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문제는 왜 막연하고 어려운가요?

조회 수 667 추천 수 9 2012.03.09 01:04:09
영의 문제는 왜 막연하고 어려운가요?


[질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성경 말씀을 “먼저 너의 마음 그릇을 닦아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도 되는지요? 예를 들어 말로써 남에게 상처 주는 일 같은 제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제 마음의 그릇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종교 혹은 무종교에서의 마음 닦기와 기독교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스스로 수양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에 의지 하는 것의 차이인가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육의 문제는 금방 와 닿는데 영의 문제는 솔직히 막연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육의 문제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없다는 천국을 가본 적이 없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구하는 것은 영의 문제라기보다 육의 문제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요? 영혼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이 자신의 영혼육 존재 전체와,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까지, 또 일생 동안 하는 일 모두를 전적으로 주관하도록 만드는 것이 신자의 마음닦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고 그분의 은혜를 실제 삶에서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등, 신자의 모든 생활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의 문제는 어지간한 신자라도 솔직히 그저 막연하게 다가옵니다. 성령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영의 문제를 육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천국 가는 것도 어쩌면 육의 연장 같기도 하고 영혼을 위한 기도도 어떻게 해야 할지 풀어야 할 숙제는 늘어만 갑니다. 이런 의문들을 풀려면 무엇보다 영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혼이 무엇인가?

성경은 인간을 마음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으로, 또 영혼육의 삼분법으로도 설명합니다. 꼭 어느 쪽이 더 옳다고 할 수 없으며 각각의 문맥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관련 성경구절: 이분법-창2:7, 욥27:3, 33:4, 전12:7, 삼분법-살전5:23, 히4:12)

그러나 영혼구원과 인간내면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삼분법이 더 유용한 것 같습니다. 삼분법은 인간을 육(肉, body), 혼(魂, soul or mind), 영(靈, spirit)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육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며 문제는 혼과 영의 구분입니다.

먼저 혼은 인간이 지각, 인식, 비교, 분석, 판단, 결정하는 지정의적 영역입니다. 이 지정의는 미개한 수준이긴 해도 동물도 공유하고 있는데 본능에 따라 오직 생존과 번식만 도모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뜻 그대로 살고 있기에 실은 인간과 달리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반해, 정작 찬양을 받고 싶어 창조한 인간은 대다수가 찬양은커녕 그분을 거부, 부인, 비방을 하고 있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선 지정의를 아주 고급한 차원으로 부어주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자유의지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요컨대 자의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혹은 불순종을 택하여 악한 일을 도모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거기다 당신께 잘 순종할 수 있도록 따로 영을 부여했습니다. 당신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릴 청지기로서 당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은 지정의의 이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여서 그 뜻대로 지정의를 통제하여 그 뜻에 순종케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영이 죽어버렸습니다. 영 자체가 소멸되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해 전적으로 오염되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기고 그분과 원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께 순종은커녕 찾지도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롬3:9-18) 한마디로 자연인 상태로는 예수를 믿지 않고 또 믿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1-5)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먼저 예수 믿기 전의 인간의 상태를 “죽었다”고 말합니다. 육체와 지정의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영이 죽은 상태를 풀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지정의 판단대로만 즉,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자기 뜻과 기분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면서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쫓지 않고 오히려 사단을 따르며 세상 풍속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었기에 영원한 세계에 대해선 무지(無知)해졌고, 대신에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재물을 주인으로 삼아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추구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에 비추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죄인들을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임으로써 그 죄 값을 다 치르게 했습니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로 인간을 되돌리어 당신과 화목케 만드는 당신의 일방적 은혜였습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사단에게 묶여 있던 그 영을 자유케 하고 예수님께 순종코자 하는 소망과 열정을 심어주었습니다. 나아가 성령을 내주케 해서 혹시라도 이전의 허물과 죄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되살아나면 대신 탄식하여 간구해 주시고 또 신자의 영혼육에 새 생명으로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 쪽으로는 완전히 막혀있었고 오직 세상과 사단 쪽으로만 향하던 영을 하나님께서 당신 쪽으로 향하도록 바꾸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영의 문제는 왜 막연하고 어려운가?

흔히들 “내 마음 나도 몰라”, 혹은 “럭비공 같은 내 마음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나도 장담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분명 나일 텐데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교회에서 우리말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기에 그 의미가 혼동 혹은 중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마음을 영이라고 하고, 생각은 지정의 즉, 혼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는 감정이 영향을 받는 곳은 마음이고, 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은 생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설명들이 일견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영어의 think는 사고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mind는 그런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영역이 됩니다. 우리말로도 생각은 “떠오르는 생각”처럼 명사도 되지만 주로 “생각하다”는 동사로 사용되며, 마음은 동사가 없고 오직 명사로만 사용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인간내면이 활동하는 상태를 생각, 그런 활동이 이뤄지는 내면의 영역 자체가 마음입니다. 삼분법에 대비하면 생각은 혼(지정의)의 활동이며, 마음은 혼과 영이 공존하는 인간내면이 됩니다.(이 구분은 설명의 편의상 제 개인적 소견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감정과 지성과 의지의 활동인 생각은 인간이 분명히 인식할 수 있고 또 스스로 통제할 수 도 있습니다. 반면에 마음은 모든 이가 체험하듯이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도 자주 있습니다. 모든 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니까 조변석개(朝變夕改)라는 사자성어마저 생겼지 않습니까?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실토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내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자신의 지정의로도 가름할 수 없는 깊은 속내가 자기 내면에 따로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에겐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혼 이전에 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영의 문제가 막연한 이유도 지정의를 그 배후에서 통제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이기에 지정의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기 생각마저 자기 의도한 바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비록 타락했으나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양심이나, 그 동안 배운 도덕률에 따라 생각을 시작했지만 자기가 봐도 분명히 그릇된 생각이 자꾸 끼어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마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라고 실토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물론 서두에 설명한 대로 불신자의 경우는 그 영이 사단에게로만 향하도록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경우도 이전의 그 습성이 수시로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조차 모른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그 마음을 주관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의 영을 궁극적으로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 아니면 사단 둘 뿐이라는 뜻입니다.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속했느냐, 사단에 속했느냐 둘 중 하나로만 나뉜다는 뜻도 됩니다.

예컨대 불신자의 경우 경사가 겹쳐서 감정은 아주 즐거운데도 불현듯 허무해지고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는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충만해지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자의 경우 환난이 겹쳐서 완전한 절망 속에서 눈물이 마를 새 없고 주위 사람의 위로마저 막혀서 이전 같았으면 자살도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도, 자기도 모르게 다시 일어서고픈 의지와 소망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새 힘을 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세 가지 근원

그렇다고 인간의 생각 즉, 지정의의 활동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단과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경치를 바라보거나, 사람 혹은 사건을 만나 특정한 자극이나 정보가 외부로부터 입력되면 스스로 자기 지정의를 동원해 분석 판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 생각의 근원(source)은 셋입니다. 어떤 필요나 동기에 따른 스스로의 생각, 하나님의 영이 심어 주는 생각, 사단의 영이 심어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를 또 신자와 불신자를 나눠서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는 두 가지 Source 뿐입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사단의 영만 작동합니다.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일절 임재하지 않고 그 영이 전적으로 타락되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의 영(사단)을 따라 육체와 마음(자기 지정의)이 원하는 것만 합니다. 매번 사악한 생각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생각이 재물을 주인을 삼는데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생각과, 스스로의 생각은 물론, 사단이 심어주는 생각까지 셋입니다. 사단이 생각을 심어준다고 해서 사단의 영이 아직도 신자에게 내주하여 성령과 공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단은 어디까지나 생각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신자의 내면에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외부에서도 사단이 끈질기게 시험,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단에 묶여 있었던 영의 옛 습성 때문에 신자도 때때로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려하거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생각의 초점이 몰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신자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라도 최종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선 영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 습성이 되살아나 사단의 시험이나 죄의 본성에 그대로 넘어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 거룩의 길로 걸어가게 되느냐 둘 중 하나로만 결정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생각을 궁극적으로 다스리는 영은 오직 사단과 하나님 둘 중 하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사단과의 영적 전쟁은 인간의 내면 즉,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 불신자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은 사단과 하나님 어느 쪽에 속했는지 둘로만 나눠집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타종교인과 무신론자 통칭)는 사단에게, 예수 믿는 신자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런 진술이 불신자들로선 이해도 되지 않고 격렬한 반발만 불러일으킵니다. 신자도 조금 심한 말이 아닌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심하게 정죄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진리이자 생명이신 당신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사단에게 속했다는 말에 불신자들의 반발과 신자들의 의아심부터 생기는 까닭은 단순히 귀신 들린 것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려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사단이 큰 능력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겁을 주려는 짓입니다. 말하자면 사단에 속한 것 중에서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단에 속했다는 말은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기에 예수를 끝까지 부인하며 참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단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공중 권세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즉, 어떡하든 사람들로 예수 믿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보듯이 사단이 자기 종으로 묶는데 필요하다면 세상의 풍요와 사치도 얼마든지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마음을 혼미케 만들어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게 만듭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아 마음이 혼미케 된 불신자들로선 자기가 사단에 속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불신자의 모든 생각을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안락과 풍요에만 향하도록 만드는 근본 이유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아예 생각도 못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 대부분이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아주 간혹 인정하더라도 자기들의 현실을 풍요케 만드는데 도움을 얻는 데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성령의 역사하는 모습

정작 문제는 신자입니다. 살펴본 대로 신자가 된 후에도 그 생각이 성령과 사단의 지배를 번갈아 받게 되는데도 스스로는 그 구분이 명확하게 안 됩니다. 거기다 영의 문제가 어렵게 여겨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역사하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악령의 경우는 사람들을 묶어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 예로 신들린 무당의 경우는 장래 일도 알아맞히고 신통한 능력도 발휘하고 병도 고치며 심지어 자기들끼리 귀신도 쫓아냅니다. 그러나 신이 내린 상태에서 자기가 행하거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그 신이 떠나면 정작 본인은 깜깜히 모릅니다. 그 영이 지정의마저 완전히 붙들어 맨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은 맨 처음 일방적인 은혜를 부어주어서 예수를 믿게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즉, 신자가 된 후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고 역사합니다. 사실은 구원을 주실 때도 신자의 지정의는 살아 있습니다. 지성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깨닫게 되고, 감정적으로 기쁨이 따르며, 의지적으로 주님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이 따릅니다. 단지 하나님 쪽에서의 절대적 주도적 선도적 일방적 간섭이었다는 뜻입니다.  

구원 후에도 신자의 지정의는 멀쩡한 채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방언이나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행할 때에도 신자는 온전한 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나름대로 인식하고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대로 순종하고 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켜야 할 신자가 자기가 행하는 일을 모르거나 아무런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은사를 포함하여 성령이 역사하는 모든 구체적 과정은 신자의 지정의로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비록 방언이나 신유 같은 은사는 겉으로 드러나서 성령의 역사인 줄 확인할 수 있어도 어디까지나 성령이 역사한 결과일 뿐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지정의를 묶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또 그것을 아우르면서도 더 광대하고 오묘하며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신자를 통해 실현시킵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은 전혀 꿈도  못 꾸는 너무나도 놀랍고 풍성한 은혜와 권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다 사단이 신자를 넘어뜨릴 때는 거의 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고후11:14)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영적 문제라고 하면 일단 초자연적인 신비한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고만 여기는 것은 오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사단이 신자를 속여 유혹에 넘어가게 만드는데 속아 넘어갔으니까 사단이 심어준 생각인지 아닌지 신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영의 문제는 막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령이 개인의 지정의가 자의로 작동하지 못하게 묶는 것은 공포감을 조성하여서 노예로 부려먹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인식을 아예 못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성령이 그와 달리 인간 지정의를 그대로 두고 역사하는 이유는 신자더러 기꺼이 즐겁게 당신의 역사에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정말로 알 수 없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막무가내로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신자조차 영의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또 그 뜻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알면, 또 신자가 그 진리를 확신하여 마음을 열고 성령의 역사를 소망하면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신자만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이미 신령한 자로 바뀐 것입니다.  

우선 신자라면 성령의 역사는 항상 초자연적으로 신령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선입관부터 버려야 합니다. 일부 그런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부터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분명히 실재(實在)하는 성령의 역사에 신자가 끝까지 무심하거나 둔감하다면 큰 문제입니다. 질문자님은 도저히 그럴 수 없기에 이 질문을 주셨지 않습니까? 믿음이 자란다는 또 하나의 의미도 그저 막연하게만 여겨지던 영적 차원에 대해 점차 눈이 열리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져서 그분의 역사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신령한 것의 첫째가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부정법을 두 번 거푸 사용했습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알게끔 하고 싶다”고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이방인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는 사단에게 미혹되어 영적인 문제에 완전히 무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이 역사하면 가장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 악령의 하는 일이 어떡하든 예수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당연히 성령은 그 반대로 예수를 믿고 그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더 깊이 깨닫게 만드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가장 큰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변함이니라.”(고전2:12-14)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가르치게 되는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육(사단)에 속한 불신자는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육에 속한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를 믿고 따르면 천하를 뒤엎을 만한 성령의 역사가 이미 신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 생명과 맞바꾼 즉,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천국에서 잔치가 열린다고 했지 않습니까?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성령의 역사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얻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과정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람의 소리는 들린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바람이 언제 어디서 불어오는지는 몰라도 바람이 불고나면 나뭇잎도 흔들리고 먼지가 날리니까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믿고 난 이후 신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보면 성령의 역사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신자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며 읽게 됩니다. 그분을 닮아가기를 소원하여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주위에 사단에 미혹되어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당연히 성도들 간에 예수님 이야기만 해도 기쁘고 눈물이 나옵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보고 말씀으로 훈련 받고 어려운 교우와 불신자를 위해 합심으로 기도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령한 은사가 나타나고 기도하여서 이적이나 크게 응답받는 일이 일어나야만 성령이 역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드리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아주 크게 역사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런 일을 예사로 여기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대단한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간단히 예수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전에는 성경을 이해하기는커녕 아예 엉터리 같은 이스라엘 역사책이라고 거들떠도 보지 않고 비방만 했지 않습니까? 황금 같은 주일날 시간과 돈 들여가며 교회 가는 신자들을 바보라고 치부했고, 또 말만 앞선 위선자 예수쟁이라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혹시 힘든 일이 있어서 기도 비슷한 일을 해도 천지신명이라고 했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를 생각도 안 했습니다.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해도 간음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예수가 주는 것 없이 제일 밉다가 아무 까닭 없이 가장 좋아진 것을 봐도 내 지정의의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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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된 후에는 특별히 자신의 지정의가 작동되어지는 방향을 보면 성령의 역사인줄 알 수 있습니다. 영이 지정의를 통제한다고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석, 판단, 선택, 결정할 때에 과연 재물과 하나님 둘 중 어느 쪽에 순종하는지 따져보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걱정 염려가 끊이지 않으면 다시 이방인 시절의 습성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신자의 속에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크고 위중한 환난과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신자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면 성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이 역사하는 과정은 세세히 알 수 없어도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를 대신해 성령이 간구해준다는 말씀에 이어서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느니라.”(롬8:28) 성령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도록 기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자기 방식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완벽한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뒤에서야 비로소 성령의 역사였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진심으로 겸비해져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다고 소원하여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면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입니다. 인격적인 분입니다. 신자와 항상 함께 하시는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 바로 그분입니다.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은혜를 부어달라고 마치 아버지에게 말하듯 대화하고 성경말씀을 묵상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과정 중에도 그 열매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신들려 묶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역사하니까 신자의 내면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자유와 기쁨이 충만해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신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늘어나면 성령은 역사하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이 가신 좁고 협착한 의의 길을 따라가고 있으면 성령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2/1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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