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2:7-14)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최고의 비결

구약성경강해 (44) / 민수기강해 (34)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들이니이다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전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민22:7-14)

 

접신할 시간이 필요한 발람

 

많은 신자들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가 도리어 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난 발람의 사건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치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짐승에게까지 인간의 말을 하게 하여 자기 주인인 발람을 혼을 내고 우상숭배자들의 흉계를 분쇄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려듭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 어떤 존재에게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당신의 절대적인 뜻대로 완벽하게 통치하고 계십니다. 신자로선 그 분의 능력을 더 이상 논의 삼을 것 없습니다. 교회강단에서 그분의 크신 능력을 믿으라고 종종 권면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만큼 시간 낭비입니다. 신자라면 그분의 능력은 믿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삶에서 자기 전부를 그분께 의탁하여 체험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과 더불어 사탄에 묶여 있는 불신자들의 대표이자 충실한 일꾼들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 해당됩니다. 그들의 믿음과 그 실현방식이 기독교신앙과 비교해 무엇이 다른지 잘 살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이전에는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했지만 예수를 믿은 후로 정말로 참된 믿음 안에 들어와 있는지 잘 따져보고 새로운 헌신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모압 왕 발락의 사신들이 복채를 잔뜩 갖고 발람에게 찾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자기 왕의 말을 전했습니다.(7절) 그 부탁을 들은 발람이 이 밤에 여기에서 유숙하라고 했습니다.(8절) 단순히 먼 길을 달려온 왕의 사신이라 예의를 갖추어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돌아가라는 뜻이라고 해석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면 대나무자루나 부채 같은 것을 흔들며 자기가 모시는 신과 접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보듯이 발람이 그 다음 날에 답을 줄 정도로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발람은 그 자리에서 복채를 받고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평소 자신의 신당에 모셔놓은 우상 신에게 저주의 신탁을 해주면 됩니다. 또 그 증표로 부적 같은 것을 써주어서 사신들이 발락에게 갖다 주면 됩니다. 아니면 내일 당신들을 따라 현지에 가서 저주의 제사를 드려주겠다고 답변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발람으로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는 생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신의 형상이 없기에 자기 신당에 모셔놓은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이 요청을 처리해야할지 조금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로선 히브리신의 큰 능력은 들어봤을지 몰라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하는지 심지어 그 이름조차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명은 모세 혼자만 들었습니다.(3:1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도 단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주길 원했습니다.(3:15) 지금은 이스라엘조차 자기들 신의 이름을 아직 정하기 전이었기에 발람은 단순히 히브리인들의 신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나중에 그렇게 기록할 수 없어서 여호와라고 붙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발람은 또 신들마다 기도문과 신탁하는 절차와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형식들이 조금씩 다를 텐데 히브리 신에 대해선 종교적으로 완전히 무지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사신들의 요청을 접한 순간 점괘를 받거나 저주의 신탁에 시간과 노력이 조금 더 들 것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신탁 절차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복채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 내지 욕심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선 저주하지 말라는 분명한 계시를 첫 만남 때에 받았음에도(12절), 두 번째 만남에선 “발락이 은금을 가득 채워줄지라도”라고 말하면서 복채만 더 많이 주면 저주해줄 수 있을 것처럼 자기 속내를 은근히 내비친 것입니다.(18절)

 

처음 받는 예사롭지 않는 신탁

 

지금껏 발람이 축복이나 저주의 신탁을 하면 그대로 실현된다는 사실을 모압 왕 발락도 알고 있었습니다.(6절) 발람도 이스라엘의 신이 생소해서 약간은 당황되고 시간도 더 걸리리라 예상했어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사신들에게 자신 있게 말한 것입니다.(8절)

 

그런데 이 말에 조금 이상한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점이 있는데 뭔지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어떤 신도 자기 백성을 향해 저주할 리는 없습니다. 어떤 나라를 저주하려면 그 나라와 직접 대적하는 나라의 신이나, 세상 전부를 다스린다고 믿는 신이거나, 최소한 그 나라보다 더 힘센 다른 나라의 신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모압 왕 발락도 자기 신들이 히브리신과 대적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겼기에 사신을 보내어 발람더러 최고로 강력한 다른 신의 이름으로 저주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그런 우상 신이 아니라 모압이 상대할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자신에게 어떻게 이르시는지 물어 보고 너희에게 대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허락할 리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발람도 그런 이치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지금 그는 히브리 민족을 향해선 처음으로 신탁하는 중입니다. 그 신이 어느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저주의 신탁을 행해야 할지 알아보려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묵상 내지 기도해보겠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신 여호와가 자기와 교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후에 밤중에 혼자 자기 신당에 들어가서 자기가 숭배하는 가장 강력하다고 여기는 주신에게 이스라엘의 신이 어떤 신인지 또 그 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 없더라도 행간의 의미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평소에 하던 대로 처음에는 자기 주신의 이름으로 저주의 주술을 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 주신의 반응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신탁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히브리 신에 대한 정보도 아예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신의 권능이 매우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고 있던 차에 도리어 히브리신이 대뜸 자기에게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9절)고 물어왔습니다.

 

“이방 주술사인 네가 감히 나와 내 백성을 대적하려는 이유와 목적을 대라”고 여호와가 먼저 그에게 다그친 것입니다. 발람은 어쩔 수 없이 모압 왕 발락이 요구한 신탁의 내용을 그대로 아뢰었지만(10,11절)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단번에 거절했습니다(12절). 발람도 당시에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대로 어쨌든 상당히 담대한 주술사였던 것 같습니다. 곧바로 히브리 신에게 대놓고 너희 백성을 저주하려 한다고 털어놓았으니 말입니다.

 

사탄도 엄청난 영적 능력을 발휘한다.

 

발람의 이 대답도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발람이 여호와와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재물 욕심이 있었으면 구태여 발락의 사신들에게 그대로 밝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거나 그들 앞에서 저주의 신탁을 하는 시늉을 내면 됩니다. 아니면 재물을 더 받을 욕심으로 점괘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번쯤 튕겨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개되는 모든 과정을 볼 때에 그가 함부로 거짓말 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보다는 그가 성령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당나귀도 당신의 음성을 대변하게 하는 여호와입니다. 아무리 이방 주술사라도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졌던 흔적이 남아있는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이런 식의 주술사와의 직접 대화가 여호와만 아니라 우상 신들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선 더더욱 신접한 무당들은 자기 섬기는 우상 신과 대화했습니다. 때때로 불치병도 고치며, 욥기에서 보듯이 인간사회에 많은 환난를 일으킬 만큼 능력도 발휘합니다. 그래서 원시 미개사회에선 주술사와 그 신의 큰 능력 앞에 사람들이 공포심 반, 존경심 반으로 경배했습니다. 출애굽 때의 애굽 주술사도 첫째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둘째 개구리가 땅에 범람하는 기적을 연출했지 않습니까?

 

만약 신(神) 내림을 받은 무당이 그 신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그 전에 신 내림 자체를 거부하면 큰 불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무당들은 꼼짝 없이 그 신의 명령대로 따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8절)는 발람의 말은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히브리신 여호와도 평소 자기에게 점괘를 주거나 자기를 통해 능력을 발휘하는 여타 우상 신들과 동급(同級)일 것이라고 예사로 생각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거기다 우상 신들에게 거역하면 큰 벌을 받는 줄 체험적으로 잘 아니까 지금 여호와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었으니 그대로 사신들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재물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히브리 신에게 큰 벌을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우상 신들은 실존하지 않고 그 전부가 인간들이 스스로 위로받고 힘을 얻으려고 만들어낸 가공의 허상들입니다. 문제는 그 허상인 우상신들 뒤에서 사탄이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마치 그 우상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여서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존하지 않는 우상을 사탄이 악용해서 인간의 참 생명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사탄입니다. 또 불신자들은 이미 참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며 자기만 높이는 인본주의 사상에 붙들려 있는데 그런 사상을 더 확고하고 완악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과는 계속해서 담을 더 견고하게 쌓게 만들려는 아주 교묘하고 음흉한 모략입니다.

 

어쨌든 신들의 능력을 잘 아는 발람이었지만 끝까지 자기 재물욕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에게 받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12절)은 빼버리고 단순히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않는다고만 말했습니다.(13절) 시일이 조금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저주의 신탁이 먹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여지를 남겨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락이 애가 타서 더 많은 재물을 갖고 금방 사신을 다시 보낸 것입니다. 발람 또한 영험한 주술사로써의 자기 명성에 금이 간데다 자기가 모시는 신들의 체면을 다시 세워놓아야 하니까 시간을 더 갖고 천천히 히브리신과 겨뤄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신들은 순순히 그의 말을 믿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그대로 왕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가 자기 백성의 저주를 허락할 리는 없다는 것을 조금만 따져보면 알 수 있을 텐데도 그 말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발람의 권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또 일반인들의 영적 수준도 얼마나 무지했으면 주술사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권능에 항복한 발람

 

항상 그러하듯이 발람이 받은 여호와의 말씀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절)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가 재물에 탐욕이 컸다면 여호와께 받은 응답을 무시하고 사신들 앞에서 거짓으로 저주하는 것처럼 하거나 사신을 따라가서 현장에서 다른 신의 이름으로 저주해도 됩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발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신 여호와가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예방한 것입니다.

 

발람으로선 밤새도록 여호와의 그 음성을 부인하고 그 능력을 이겨보려 시도했을 것입니다. 자기 주신은 물론 모든 우상 신들에게 히브리 신의 계시를 막아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만은 갑자기 모든 신들이 입도 벙긋하지 않는 벙어리로 돌변했습니다. 결국에는 참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엄청난 권능 앞에 항복하고서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방 주술사와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당신의 백성을 저주하려는 이방 주술사를 그대로 두겠습니까? 당장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심판을 내리든지 최소한 벙어리로 만들어서 두 번 다시 그런 주술을 못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땅을 판 돈이라 일부이긴 해도 상당한 금액이 될 텐데 사도들을 속이고 전부 바치지 않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현장에서 즉사시켰지 않습니까?

 

또 그러면 전쟁을 신들 능력의 다툼이라고 믿는 발락이기에 이스라엘과 대적해선 큰일 나겠다 싶어서 전쟁계획을 당장 중지할 것이고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정반대로 어떤 면에선 발람의 영적 권위가 결과적으로 더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발람은 어떤 신이 되었던 정말로 그 응답 받은 대로만 전하는 정직하고 신용 있는 주술사가 되었지 않습니까?

 

거기다 하나님은 발람을 정죄는커녕 야단도 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단순히 이방인 주술사에게도 인자를 베푸는 하나님이라고 여겨선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방식으로만 일하실 뿐입니다. 당신의 능력은 언제든 쉽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신자들이 소망 기대 예상하는 방식과 시기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고 신자가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만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하나님은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발람의 신탁을 거절한 이유로 내가 최고로 강력한 신이라든지, 나 외에 신이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한마디만 했습니다.(12절) 이 대답에는 하나님 당신과 그 영광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주술사 앞에서 당신을 낮추시기까지 하면서 당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만 드러냈습니다.

 

어지간히 믿음이 좋은 신자도 그분을 찾을 때에는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것은 뒷전이고 당장 내 코가 석자가 된 것만 문제 삼고서 주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만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로 신자의 유익부터 먼저 챙기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은 사람과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절대로 늘거나 줄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어떤 잘못을 범해도, 심지어 당신을 거역해도 당신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단 한치도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납니다. 그 사랑을 온 천하에 명백하게 드러낸 사건이 골고다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이방인 모압 왕 발락은 같은 이방인 발람더러 자기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6절) 발락과 발람은 자기들의 대적을 저주함으로써 그 반사 이익으로 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현실 사건과 여건들이 자기들 소원대로 형통하거나 최소한 평안한 것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복의 본질이자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원했던 복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여호와께 대적한 벌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만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유일한 참 신임을 이방인들에게 영험하다고 인정받는 발람을 통해서 그 이방족속들에게 증명되었을 뿐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당신의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며 당신께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작 깊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 사항도 그분의 불신자에 대한 바로 이런 은혜로운 관심과 애정입니다. 제발 우리끼리 교회에 모여서 자기 문제만 갖고 울고불고 하는 일에는 이젠 힘을 그만 쏟아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만히 있던 이스라엘만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지난주 설교에서 살펴봤지만 이스라엘에게 현실적 이익이 새로 생긴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발람의 저주가 전혀 씨도 먹히지 않았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선 사탄의 능력과 흉계가 아예 작동되지 않게 했습니다. 사탄의 훼방을 하나님이 사전이 미리 차단해준 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복의 실체였습니다.

 

사탄과 영적전쟁의 실상

 

여러분 발람이 하나님 앞에서 꼼짝도 못했던 것과 같은 이런 권능이 지금 우리에게도 항상 임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 그런 은혜를 일상의 삶에서 체험적으로 누리고 있습니까? 요컨대 하나님 그분과 그분의 역사에 대해서 정말로 얼마나 깊이 알고 있으며 또 그 아는 만큼 자기 인생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이 사탄의 훼방을 막아주었다는 간단한 뜻조차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자기들에게 뭔가 나쁜 일이 생기거나 실패하고 죄를 지으면 일단 사탄의 훼방에 넘어갔다고 쉽게 간주해버립니다. 평소에 교회 생활에 충성하고 말씀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뜨겁게 하고 있는데도 자기들 능력 밖의 큰 고난이 생기면 하나님이 그랬을 리는 분명 없으니 사탄이 방해했다고 단순하게 판단합니다. 그 이유로는 자기들 믿음이 약해지고 기도의 양도 차지 않고 말씀 보는데 조금 등한히 했더니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졌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부 그런 측면에 없는 것은 아니나 사탄이 신자의 어디를 공격하여서 궁극적으로 실패케 만들려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을 성숙케 하려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주 가끔 주시는 연단을 제외하고는 신자에게 일어나는 불행이나 고난의 대부분은 신자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자신의 실수 잘못 죄 때문입니다.

 

사탄은 오직 한 가지 목표만 갖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탄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것,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부인 거절하게 만들려는 것 하나뿐입니다. 악령 사탄은 인간으로 오직 성령이 역사함의 반대로만 행하게끔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신자를 언제든 넘어뜨리려고 사자처럼 문 앞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신자의 매일 매순간의 삶은 악령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가르쳤고(요3:5), 바울 사도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고전12:3) 바울이 신자가 싸울 영적전쟁의 실체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21) 통치자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라고 합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이 농간 조종 모략에서 벗어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며 담대히 말씀으로 큰소리로 대적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 귀신 쫓는 권세를 직접 받은 제자들도 실패했으며(막9:28-29) 초대교회 때 제사장 스게와와 일곱 아들이 섣불리 사도들 흉내를 내다가 도리어 귀신들에게 크게 혼만 났지 않습니까?(행19:14-16)

 

사탄의 농간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담과 이브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끝만 비튼 거짓말 하나로 모든 사람을 다 넘어트립니다. 그것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거짓말로 속입니다. 영적 전쟁의 첫째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자의 인생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인 인생이 단지 혈과 육의 싸움이라고 하면 첫째가는 거짓말이 됩니다.

 

바로 그런 거짓말로 사탄은 신자를 속여서 그 싸움에만 몰두하게 만드는데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최고로 잘 먹히고 있는 사탄의 최우선적인 전략입니다. 예상치 못한 불행, 실패, 고난이 생기면 신자더러 단순하게 사탄이 방해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자들이 기도해서 구원 받으려는 내용이 주로 불행, 실패, 고난들인데 그 전부가 현실의 혈과 육에 관한 것이지 않습니까?

 

신자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사탄은 신자가 소원하여서 행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방식으로는 어지간해선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다른 모든 수단이 소진 되었을 때에 그럴 뿐입니다. 대신에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신자로 하여금 자꾸만 진리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예컨대 성경 말씀이 어렵게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자신과 상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신자로선 사탄의 실체가 안 보이는데다 성경 진리를 제대로 잘 알지 못하니까, 엄밀히 말해선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사탄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숨은 의미

 

죄송하지만 혈과 육에 싸움에만 매달려있는 신자들은 사탄의 농간에 완전히 넘어간 것입니다. 본문의 발락과 발람이 갖고 있는 신이 인간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신앙과 동일합니다. 믿음의 대상인 신의 이름은 달라도 그 근본 사상은 동일합니다. 사람이 신의 기분에 충족하도록 뭔가를 최대한 바치면 그 신에게서 그에 비례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나선 이전보다 혈과 육에 관한 소망 내지 욕심의 질과 양은 많이 건전하고 검소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배와 기도와 말씀 보는 뜻의 대부분이 현실 생활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는 씨름에 집중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번의 시험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나 메시아 사역으로나 그 셋 다 인간의 혈과 육을 풍성하게 채우라는 과제였습니다. 돌을 떡으로 바꾸라,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 자기에게 절하면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것 모두가 그렇습니다. 사탄이 인간더러 예수를 믿지 말라는 것보다는 믿더라도 그 믿음을 이 땅 물질계 의 형통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려는 모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셋 다 예수님더러 능력을 발휘하라는 것인데 주님은 그 셋 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도 그 진리의 앞에 꼼짝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언뜻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사탄과의 힘겨룸에서 진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 죽음도 바로 사탄과 능력으로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그 거짓을 만천하에 폭로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써먹은 방식을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사탄은 신자더러 현실의 풍요와 안락과 쾌락으로 가는 길 쪽으로 가쭈 이끌고 심지어 직접 그것들을 양껏 제공해줍니다. 가뜩이나 물질 만능 시대인지라 어지간한 신자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이 생길 때에 하나님을 찾고 더 겸손해집니까? 현실이 풍요하고 아무 문제없을 때에 그렇게 합니까? 거의 대부분의 신자의 답이 후자이지 않습니까?

 

사탄의 전략이 일관된다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지금부터 3500년 전 원시미개한 신앙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사탄의 어떤 흉계도 당신의 백성에게 절대로 작동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백성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는 사이에 당신께서 다 역사해주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라면 충만하게 역사할 수 있는 신약시대엔 더더욱 그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본문 내용은 이방의 불신자가 자기들 신에게 받기를 바라는 복과 신자가 참 하나님 여호와께 바라는 복이, 정확히 말해 항상 받고 있는 복이 어떻게 다른지 아니 정반대인지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38-39의 말씀이 바로 본문의 주제이자 결론이 됩니다. 신자들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 할 영적전쟁을 이길 수 있는 첫째, 아니 유일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 빼고는 최고의 능력을 지닌 사탄조차 예수 믿는 신자 한 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사탄의 훼방을 광야 시험에서 다 이기셨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 최고 전략마저 산산이 깨트렸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는 현실 삶에서의 혈과 육의 씨름에 관해선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10/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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