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질문]

 

이 땅에서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고 영접하지 아니한 자들의 말로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입니다. 시간적 관점에서 그 형벌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죄인들을 대신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그 형벌을 한시적(3일)으로만 짊어지셨습니다. 물론 그 죽음과 부활이 신자에게 얼마나 큰 감사와 감격과 위로로 다가오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정확히 따지면 예수님도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그 형벌에 영원히 있으실 수 없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시기에 되살아나셨다”라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이성에만 박혀있는 것인지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4)는 말씀대로 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모든 형벌을 받으셨기에 다시 살리신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옥의 형벌을 받는 인간은 그 모든 형벌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만약 다 받을 수 있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인가요? 만약 다 받을 수 없다면, 인간과 달리 예수께서 한시적으로 모든 형벌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그의 신적 권능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요?

 

[답변]

 

예수님 초림의 의미

 

신자라면 말씀하신 대로 너무 불경하다고 여겨져 쉽게 떠올리지도 못하는 특이한 질문입니다. 인간을 대속할 제물이라면 주님이 받은 형벌의 내용도 인간이 받을 형벌과 똑같아야 한다는 원리는 옳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형벌을 당하신 시간의 수치적인 형평성으로 따질 차원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이 그 형별을 받은 효과가 미칠 ‘대상’과 그렇게 하신 ‘목적’을 따져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근본적인 의미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예수님은 죄인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해서 죄인을 구원해 주러 초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죄인(인간)을 살리려고 일차적으로 그 죄의 사슬만 끊어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죄인 중에 하나님이 택한 자들로 회개케 하여서 새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껏 지은 죄를, 그 책임과 그로 인해 오염된 폐해를 그냥 두고, 무조건 용서해 준다고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자식이 어떤 큰 잘못을 범해도 부모는 참사랑으로 용서는 해줍니다. 그러나 그 전에, 화장실 청소 일주일 혹은 회초리 열 대 같이 그 죄에 따르는 책임과 오염시킨 정도의 경중(輕重)을 평가해서 정한 죗값에 상응한 벌부터 내립니다. 그 형별의 효력이 미치는 ‘대상’은 엄밀히 따져서 죄책입니다. 죄인인 자식더러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훈계가 그 형벌을 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초림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신 형벌의 효력이 미칠 대상은 죄책으로 그 경중을 따지면 죽어 마땅했습니다. 인간 죄인이 지은 죄에 대한 죗값만 대신 치러 준 셈입니다. 죄인이 궁극적으로 받을 운명까지 십자가에서 대신해서 다 받았다고 간주하시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끝까지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거부하며 완악하게 버티는 ‘죄인’의 영은 죽을 때 이미 지옥으로 가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 육신마저 부활시켜서 꺼지지 않는 불 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초림이 죄인에 대한 심판이 목적이었다면 질문하신 논리가, 순전히 논리로서만, 성립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죗값만 대신 갚아줌으로써 죽어 마땅한 모든 인간(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제사의 의미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9:12, 10:19,20)

 

십자가의 두 가지 의미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는 두 가지의 절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구분하자면 ‘자비’(慈悲 mercy)와 ‘은혜’(恩惠 grace)가 그것인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가 정확히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비는 인간이 반드시 받아야만 할 형벌을 아무 조건 자격 공로 없이 무조건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지은 죄에 마땅한 형벌인 사형만 면제해 주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죗값을 갚으셨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죗값만 갚는 것으로 그치면 구원의 반만 이뤄진 셈입니다. 

 

비유컨대 사형수에게 왕이 특별 사면을 내려서 처형만 면하게 해준 셈입니다. 여전히 감옥 안에서 무기 징역을 살아야 합니다. 사형수로선 무기 징역만 되어도 왕에게 감사는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감옥 안에 묶여 있어야 하니까 어떤 의로운 변화도 생길 수 없습니다. 온전한 구원이 되려면 그를 출소시켜 새사람으로 갱생시켜서 감옥 밖의 죄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 완성되려면 은혜의 단계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은혜란 죄에 찌든 인간이 도무지 받을 수 없는 축복을 그럴만한 아무런 조건 자격 공로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무상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의를 덧입혀서 그 죄인에게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있음에도 의인이라고 칭하여 주십니다. 단순히 사형 면제가 아니라 감옥에서 출소하라는 선고와 동시에 그대로 집행한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면서 천국 부활 영생이라는 엄청난 선물도 미리 보장해 주십니다. (자비와 은혜, 둘을 합쳐 단순히 십자가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4,5)

 

형벌만 면제해 준 자비 위에 새 생명으로 살아갈 은혜를 주시기 위해선 예수님은 절대로 무덤에 영원토록 묶여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부활하셔서 그 첫 열매로서 죄인들에게 천국 영생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미 구원으로 택한 제자와 신자들에겐 당신을 믿음으로써(아무 조건 자격 공로 없이) 영생을 확보했음을 확신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삼 일만 죽으신 이유

 

예수님이 삼 일 후에 부활하신 까닭은 그 기간만으로 온전한 죽음이 되었음을 입증되기에 굳이 더 오래 죽어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신학적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서 보듯이 삼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또 가로와 세로와 높이라는 삼차원에서 온 땅을 아우르는 완전한 수입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 의견 하나 더 보태자면,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3일까지는 시신 곁에 머물고 4일째 영계로 옮겨진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나흘 후에 부활하셨다면 자칫 당시 사람들이 부활 주님을 실체가 없는 영(ghost)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육신을 지닌 부활임을, 즉 의심 많은 도마더러 손바닥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직접 촉감으로 확인하게 해서 스승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깨닫게 해주려는 배려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루나 이틀 만에 부활하시면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시공간을 만드시고 그것에 초월해 계신 예수님에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서 그 기간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되었던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전히 인간의 시간 인식에 맞추어 줌으로써 당신의 자녀들과 온전한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죄(죄책과 오염)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하신다는 뜻이며, 죄인은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죽음을 이겨내어 기어이 구원해 주길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당신께선 아무 죄도 없으시나 법적으로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인간이 반드시 받아야 할 죗값인 죽음을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인간으로 인간의 죗값을 갚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 의로운 자라도 그 또한 하나님께 죽을 죄인이라 그의 죽음은 단지 자기 죗값만 갚는 꼴이 됩니다. 그리고 모두 다 죽어야 하는데 그 사람 혼자만 죽여놓고 다른 이를 용서한다면, 막상 그 죽은 자만 억울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직접 죽으셔야만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는 효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 

 

예수님의 부활이 성부 하나님이 되살렸고 또 주님의 신적 권능에 따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은 원죄로 타락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태초부터 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3,12)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당신을 거역하여 타락한 직후에도 짐승으로 피 제사를 지낸 후에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유혹해 죄에 빠트린 사탄에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장차 저주의 형벌을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으면 지옥의 주인인 사탄에게 굴복하는 셈입니다. 사탄은 당시 유대인들을 격동시켜서 메시아를 죽이면 자기 머리는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마저도 다 아시고 그 모략대로 이뤄지게 했으나 마지막에 주님이 부활하시는 반전으로 사탄의 머리를 결정적으로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택한 자에게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죄인의 심령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트려 주십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던 죄인이었는데 그 후로는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해 주심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은 소망과 그것을 실천할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로 죄인을 사탄의 감옥에서 완전히 출소시켜서 주님 은혜 안에 있는 의인으로서 갱생의 삶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 중에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러자 주님은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한 후에 비로소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마16:13-28) 그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에게 변화산에서 당신의 그리스도 되신 영광도 보여주었습니다.(마17장) 

 

그러나 알다시피 모든 제자가 주님이 십자가에 아무 저항 없이 죽으시자 부활은 전혀 믿지 못한 채 이스라엘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을 길이 아예 없어졌다고 여기고 완전히 낙심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당신만의 ‘자비’와 ‘은혜’를 베풀자 비로소 베드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초림의 의미와 목적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고 하늘 보좌로 승천하셨어도 같은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스승이 하신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을, 이스라엘의 현실적 회복이 아닌, 이어받아서 주님처럼 죄인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 헌신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의 구원 사역이 단순히 인간의 죗값만 갚는 것으로 그쳐선 절대 안 됩니다. 십자가 죽음만 있으면 죄의 용서는 되어도 베드로의 예에서 보듯이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는 역사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럼 또 신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주님의 구원 사역을 계승할 수도 없습니다. 창조 당시에 사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저주는 이뤄지지 않고 거꾸로 사탄의 모략이 성공하는 꼴이 됩니다. 

 

무엇보다 온 천하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주님으로선 그 죽음만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죄인의 죗값을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거기다 아무 죄 없으신, 그것도 하나님 본체이신 분이 죄인만이 가게 되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만 받으면 사탄에게 완전히 굴복한 꼴이 됩니다. 수치적 형평성에 따라서 인간의 형벌을 똑같이 대신 갚아야 구원이 완성되지 않느냐는 논의는 사실상 죄에 찌든 인간과 성자 하나님을 동격의 위치에 두기에 아예 논의할 의미와 가치도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배워라.

 

정말로 인정하신 그대로 인간의 이성적인 추론에, 엄밀히 말해 상상의 나래를 편 것에 불과합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신앙적, 성경적으로 의문이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만 이성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며, 당신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지 말고 성경의 진술이 절대적 진리인지 따지고 또 따져보고 믿으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이성적으로 따질 때는 반드시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계획과 목적으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지 그 일관된 뜻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서 종합적으로 분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적 의심을 성경적 확신으로 바꿔야 합니다. 

 

신자 혼자선 그 일이 불가능하므로 선각자들이 이미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교리와 신학을 함께 공부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가 따분하고 어렵다고만 여겨선 안 됩니다. 그 모든 내용은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두었기에, 정통 신학과 교리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잘 알면 성경이 정말로 소름이 끼치도록 절대적 진리임을 더 확신할 수 있고 주님의 살아 역사하는 은총과 권능을 더 깊이 풍성하게 절감 체험할 수 있습니다. 

 

(12/19/2023)


모루두개

2024.10.09 04: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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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도신조의 원본 +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서' 삼천 년을 고난받으신 걸로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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