야곱을 어떻게든 자기 집에 묶어놓고서 아들 손자를 많이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두 딸들의 앞날도 평안해질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너무 사랑하는 줄 아니까 교묘하게 두 딸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려는 자기 계획을 이룬 것입니다.

 

고대에는 일부다처제가 아무 잘못이 아니며 자매를 함께 취하는 일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속인 것이 밝혀진 후에 곧바로 라반은 야곱에게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26절)라고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 양 떳떳하게 대꾸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칠일만 더 참으면 처음 약속한 대로 칠년을 채웠으니까 그렇게 원하던 라헬까지 아내로 얻을 수 있으니까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아내를 단번에 둘이나 얻었으니 원망보다는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뜻까지 넌지시 내비친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답게 남들의 비방을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이득은 먼저 다 챙겼고 야곱더러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회유했습니다. 야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노회한 사기술이었습니다. 라반의 처지에선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안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의 입장에 쳐했어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그런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간사회 윤리

 

이 사기 사건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라반의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26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라반은 분명히 야곱을 속였고 생각지도 모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 지방의 풍습을 따르면서 집안을 부유케 만드는 것이 더 큰 선이므로 거짓말한 작은 악은 덮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결과만 선하면 작은 악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무시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방마다 나름의 풍습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선은 저곳에서 악이 되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풍습이란 그 사회를 선하게 이끄는 최소한 큰 문제가 없게 유지하는 도덕적 종교적 계명의 역할을 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윤리적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은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만 적합한 규정이라는 뜻입니다. 당장의 현실적인 안전과 풍요만 보장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 통용되는 바꿔 말해 인간이 고안한 모든 도덕과 종교는 각 지역과 시대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래서 세상에선 종교도 자기에 적합한 것을 고르면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빠진 인간에게서 나왔으니 결국 인간의 편의만 고려한 것이며 또 그것이 인간 사회의 최고의 선이 됩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선한 기준은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결과를 따지지 않고 그 동기인 마음의 중심을 먼저 보십니다. 그 기준을 따라는 자들로 당신을 닮도록 거룩하게 변화 성장시키며 그들의 공동체도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서로 간에 자발적 의사에 따라 맺은 약속이므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라반에게 아무리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고 또 당시 그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선한 일로 간주될지라도 반드시 라헬을 야곱에게 먼저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 라반이 하나님에게 무릎 꿇고 레아의 문제도 해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만의 선한 방식으로 응답해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라헬에게 오래 동안 아이가 안 생겼으니까 야곱이 나서서 레아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서로 간에 얼굴 붉히며 비난 정죄할 일은 아예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길과 다른 하나님

 

본문 사건에서 성경기록을 앞뒤로 살피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야곱에게 속았는데 비록 히브리 숙어로 뜻은 다르지만 시력이 약한 레아에게 야곱은 술에 취해서 눈이 보이지 않아 속아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얼마든지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는데 시력이 약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두 사건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도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그 완악한 마음에 버려둔다고 해서 세상의 문제와 고난을 절대로 외면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 안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공평과 정의를 반드시 실현하고 계십니다. 본문 사건에서도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지만 윤리적으로 선하지 않은 일에 처하도록 주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불신자는 상실한 마음에 버려두어도 되지만 당신의 언약의 장자인 야곱의 삶은 거룩하게 이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야곱이 아비를 속인 죄에 대한 징계를 꼭 일부다처제라는 악한 모습을 통해야만 했는지 의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악 간의 기준이 인간의 것처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어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종종 그런 비슷한 경우를 목격합니다. 성도들 중에 분명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현실 계산에 영악한 자들이 더 형통합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 재정을 도맡아 책임지며 그 자녀들도 공부 잘하고 착하고 믿음도 좋습니다. 우리 생각에 그들은 그래선 안 되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금전적 혹은 성적인 스캔들에 휩싸인 목회자의 교회는 설교가 번드르르하다는 이유만으로 크게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적용 실현하는 선악 기준이 굽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땅에서 아무리 높아도 하늘의 시작일 뿐이라 땅은 절대로 하늘 끝에 닿을 수 없습니다. 땅이 끝나는 곳에서 하늘은 시작됩니다. 인간의 모든 수간이 고갈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그분의 큰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땅에 사는 인간의 생각과 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길과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물리적 힘의 비교가 아니라 생각과 길 즉, 지식과 지혜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성경이 가족끼리 서로 속이고 속는 두 사건의 주역들을 눈이 어둡다고 표현한 까닭입니다.

 

인간이 인간사회를 주관하는 기준은 라반의 말 대로 자기 지방과 당대의 현실적 유익 하나뿐이나 하나님의 기준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영원을 가로지르는 그분의 생각과 길을 시공간에 제한된 인간으로선 추측 분석 계산 예상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한 가지 대응책뿐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선하시고 의롭다는 점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든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바탕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니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과 길이 가장 다른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악한 자가 심판을 받고 착한 자가 천국을 가야 맞을 것 같은데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불합리는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따져도 하나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고 선만 행한 당신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불신자들이 로마 형수와 자기 죄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충분히 항변할 만합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오직 하나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세상 즉,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피조세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해서 구원 받은 자들로 세상에 대한 청지기직을 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인간과 교제하며 인간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창조의 부산물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되어 있기에 죄로 타락하여 고달픈 세상을 살게 될 줄을 아시고도 어폐가 있지만 자유의지를 주시는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지금 야곱과 라반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더 악합니까? 하나님 안에선 둘 다 똑같은 사기꾼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가지 사건을 갖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일생 전체를 보며, 더 정확하게는 심령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분을 거역하여 원수의 자리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을 인간과 다르다고 인정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우리 눈에 아무리 이해가 안 되고 때로는 비윤리적으로 비췰지라도 오직 인간을 사랑하시는 뜻에 따는 것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금령부터 그렇습니다. 당신의 품을 떠나는 순간 너희에겐 영원한 영적 죽음이 기다리니까 제발 나의 사랑 안에만 거하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지 않다면 또 인간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인간에게 줄 수 없고 주어선 안 되는 명령입니다.

 

열두 아들을 주려는 것이다.

 

야곱의 아내가 넷이 된 것은 라반의 개인적인 욕심을 넘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었습니다. 야곱으로 열두 아들을 갖게 하려는, 이 또한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만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일부일처제로선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열두 아들을 낳기는 힘들었습니다.

 

고대에는 딸이 시집을 가면 그 동안 데리고 있던 여종을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주어서 따라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아내와 그 모든 소유가 남편의 것이 되고 남편 재량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남편이 여종과 관계를 맺으면 정식 아내로 받아들여지고 그 자식도 아버지 호적에 올렸습니다. 야곱의 첫 아내 레아가 여섯 아들을, 그의 몸종 실바와 라헬과 그녀의 몸종 빌하가 각각 둘씩 총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야곱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게 하려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습니다.

 

공간은 네 방향과 가로 세로 높이 세 차원으로 이뤄지니까 그 둘을 곱하면 열둘이 됩니다. 일 년도 열두 달이니까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 땅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꽉 차게 채운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열두 아들로 제사장 나라를 세워서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의 모든 시간과 장소 즉, 모든 열방에 미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부터 그로 인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는 소명을 주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방안을 계시해주었습니다. 그런 뜻을 예수님이 계승하여 열두 사도를 세우고 이 세상의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했습니다.

 

일부다처제는 여성을 물건과 노동력과 성적도구로만 취급했던 인간의 탐욕과 죄악의 산물이었습니다. 고대에 전쟁이 잦아서 남자보다 여자들이 비율이 높아져 어쩔 수 없이 시행한 측면도 있지만 전쟁이 잦은 것도 죄로 타락한 결과입니다. 무엇보다 그 제도는 인간 사회의 존속과 번창을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악하고 불완전한 관습을 그대로 두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제도자체를 용인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보다시피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제이며 사악했던 라멕이 일부다처제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드라마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간 야곱과 라반은 일부다처제를 당시 관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온전하신 의를 알기 전에는 진정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 나쁜 제도 하나 뜯어 고친다고 인간의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죄악들이 여전히 남아서 번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근본적 본성이 바로서지 않고는 인간의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으며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 전체를 거룩하게 하려는 것만큼 인간에 대한 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를 통해 당신의 언약가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 구원으로 이어질 약속의 씨를 보존하는 일 자체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이 땅에 오셔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필연적인 이유와 절실한 필요성을 계시하려고 구약역사를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의 두 사기꾼 야곱과 라반을 경우처럼 인간이 얼마나 본성적으로 치사하고 완악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드러내시고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해결책이 없음을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반복 강조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여호와는 구약시대 내내 당신의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성취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인류를 십자가 구원으로만 이끌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이끌 것이므로 그분의 역사가 인간의 눈에는 이해가 안 되고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어보여도 옳고 또 옳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첫째 뜻은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설명한 후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선언한 까닭입니다.

 

신자가 본받을 바는?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 판단 결정 시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교회의 종교 활동을 최우선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 사람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시공간 안에서의 현실적 형통 그것도 결과만 선하면 되는 것을 목표로 삽니다. 필연적으로 돈만 주인으로 모시게 되고 그것이 발휘하는 힘에 따라서만 움직이다가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그와 정반대로 정말로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평생을 거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명 기술 문화 도덕 종교 등 인간이 자기들 외부에 조성한 모든 영역은 최고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감정 정서 정신 도덕성 영성은 최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오직 당장 눈앞에 현상과 사건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려고, 정확히 말해 자유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탐욕을 최고로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등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야곱과 라반처럼 치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그 장소 그 시대에 통용하는 악한 관습을 그대로 둔채 당신의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당시에 여호와를 알고 도덕적으로도 가장 의로운 사람 축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계속해서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자들을 들어 쓰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을 솔직히 뜯어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개별 사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바로잡아선 인간 사회의 문제는 영원토록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외에 인류에겐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발 모두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그분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 땅을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바꾸어서 인간이 살아갈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땅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퇴색 될수록 세상은 흑암과 절망과 죽음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번 코로나 사태에 보듯이 사람들은 흑암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간에 무정한 것을 넘어서 분노 저주하며 모두가 절망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활성화된 미국과 한국에서마저 양극단으로 완전히 나뉘어서 상대를 이해, 포용, 용서할 여지는 완전히 없어지고 아예 원수처럼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은 그래서 오직 하나입니다. 사기꾼 야곱을 마누라 넷을 두고 열두 아들을 주신 뜻이 그들의 후손들로 십자가로 이끌기 위해서였듯이 모든 인간을 사나 죽으나 예수를 위해서 살고 예수에 의해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먼저 들어온 여러분들이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는 일에 목숨을 걸고 앞장서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무조건 옳습니다. 그 옳음은 당신의 독생자를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붙들 때만 자신과 자기 주변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올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지금 간단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스스로도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옳고 선함을 믿습니까? 그런데도 과연 지금처럼 현실에 안주하려고 형식적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도, 정확히 말해서 교회생활에만 만족하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7/12/2020)


master

2020.07.16 05:41:15
*.115.239.75

상기 설교 중에 잘못된 내용이 - 라반에게 아들은 없고 딸만 둘 있다고 말함 - 있어서 아래와 같이 고칩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인 원인을 강조하려다 미처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모든 설교나 글을 아주 세심하게 작성해야 하는데도 제가 나이가 들어서 가끔 이런 실수를 하네요. 방문자님들께서 혹시라도 비슷한 오류를 발견하면 즉시 댓글로 지적해주십시오. ^0^

 

"그런 그에게 시집 안 간 과년한 딸이 둘이 있었습니다. 고대에 자식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그만큼 많은 복을 받았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원시적인 농경사회에선 소중한 노동력이 되니까 현실적으로 생활이 윤택해지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자꾸 노쇠해 가는데 라반에게  그 당시에는 아들이 없었거나 있어도 아직은 많이 어렸던 것 같습니다.(창31;1) 그러니까 라헬이 양을 치고 있었으며 그럼 분명히 나이도 꽤 되었을 텐데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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