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 복음이 먼저 전해졌다면 한국이 더 좋아졌을까?

 

[질문]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행16:6)

 

이 말씀대로라면 돌궐 동쪽 지역(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복음이 전해진 뒤 돌궐과 교류하던 우리나라까지 복음이 도달할 수 있었지만 무산되었다는 건데, 저는 이 구절을 듣고 몇 달 동안 괴로움과 안타까움에 절망이 솟구쳤습니다. 그렇게 유럽에 복음이 전해져 유럽 열강들은 얼씨구나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만나 '거듭' 난 사람의 비율이 높아져 착한 사람들로 가득 차 초강대국 미국보다도 높은 사회 안정성을 기록하게 되었고 그동안 우리나라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거듭'나지 못하여 원간섭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일제강점기 군부독재를 거치며 상명하복과 서열문화를 강조하고 강요하고 부추기는 일제잔재와 군정잔재로 인해 학교폭력과 군대폭력이 판치는 인외마경으로 변해버렸습니다. (2022년에는 군대도 많이 민주화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고 아직까지 위정자들의 횡포는 남아 있습니다.)

 

[답변]

 

많은 신자가 상기 구절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조국의 실정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 원망을 품게 되는 사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을 잘못 해석한 위에 신학적인 오류까지 포함된 질문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아시아가 바로 터키다. 

 

상기 구절이 말하는 아시아는 인도 중국 한국 등이 있는 아시아 대륙이 아니고 오늘날의 터키를 말합니다. 현재 터키 영토인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반도(半島)를 성서 시대에 아나톨리아(Anatolia) 혹은 소아시아(Minor Asia)로 불렀는데 성경에선 아시아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 사건 이전에 갈릴리 북쪽 시리아 지역에 벌써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일차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 터키 내륙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에 들러서 이미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3, 14장)

 

무엇보다 문맥상의 의미부터 잘 살펴야 합니다. 바울 일행은 일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공의회에도 참석하고 안디옥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이차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행15장) 그 여행의 목적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행15:36)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리아 길리기아 등의 지역에서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게”(행16:5) 된 것입니다. 이미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교회들에서 복음이 더 견고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씀을 전하려고 가고 싶었던 아시아(지금의 터키)도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바울을 미전도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차 전도 여행 때에 방문하지 않았던 마게도니아 땅으로 가도록 지시한 것입니다.(행16:6) 하나님이 아시아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이미 복음이 전해졌기에 복음의 불모지인 마게도니아(빌립보, 아덴 등이 있는 지금의 그리스)로 이끈 것입니다. (정말 입이 아프도록 강조했듯이 성경은 절대로 한 구절을 떼어내어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반드시 앞뒤 문맥상의 의미를 찾아서 당시 상황에 비춰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이 편지를 보낸 일곱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모두가 바로 아시아(행16:6절이 말하는)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사실상 바울이 가장 선교에 힘을 쏟아부은 곳이, 바꿔말해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쏟은 곳이 터키였습니다. 당시에도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지역이라서 양쪽으로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아를 절대로 괄시 내지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이스라엘부터 동양에 속합니다. 서양을 대변하는 그리스의 헬레니즘에 대응하는 유대의 히브리즘이 발상한 곳입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에는 한국과 유사한 풍습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에 경배하러 방문한 박사들도 페르샤(이란)의 점성술사였습니다. 그들은 주전 600년 경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곳에 뿌린 여호와 창조주 신앙을 이어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의 아구스도 황제 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지정학적인 뜻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 통치하며 헬라 문화를 심어 놓았던, 특별히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했던 모든 지역을 로마가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도로를 건설한 위에(“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 속담이 생긴 이유) 당시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 연안을 아구스도가 다 정벌하여서 전쟁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 같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무 장애 없이 헬라어로 전 지역에 복음을 손쉽게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이스라엘이 망하여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창조주 신앙을 전했기에 곳곳에 경건한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히 일부만 살펴봤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가 단시일에 로마제국 전역에 전파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여건을 미리 다 마련해 놓으시고서 예수님을 유대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지금의 터키를 포함해, 아니 그곳을 중심으로 당시 헬라어 통용지역에는 빠짐없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의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으나 결국 로마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했으나 말 다섯에 묶여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바울 당대에 이미 터키 전 지역은 물론 인도까지 사도들이 선교했기에, 스페인에 가지 못하고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머무른 유럽에 비해 복음이 일차로 전해진 지역은 아시아가 더 넓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일찍 전파되었다면

 

한국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시점은 비교적 늦었습니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기원후 730년 경에 저작했습니다. 그는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보통 중동으로 분류되는 페르시아(이란)까지 여행하였으나 터키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투르크족과 한민족의 공식 접촉 기록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역사에서 처음 확인되는데 572년 돌궐의 왕이 사망했을 때 고구려가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 터키가 군대를 파병한 이후로 피를 나눈 형제 나라라는 호칭이 붙었을 뿐입니다. 요컨대 터키와 한국이 제대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입니다. 

 

어쨌든 질문하신 의도대로 한국에 터키를 통해서 아주 일찍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도마의 예에 비추어 보면 개연성 있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도마는 인도 선교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마가 방문한 인도는 기원전 1500년 경에 생성된 베다 사상에 입각한 힌두교와 브라만교가 이미 득세해 있었고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싯다르타 고타마가 창시한 불교까지 융성해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했으나 플라톤 철학에 입각한 무신론, 범신론, 이신론을 믿는 터라 배척당하고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던 것입니다.(행17:16-34) 그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2,23)라고 증언한 까닭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나 인도 같은 이방지역에선 아무 공로 자격 없이 로마의 한 사형수만 믿고 따르면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가, 지금도 그러하듯이, 먹혀들 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안을 소란케 한다고 잡혀서 큰 곤욕을 당했듯이(행19:23-41) 도마도 당시 인도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지리적 사회적 여건상으로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도마처럼 사도나 그 제자들이 한국에까지 복음을 전했다면 틀림없이 동일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는 한국은 삼국시대로 불교가 융성하다 못해 국교로 채택되었고, 또 14세기부터 시작된 이조 시대에는 유교가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둘 다 기독교를 수용할 수 없는 체계였고 누가 왔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1832년 한국에 최초로 온 귀츨라프 선교사는 당시 서해안을 탐사하며 한문 성경을 조선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후 1866년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가 선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서해안에 도착하여 평양으로 향했지만 대동강에서 조선인 병사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복음이 더 일찍 들어왔어도 모든 정황상 한국인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므로 상기 구절을 한국 사회의 발전 역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전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터키가 선교중심지가 된 이유

 

한국 기독교사에서 주목할 사항은 최초로 전해진 성경이 중국어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기독교가 먼저 전해진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현지어로 번역되어서 전해져야 하는데 한국은 한자를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기에 한문 성경의 해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헬라어가 통용되니까 이방지역에 복음이 쉽게 전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근대까지 한국의 유일한 교류 대상국이 중국이었고 가뜩이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서구문물의 유입은 더 막혔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일제 강점으로 인해서 외부로 문호가 열리며 기독교도 서서히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또 그래서 영어를 배운 선각자들이 한자와 영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비로소 복음이 온전하게 한국인에게 소개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제에 지배 수탈당하는 고통스러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십자가 복음이 한국인에게 절실하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터키에 집중적으로 교회를 세운 이유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이 당시로선 동서양의 접점 지역일 뿐 아니라 육지로 이어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 대륙은 대양으로 떨어져 있어서 당시 기술로는 도무지 항해가 불가능했고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에야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도보나 말을 타고 여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은 선교사들로 세 대륙의 한복판에서부터 출발하도록 섭리한 것입니다. 실제로 터키는 14세기에 이슬람이 정복하기 전까지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로마 핍박을 피해 갑바도기아의 암벽 동굴에 숨어서 몇 대를 버티며 믿음을 지킨 곳도 터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하신 원시 복음(창3:15)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구약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복음이 가장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한 후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후로도 인간사회의 문명 발달 단계에 맞추어서 복음이 최대한 많은 지역에 전해지도록 세계 역사를 주관하셨습니다. 한국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의 참극을 겪고, 전쟁 후에 국민이 기아에 빠져 있을 때 즉, 현실에서 소망을 잃고 절대자 하나님이 절실할 때에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최근에는 조금 주춤해졌지만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기독교 교세가 가장 번창한 나라가 되었으며 해외 선교사도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시아보다 먼저 복음이 전해진 유럽은 기독교가 완전히 퇴색했고 교회 건물들이 식당, 술집, 심지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한국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했으며 그에 따른 주님의 권능과 은혜도 풍성히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축복하지 않는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 기독교가 끼친 영향을 알아보기 전에 신학적 원리를 먼저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복음과 한 나라 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적 부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잘 믿는 나라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그런 가르침에 비근한 경우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기로 언약을 맺었지만(출19장)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숭배의 죄로 타락하자 다른 나라들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등) 그것도 이스라엘이 따르고 싶었던 바로 그 우상숭배 국가에게 멸망 당하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한 소수의 남은 백성을 통해서 여호와 신앙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계속 죄로 타락해져 가도 당신의 신실한 종들과는 당신의 언약을 갱신하며 원시 복음이 실현되도록 범사를 거룩하게 통치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려는 당신의 계획이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완성되도록 당신께서 전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은 오직 죄에서 구원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함으로써 신자들로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뤄지며 당신의 축복도 신자 개인에게 우선적으로 임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함께 힘을 합쳐 이 땅에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바로 그런 소명으로 부름받았으나 실패했기에 신약 시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게 이스라엘의 그 역할이 승계되어진 것입니다.(마16:16-20, 28:16-20) 

 

그리고 예수 잘 믿는 나라라는 표현 자체부터 잘못입니다. 국민 중에 몇 퍼센트가 믿어야만 잘 믿는다고 정의할 것이며 또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까? 설령 그 수치가 달성되었다 해도 개인적으로 따져서 각자의 믿음의 진정성을 어떻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합당한 수준이 되었다 쳐도 하나님의 복은 신자 개인에게 먼저 임합니다. 

 

요컨대 서구 제국들이 정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일찍 채택하고 경제적으로 번성한 것이 복음과는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범신론 이신론 등을 믿은 그리스에서 발현해서 로마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실제로 로마법이 서양의 법체계의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기술과 상업을 중시하는 길드 조직이 있는 나라들이 먼저 발전했습니다. 군대를 가진 성주가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대대로 발전시킴으로써 신용과 정직이 모토가 되었는데 그런 나라들은 자연히 경제적 풍요를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문화사적으로 봉건제도가 경제 발전의 모태라고 분석합니다.

 

결정적으로는 알다시피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으로 서구 문화와 문명이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그 일에 기독교인들도 일부 공헌했지만 둘 다 그 기본적 사상으로는 반성경적인 인본주의가 근간을 이룹니다. 복음의 번창이 나라의 융성과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일본의 예를 보면 이런 원리는 더 명확히 증명됩니다. 일본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봉건제도를 유지했는데 아시다시피 집안 대대로 신용과 기술을 발전시켜가며 경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천황제를 아직도 견지하지만 정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인데 메이지유신을 통해 가장 먼저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천국으로 가장 반기독교적인데도 서방 선진국 회담인 G7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참여하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안정은 복음이 아니라 인본주의가 발달시킨 것입니다. 그런 점을 두고 무조건 사탄의 짓이라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인간 고유의 고급스러운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발전된 것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반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를 반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죄에 찌든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만 이뤄졌고 또 그래서 발전된 결과 중의 일부는 그분의 뜻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병폐는 교회의 잘못이다. 

 

둘째는 같은 맥락으로 각 나라에서 생기는 여러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나 고난들도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오직 자기만 최고로 높이려는 완악한 본성을 타고 납니다. 당연한 결과로 인간사회는 무한경쟁에 의한 약육강식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개인별 집단별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 상충 고난 재앙 등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상적인 일들은 전부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셨으나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배후에서 인류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이끌어가는 데는 단 한치의 차질도 없습니다. 인간 세상이 아무리 죄악으로 타락해가도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에 의해 세워지고 확장되는 그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도 세상 끝날까지 견고히 서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도 아무리 헤롯 같은 사탄의 종의 방해가 있어도 베들레헴에 나게 하시고 유대 지도자들의 온갖 모함에도 결국 십자가 복음을 완성시킨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도 인간을 제멋대로 죄에 찌들어 살게 두시고도 결국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 땅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며 신자로 영광스런 부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로 드신 한국 사회의 이런저런 병폐도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며 전적으로 죄에 찌든 인간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거기다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은 복음이 충만하게 들어온 이후에 생긴 일입니다. 바울이 소아시아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건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병폐 사이에 연결 고리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런 블행한 혹은 사악한 사건 사고의 당사자들 중에는 신자들도 분명히 많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자기 맡은 바 책임을 순전하고도 정직하게 완수하지 못해 그런 불행의 빌미를 제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이끄는 근본 원리는 십자가 복음으로 죄인을 개인별로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그 구원 받은 개인들이 함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그분의 사랑을 주변에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 개개인이 세상과 죄악 앞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이 긍정적으로 실현된 배경에는 기독교 신자들의 개인적인 수고와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윌버포스 개인이 모든 방해 핍박 멸시를 견뎌내며 평생을 두고 헌신한 끝에 노예 해방을 달성했듯이 말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일 독립선언서에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참여했으며, 남한만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한국전쟁에서 유엔 16개국이 참전해서 대한민국을 위험에서 건져 존속하게 된 배경에는 이름 없는 신자들의 피땀 어린 수고와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좌우 논쟁을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기독교의 원수인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한국과 세계 곳곳에 남겨 둔 자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게 섭리 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 편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사회, 경제는 인간에게 맡겨두시고 그 모든 것을 아울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높아지도록 역사하실 뿐입니다. 

 

지금의 한국은,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치부해도 됩니다만,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법률과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산 지 삼십 년이 되었고 아침마다 일본 TV 뉴스를 보는 입장에서 감히 미국과 일본보다 더 선진화되었다고, 최소한 거의 대등한 수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한국의 여러 불합리, 모순, 재앙들은 나라나 제도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그것들을 운용해야 하는 인간들의 잘못입니다. 또 그렇게 된 데는 한국 교회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신자들부터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이름 없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터키가 이슬람의 도성이 된 연유도 결국 기독교인들의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일곱교회에 요한 사도를 통해 일찍이 경고하셨는데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시아에 복음이 먼저 들어와서 일찍부터 한국이 서구 선진국처럼 되었더라면 어떻게 됩니까? 질문하신 의도대로 따르자면 유럽과 미국이 거꾸로 지금 불만을 품은 한국과 같은 어려운 형편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 원수마저 사랑해야 할 신자가 취할 신앙적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들을 통치하심에 단 한 치의 하자, 불합리, 모순, 잘못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은 이로 알게 해주고 싶은 긍휼한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에 교만과 탐욕에 젖은 인간들의 잘못으로 이 땅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분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청지기 소명을 맡은 신자와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돈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세상에서 욕을 먹을 정도가 되어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분석해보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에 가장 적합한 때와 방식으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해서 지금처럼 선교 강국으로 세워졌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세계에서 최고로 잘 사는 나라와 시민 의식이 가장 높은 국민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북한 동포를 아직도 사탄이 조종하는 공산 독재 치하에서 최소한의 인권과 자유와 생존마저 전혀 보장되지 않도록 70여 년 동안(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과 같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꿔 말해 북한 실정을 예로 들며 상기 질문처럼 하나님께 불만을 터트려야 그나마 조금 명분이 서지 않겠습니까?

 

(12/13/2022)

 

master

2022.12.13 10:57:08
*.115.238.222

아주 중요한 주제이므로 조금 길더라도 꼭 끝까지 천천히 다 읽어보시길 권면드립니다. 

해리슨

2022.12.14 00:33:40
*.70.15.248

해당 글을 통해 열강들의 발전은 반성경적인 인본주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처음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거듭난 신자가 되어 직장, 가정, 공동체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정성어린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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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예정의 공평성에 관한 몇몇 의문 [4] master 2023-03-10 685
718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뜻은? [1] master 2023-03-03 380
717 구원받기에 좋은 행동을 알고 싶습니다. master 2023-02-17 325
716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반발만 생깁니다. master 2023-02-14 397
715 신자가 핍박에 져서 순교하지 못하면? [1] master 2023-02-03 382
714 신자가 개인적 현실적 기도를 해도 되는지요? master 2023-01-25 1588
713 동료와 화평하기 위해 술을 함께 마셔야 하나요? [3] master 2023-01-17 441
712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성경 구절들? master 2022-12-17 1556
» 아시아에 복음이 먼저 전해졌다면 한국이 더 좋아졌을까? [2] master 2022-12-13 373
710 성적인 농담도 비성경적인 걸까요? master 2022-12-13 472
709 집 근처 교회에 다녀야 할 성경적 근거가 궁금합니다. master 2022-11-28 433
708 부모님이 반대하면 결혼하지 말아야 하나요? master 2022-11-23 753
707 앎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1] master 2022-11-18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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