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원수사랑

조회 수 635 추천 수 5 2014.12.01 19:53:06
전쟁과 원수사랑


[질문]


정의를 지키고, 민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면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전쟁드라마를 보면서 회의감이 듭니다.(2차 대전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퓨리라고 거의 다 아시겠지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적군인 독일군을 죽이고, 사기와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서 때로는 독일군을 적대시해야 할 대상으로 자신들을 세뇌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전우애'라는 덕목이 과연 조화될 수 있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전우애를 가진다는 것은, 전우가 아닌 적국의 병사들(혹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해서요. 즉, '한정된 사랑'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예수님의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라는 덕목과 대치되지 않나요? 단순히 민족과 이웃을 넘어서, 원수나 적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인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러한 사랑의 덕목을 포기해도 되는 것인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면서까지 남을 사랑하셨는데 말이죠.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상기 질문은 형제님의 다른 질문에도 거의 매번 그러하듯이 질문 자체에 몇 가지 불합리성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순만 제거하면 해답은 자동적으로 도출될 것입니다.

극단적 상황의 하나님의 뜻

우선 너무 극단적인 경우를 자주 가정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란 항상 극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을 많이 가정합니다. 현실에서 거의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들 말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성경적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며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간혹 신자가 극단적 상황을 겪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피치 못해 비윤리적 반종교적 조치를 취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이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며칠을 굶게 되자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그것도 안식일에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21:1-6) 율법에 명시된 규정을 대놓고 위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먼저 주신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창1:28) 생명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무리 원수라도 그들을 죽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눠 먹으며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거룩한 떡을 자기 시종들과 나눠 먹은 까닭입니다.

성경은 또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라고도 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인죄는 사형에 처하며 자살은 신자에게 절대적 금기사항입니다. 반면에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의 경우는 도피성에서 죄 값을 치르면 살려줍니다. 이 또한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집에 강도가 총을 쏘며 들어오는데 맞상대 하여 총을 쏘았다고 세상법정은 물론 하나님도 전혀 정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자기가 살려고 상대를 죽이는 것은 이웃과 원수 사랑의 윤리보다 더 우선적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생명보존의 명령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하느냐 차원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차원의 계명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함께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번성하라는 명령 자체에 이미 자기 가족만 그러라는 의미는 아예 없습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원수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죄가 들어온 이후입니다.  

전우애와 원수사랑

둘째로 “전우애”와 “적국 병사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무관한 문제인데도 이 둘을 동일시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범죄현장에서 갱들이 총을 쏘며 저항하다 몇 명의 경관을 죽였기에 동료 경찰이 그 갱들을 사살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경찰이 그 갱들을 미워하고 저주했기 때문에, 또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인 것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정당방위이며 공적으로는 경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업무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윤리적, 성경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도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구태여 판단하자면 오히려 윤리적이고 성경적입니다. 전우애도 이와 동일한 차원입니다.

물론 전쟁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들의 탐욕과 시기로 다툼이 일어난 것으로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사회를 죄가 완전히 없어진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로 당장에 변모시키지 않습니다. 또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설치는 것도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묵인해 두고 있습니다. 요컨대 나라끼리 전쟁 치는 것도 하나님이 묵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신자도 그런 상황 속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영원한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지만 그 한시적인 실재(實在)는 하나님이 천국으로 불러 갈 때까지 세상 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묵인하고 있다는 것은 신자도 어쩔 수 없이 전우애를 가지고 적국과 맞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전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나면 신자도 참여해 적군을 죽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수동적으로 묵인하는 일이자 차선입니다.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출애굽을 비롯해 하나님이 직접 전쟁을 치른 적도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적군은 물론 심지어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 당신께서 죽인 일이 종종 나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주님도 비록 비유에서 예화로 인용한 것이긴 해도 전쟁 자체를 정죄 내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눅14:31,32) 인간 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르더라도 가능한 인명 피해를 줄이도록 힘쓰라고 합니다.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화친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마지막으로 기독교교리에 어긋나거나 성경말씀을 오해한 내용을 전제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제가 답변할 책임이 있습니다만 다른 신자들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부분까지 교리나 말씀을 문자적으로 엄격히 적용시키려 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매사를 선과 악 둘로만 나누려는 율법주의 경향이 농후하다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주님이 그렇게 가르친 전후 사정을 잘 살펴야 합니다. 산상수훈 중에서, 특별히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그런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세 오경의 율법을 잘못 해석 적용하거나 그들이 고안한 세부적 규정의 모순을 지적하려는 뜻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7,18) 율법은 심지어 원수를 갚지 말라고 문자적으로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레위기 율법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형제는 물론 이방인이 아닌 유대 동족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알고 따르는 형제로서 미워하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세부적인 규정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위반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유대 사회에서 추방하고는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식사교제도 금했습니다. 불구자, 불치병, 창녀, 세리,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으므로 차별하고 이웃으로 대하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과 교제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유대 지도층들이 극도로 미워한 까닭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당시의 행태가 아주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레위기 규정의 마지막 구절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입장에서 그 규정을 다시 해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비천해 보이는 자들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동일한 당신의 백성들이니 절대로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원수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전쟁 같은 극한상황이 아닌 통상적 경우에 개인 간의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들은 자기들과 같은 경건한 부류의 사람들만 자기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워했던 사마리아인은 단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섬기는 본을 보이며 이웃의 범위를 모든 어려운 사람으로 넓혔습니다. 주님 말씀의 초점은 어떤 사람도 미워하지 말며 특별히 형제들을 원수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과 원수사랑

물론 주님은 십자가에 당신이 죽음으로써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지는 죽음이었습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원수진 개별적인 이웃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몬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주님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속으로 미워하고 저주하며 원수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주님께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알지 못해서 죄를 범하는 것은 어린이가 잘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고 불쌍하게 여겨서 가르쳐야 합니다. 알고도 죄를 범할 때만 야단이나 미움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어떤 흉악한 살인 죄인이라도, 미워한 적이 단 한 시도 없습니다. 그들이 사탄에 미혹되어 있기에 당신의 긍휼과 구원을 베풀 대상으로만 봤습니다. 주님이 미워한 원수는 죄악과 사탄과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을 노예로 묶고 있는 원수를 쳐부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당신을 핍박하는 유대와 로마당국을 위해선 당신의 가르침대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십자가와 가장 유사한 경우 즉, 인간이 원수를 가장 사랑했던 예로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에 무저항하며 찬송하며 맹수의 밥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오직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원수에 해당하는 로마를 사랑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틀림없이 자기들을 핍박하는 로마인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나, 초대신자들의 순교를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죽음도 감수했다는 측면에선 원수를 사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명확한 대의와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인류의 구원이, 초대 신자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이 자기 개인의 원수를 위해 죽음을 감수하며 희생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그 원수에게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알게 해주겠다든지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도 그를 위해 나의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변화가 그 죽음을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목표이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상대를 살리지 않는 나만의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너무나 헛된 짓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기에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침범하는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전쟁 같이 생면부지의 불특정 다수끼리 단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일에는 이런 하나님의 뜻이 전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단지 하나님이 묵인하는 인간끼리의 잘못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전쟁에서마저 아무 저항 없이 총 한 번 쏘지 않고 상대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은 원수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생명을 휴지처럼 여겼기에 하나님께 죄가 됩니다. 적군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참 생명을 얻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헛되고 헛된 일일 뿐이며 전쟁의 와중에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하나님의 윤리를 적용시킬 필요가 없다고 서두에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12/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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