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

조회 수 12925 추천 수 34 2010.11.24 03:27:05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


[질문]


열왕기나 역대기에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의 각 왕에 대해서 선한 왕과 악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나 요시야 등은 다윗과 같은 선한 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평가하지만, 이들의 마지막은 교만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한 면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므낫세는 유다의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다 온 이후에는 회개를 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한 선한일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므낫세는 이후에 하나님의 진노로 유다의 멸망을 촉진시킨 악한 왕으로만 계속 평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 나름의 생각은 선한 왕이든 악한 왕이든 완벽한 인간은 이후에 인간으로 오실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라고 생각이 들고, 므낫세에 대한 사가들의 (즉 성경의) 평가는 므낫세 인간자체보다는 (회개를 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를 용서해주셨다고 믿습니다), 그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죄악 된 마음과 저지른 죄에 대해서 용서하고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는 의미이지, 우리의 죄나 악한 행위로 인해 생겨난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인지요? 하나님께서 결과까지 용서를 하신다고 해도 이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악한 행위나 죄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들에 대해서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세상적으로 이미 값을 치른 이후에 얻게 되는 용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회개하면 모든 것을 - 죄의 결과까지도 - 용서해 주신다고 일반적으로  믿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드립니다.

므낫세의 회개에도 불구하고(그래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믿는데), 그가 행한 이전의 죄악으로 인해 유다가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보면서 (예, 렘15:4, 물론 므낫세 이전 왕들과 유대민족의 잘못도 있지만), 늘 궁금해 하던 부분이라 질문 드립니다.

[답변]

작금 교회들이 죄에 대해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복음을 그저 쉽고 간단하게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행이 보장되고 그 후는 잘 믿어 형통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자연히 질문자님처럼 죄의 결과에 대해 심각하게 따져보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신자가 회개해도 하나님이 죄의 일차적 직접적 결과는 사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로 파생된 여러 부작용은 신자가 하기에 따라 원상회복을 넘어서 더 좋은 결과로 이끄십니다. 말하자면 엎질러진 물도 다시 담게 해주십니다.

이미 죄의 결과 속에 살고 있다.

최초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권위에 배역하여 선악과 금령을 어겼습니다. 행동으로 과일을 따먹기 이전에 불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불순종으로만 이해하고 그치면 조금 부족합니다. 그럼 논리적으로 따져서 행동으로 다시 순종만 하면 용서를 얻을 자격 내지 수준에 다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마음이 들게 된 원인까지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고 미워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그런 명령쯤이야 어기면 어때?”를 넘어서, 하나님 그분을 자기 마음에서 지워버리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탄의 거짓에 넘어가 하나님을 제치고 자기가 동산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호령하겠다는 심보를 품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와 사탄은 물론 피조세계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3:17b-19a)

하나님은 또 인간이 죄에 찌든 상태로 영생할 것을 방지하려고, 바꿔 말해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생명나무를 옮겼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창세전부터 예비해 놓았기에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알고도 자유의지와 선악과 금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쨌든 생명나무가 옮겨짐으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원죄(the Sin) 하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흉폭하고 잔인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가 되어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거나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기에 도덕적 죄(moral sin 혹은 crime)도 즉,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사람 사이에서 짓는 죄들도 따라왔습니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던 최초의 부부가 하나님을 거부하자 서로 비방했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인간이 로마서 1-2장에서 설명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모든 불의를 행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죄를 짓는 자를 옳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조차 율법대로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함에도 똑 같은 죄를 범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 중에서 모독 받게 했습니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에 빨랐습니다. 그 유일한 이유는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즉, 인류에 대한 구속사역이 완성된 뒤에도 불신 세상의 인간 상태는 전혀 변함없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원죄는 물론 여러 도덕적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죄의 배경이 된 사탄과 죄의 삯인 사망의 노예로 묶여버렸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사망과 사탄의 묶임에선 풀려났으나 죄로 가득 찬 세상 속에 살아가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생이 죄로 시작해서 (최소한 죄와 접하면서), 죄로만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마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모순, 왜곡, 고난, 재앙 등은 인간이 지었고, 짓고 있고, 앞으로도 지을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첫째 결과 - 형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그 의미를 알려면 위에서 언급한 죄의 결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지은 죄에 따르는 하나님의 형벌(penalty)과 죄가 본인과 그 주위에 야기하는 현실적 영향(effect)이 그것입니다. 이 둘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면 혼동이 옵니다. 또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앞에서 말한 원죄와 도덕적 죄를 각기 구분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 얻습니다. 이는 신분적, 일회적, 과거적 구원입니다. 여전히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주님의 보혈을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칭의; justification)입니다. 죄의 본성에 찌든 상태는 그대로 두고 단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택하여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쉽게 말해 지옥 가는 영원한 형벌에서 면제 받은 것입니다.(free from the penalty of the Sin)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태생적으로 단절되었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예수 믿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은 죄의 두 가지 결과 중에서 첫째인 죄의 형벌, 그것도 타고난 원죄에서 용서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은 후에 짓고 또 장차 지을 모든 죄에서 용서 받기에 복음이라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인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지 그 죄의 개별적 영향에서까지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비록 그 이후 죄를 짓더라도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단번(永單番)의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기(히9:12) 때문입니다.

원죄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중심주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분명히 하나님을 순종하고 싶은데도 잘 안 되는 이유는 그 영혼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기중심주의(죄의 본성)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상태는 그대로 두고 하나님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 신분만 옮겨주었습니다. 신자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죄의 본성으로 인해, 비록 이전에 비해선 죄에 민감해지고 짓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도, 때로는 도덕적 종교적 영적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둘째 단계인 성화(sanctification)는 신자가 책임지고 이루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개별적 죄들을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제거해야 합니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야”(2:12)합니다. 말하자면 원죄의 형벌은 면제되었지만 죄의 본성을 계속해서 죽여 나가야 합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영속적, 현재적, 성품적인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후에도 신자는 죄 지을 때마다 입술로 낱낱이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7-9)  

성경이 신자더러 개별적 죄에 대해 자백하여 용서를 구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러지 않으면 그 에 따른 형벌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4-8)

물론 신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을 때마다 하나님이 그 즉각 일일이 벌(영원한 심판이 아닌 일시적 징계)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독재적, 기계적 하나님이 되고 사람들이 무서워서라도 맹목적으로 믿게 됩니다. 인간 부모도 자녀가 잘못할 때마다 징계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인내의 한계가 차거나, 그냥 두면 더 큰 죄악과 폐해가 닥치거나, 당신의 특별한 뜻이 있으면 비로소 징계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살인한 죄를 나단 선지자에게 지적당하기 전에도 분명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 죄가 백일하에 공개되자 더더욱 부끄럽고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아무런 부정적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데다 나단의 경고를 받기 전까지 회개치 않자 비로소 그 사이에 난 아들을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결과까지 사면해주지는 않으며 필요하다면 징계를 내리는 대표적 예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 믿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죄의 두 가지 결과 중에 원죄의 형벌만 면제 받은 것입니다. 구원 이후의 개별적인 죄에 대한 형벌은, 그 구체적인 시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렸지만, 여전히 유효합니다.

죄의 또 다른 결과 - 영향  

구원 후에도 개별적 죄에 대한 ‘형벌’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죄의 ‘영향’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죄의 영향이라는 표현은 조금 잘못된 것입니다. 죄로 야기되는 결과적 영향이 사실은 그 죄 안에 내포된 본질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가 더럽고 추하니까 당연히 그 결과도 추하고 더럽게 나타나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심사하여 그에 비례하여 부정적 영향을 덧붙여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죄가 갖는 가장 본질적인 영향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이라는 것은 죄를 짓자마자 자동적으로 생기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제일 먼저 분리(分離)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죄 자체가 바로 분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밀어냄으로써, 이미 그 자체가 분리임,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불화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먼저 두려운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는 또 범죄 전에 그분과 교제 동행하면서 누렸던 마음의 기쁨과 평강이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자기 자신(self)과도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써의 참 자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서로 부끄러웠던 것은 사람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자기중심주의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발로(發露)임, 벌어졌습니다. 이웃과의 이런 분리가 바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도덕적 죄의 직접적 원인인 것입니다.

죄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분리(원죄)로 인해, 자신과도 분리가 일어나고(자아의 상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분리되는(개별적 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인간들끼리 경쟁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원죄에서 발단 확장된 모든 죄가 피조 세계의 모든 관계를 왜곡 파괴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분리는 바로 죄 자체이자 죄가 빚는 자동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당사자의 육신과 정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도 부정적인 여파가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죄에 이미 결과 되어져 있던 부정적 영향이 죄가 드러나면서 자동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도박을 하면 가산이 탕진되며, 술과 마약과 성적유희로 지새면 육신이 망가집니다. 당연히 어떤 죄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깁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구태여 벌을 내리지 않아도 죄 자체의 부정적 영향으로 죄를 지은 자는 이미 형벌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은 신자에게도 동일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구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만 회복되었지 죄의 본성은 계속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죄에 따른 자동적이고도 일차적인 결과까지 하나님이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심판은 면해줘도 죄가 불러오는 부정적인 영향은 필연적으로 신자와 그 주위에 드러납니다. 따라서 성화는 신자가 책임지고 이뤄야할 의무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신자도 죄를 지으면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따라옵니다. 불신자도 하나님의 형상이 비록 파괴는 되었어도 양심의 상태로 어렴풋이 남아있기에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듭니다. 죄의 부정적 영향은 구원여부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죄와 연관된 결과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불신자들은 그런 죄책감이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잠시 도덕적 반성만 하고 치웁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주는 필연적인 일차 결과뿐만 아니라 그 영원한 형벌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희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롬1:24) 하십니다. 죄가 내포하는 본질적인 더럽고 추함에 그냥 방치해두는 것으로 이미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1:28)하십니다. 죄의 일차적 결과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짓게까지 하는 셈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쾌락을 추구하면 끝이 없듯이 죄의 특성은 또 다른 더 큰 죄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된 관계를 바로 잡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깨닫지 못했습니다.”(요1:5) 그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요3:19)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그 어두움에 버려두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b)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도덕적으로 더 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할 의사가 전혀 없고 고의로 그분을 거역하기에 이미 그 상태로 심판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자는 그 반대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과 화목되었기에 영원한 심판에선 면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 이후 개별적 죄에 대한 일차적 직접적 결과는 여전히 그대로 드러납니다. 나아가 그런 죄를 오래 동안 회개치 않거나 고칠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짓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런데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그런 징계는 대체로 제 삼의 부정적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을 더 과중하게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일차적 결과는 자동으로 나타나기에 그것만으로는 징계의 뜻이 없습니다. 신자로 그와는 별도로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엄정한 징계임을 깨닫게 하여서 진정한 회개로 이끌려는 뜻입니다. 다윗과 밧세바는  벌 받지 않고 엉뚱한 아들이 죽었지만, 그 아이는 분명 간음의 열매였듯이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에겐 죄에 대한 심판은 없고 징계는 있습니다. 죄의 일차적 영향도 불신자와 똑 같이 겪습니다. 그 위에 때로는 이차적인 징계도 당합니다. 신자의 삶이 현실에선 실제로 더 괴로운 셈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개별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없는 대신에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선 죄의 직접적 영향에 그대로 방치되어집니다. 더러움과 추함을 계속해서 증폭 시키는 죄의 연못 안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오히려 즐기기에 현실에선 더 편하고도 형통하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돈을 밝히면 돈을 더 벌고, 쾌락을 탐하는 자는 쾌락이 주는 열락에 끝없이 빠져듭니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피폐해질 뿐 아니라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불 못의 심판뿐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용서의 축복

신자가 죄의 부정적 영향도 받고 때로 하나님의 징계마저 받는다면 믿음으로 얻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선 영원한 심판이 없습니다. 또 죄를 죄로 알게 된 것만도 대단한 축복입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강력한 것인지조차 몰랐고 오히려 죄를 즐겼지 않습니까?  

그 무엇보다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았습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해도 참 기쁨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가 다시 연결됨으로써 자신과의 분리도 차츰 극복됩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와 갈증이(렘2:13) 예수님 안에서 없어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분의 자녀이자 동역자로서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엄청난 신분과 자격과 특권을 얻었습니다.  

미쁘신 하나님인지라 신자가 개별적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면 이차로 당할 징계마저 당장 취소하십니다. 대신에 더 큰 영적, 때로는 현실적 축복까지 부어주십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철저히 회개했더니(시51편), 솔로몬 같은 가장 지혜로운 아들을 대신 주셨지 않습니까? 설령 회개를 잊고 지나쳐서 징계 받아도 은혜가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타락을 멈출 방도가 없지만, 징계를 잘 받아들이면 오히려 자신의 성숙에 밑거름이 되지 않습니까?

나아가 죄를 회개하는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의 성품은 거룩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서 하늘의 거룩한 보배를 맛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성화)을 이루라고 권한 뒤에 어떻게 덧붙였습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을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3-16)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순전하게 만드시고 그분의 빛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게 하신다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불신자들에게 전하여서 마지막 날에 (본문에선 바울 사도의 자랑이 되지만) 각자가 그리스도의 상급을 받게 됩니다. 신자는 성화를 이룸으로써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마저 주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초대하여 구원 받고 거룩하게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 사도는 신자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한다고 했습니다. 칭의의 구원 뿐 아니라 성화도 주님의 보혈에 의존해야만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주님이 이루시는 일이자 그 자체로 이미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이라는 뜻입니다. 선은 죄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확장 증폭되는 본질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선 그분의 은혜가 날로 새롭고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구원 이후 천국으로 인도할 때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라는 선(善)에만 붙들어 두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설령 신자가 짓는 죄와 그 결과까지도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끊어내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 된 가장 큰 축복이자 복음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핵심 내용입니다.  

11/23/2010

하람맘

2010.11.24 04:06:48
*.163.11.229

하나님을 믿고도 계속해서 죄를 짓고 후회하고 회개하면서도 또 다시 같은 죄를 짓는 내 자신을 느낄때 마다 끝까지 포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성화는 신자가 책임지고 이뤄야할 의무인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오늘 저에게 강하게 다가옵니다.

Caleb Kim

2010.11.24 18:20:25
*.144.252.175

목사님, 장황한 질문에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설명으로 복음의 본질과 하나님의 사랑을 또다시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답변이 열왕기와 역대기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모루두개

2024.03.04 21:19:08
*.230.44.2

로마서 7장 7절이 떠오릅니다. 사랑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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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질병과 사고는 사단이 주는 것인가? [6] 운영자 2010-11-18 2060
21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3] 운영자 2010-11-11 2581
211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함이란? [2] 운영자 2010-11-08 1737
210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것은? [2] 운영자 2010-11-08 1627
209 혼전순결에 관한 추가질문에 관해 [2] 운영자 2010-10-30 2733
208 신자의 혼전 순결에 관하여? [1] 운영자 2010-10-26 4990
207 신자의 기질과 죄의 연관성에 대하여? [3] 운영자 2010-10-24 1416
206 모세더러 신을 벗으라는 의미는? [3] 운영자 2010-10-04 2399
205 천국에서도 정죄함을 받는가? [4] 운영자 2010-09-22 1448
20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4] 운영자 2010-09-20 15152
203 성경말씀이 어떻게 살아 역사하는가? [3] 운영자 2010-09-19 1357
202 사사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린 의미는? [5] 운영자 2010-09-15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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