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을 통해 방언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질문 3/5)
[질문]
저는 방언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대예배 때 죄를 고백하는 순서에서 그전까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여대생이 기도하라니 바로 방언부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이해가 안 되고 듣기가 싫던지 방언, 그야말로 은밀한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물론 자기가 알지 못하는 죄를 방언으로 고백할 수도 있지만 기계처럼 버릇처럼 나오는 방언으로 잠시 기도하고 말아버리는 그 여대생의 기도는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 애는 과연 죄 고백을 한 것일까? 회개가 될까? 그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어느 순간 방언을 사모하게 되었고 방언도 받았습니다. 근데 간혹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 방언을 받는 집회가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이 옳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단이 주는 방언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기도원엘 가면 옆 사람의 기도를 방해할 만큼 크게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그럴 심란해집니다. 솔직히 저는 속으로 그 방언하는 자를 대적해서 기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답변]
기도의 형식도 아주 중요하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5-8)
예수님이 기도에 관해 가르치면서 내용(주님 가르치신 기도 마6:9-13)에 앞서 기도하는 방식을 먼저 언급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기도하는 형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하는 목적과 동기에 따라 그 형식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줄 제대로 알면 잘못된 기도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자기가 소원하고 계획하는 바가 그분의 뜻 안에서 선하게 이뤄지길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은 신자의 아버지(아빠)가 된 관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부모에게 하듯이 대화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기에 당연히 외식(外飾)하는 모습은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이 생기는 구체적인 이유로 둘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에게 자기를 잘 보이려고 기도하면 필연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치장하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합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알게 하려고 종교적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큰소리로 기도할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구하는 내용을 하나님이 잘 모르니 말을 많이 해야 들을 것이라 여겨서 중언부언(重言復言) 한다고 합니다. 이방인은 신에게 최고 최선의 것을 바쳐야 복을 준다고 믿습니다. 또 그 신은 부모가 아니기에 신자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자주해야 알아듣고 응답해준다고 믿습니다. 신자가 기도하면서 중언부언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와 자녀 사이가 된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장소를 골방으로만 한정하거나, 소리를 최대한 낮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의 일이기에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대화하듯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신자의 친밀한 개인적 교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가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거나, 했던 말 계속 반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항상 한적한 곳에 혼자 따로 떨어져 기도했지 않습니까?
이 가르침은 개인적 기도이지 예배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느냐고 반발 할 수 없습니다. 함께 모였으니 더더욱 조용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꼭 묵언(?言) 기도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묵언은 생각이 분산된다는 단점이 더 큽니다. 다른 사람이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하는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기도하면 됩니다.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이기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대 예배 때에 방언으로 기도해도 되는지?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at maximum) 세 사람이 차서(次序)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7,28)
교회에서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두세 사람에 한정해서 하라고 합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또 세 사람이 방언했는데 한 사람만 통역하라고 했습니다. 방언과 별도로 통역만의 은사를 받은 자가 있었고, 초대교회의 예배순서와 성령의 역사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성도들 중에 방언 혹은 예언으로 계시를 받으면 순서를 지켜 회중에게 설교하듯이 그 메시지를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주일 대 예배는 그런 절차가 없습니다. 함께 참석한 불신자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상한 사교로 여길 수 있으므로 방언은 더더욱 삼가야 합니다. 예배 중 통성으로 기도하는 순서에 신자에 따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까지 일일이 금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옆 사람이 신경이 쓰여 기도에 방해가 될 정도의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주님 뜻에 따르면 일반적 기도라도, 해선 안 됩니다. 교회에서 방언기도는 가능한 기도 모임에서만 허용해야 하되 다른 이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심시켜야 합니다. 찬양예배 혹은 새벽기도예배가 끝난 후에 개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으로 회개의 기도가 가능한가?
제가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원리에 따르면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9) 죄를 자백해야만 용서해주신다고 합니다.
자백했다는 형식을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따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어떻게 행하면서 어떤 면에서 왜 잘못인지 깨달아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입술로 자백해야 합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지난주도 하나님 앞에 알게 모르게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종교적 임무를 형식적으로 때우는 립 서비스일 뿐입니다. “하나님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꼴밖에 안 됩니다. 너무나 게으른 짓으로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심지어 올바른 신앙도 아닙니다. 대표 기도에선 모든 이를 대변하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문구를 사용해도 개인적 회개에선 그래선 안 됩니다.
처음 예수 믿어 구원 얻을 때는 하나님과 등을 졌던 자기 인격체 전부가 추하게 타락해 있음을 절감하고서 삶의 방향과 인생관 자체를 완전히 뒤집는 회심(回心)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는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행동, 말, 생각, 사건 등에 잘못을 반성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과 성경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 중이나 후에 주님의 십자가 은총과 권능 안에서 용서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뜻대로 고치기로 결단, 헌신, 실행해야 합니다. 요컨대 “반성과 고침”(悔改)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방언으로 회개 기도를 하려면 본인이 통역의 은사도 함께 받아 그 내용이 회개임을 알지 못하는 이상 불가능할 것입니다. 거기다 자기 생각과 다른 내용의 방언을 할 수 있으므로 통역 은사를 받았어도 회개를 자의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절감 자백하지 못한다면 헌신과 고침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방언으로 기도하면 성령이 직접 신자의 영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깨끗케 해주시고 앞으로도 죄를 멀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라고 반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방언 기도도 그 시작과 끝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 스스로 절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신자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성령이 독단으로 회개에서 거룩해지는 것까지 다 책임지면 신자는 허수아비입니다. 성경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는 권면(히12:4)도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영원토록 내주하신 성령이 자동적으로 회개해주면 신자가 귀찮게 회개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32:1-5)
성령은 오히려 죄를 자백하지 않는 신자의 심령에 눌림을 주어서 반드시 토설케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신자 대신에 회개해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대예배 시간의 회개기도마저 방언으로 한 그 자매는 짐작컨대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자랑하려 한 것입니다. 아니면 방언의 은사는 받았는데 아직 관련된 성경 진리를 배우지 못해 기도할 때마다 마냥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후자로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성령의 방언과 악령의 방언
무당도 방언을 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는 동안에 자기 의지로 통제가 되지 않으며, 하는 동안이나 하고난 이후에는 무슨 내용의 말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허수아비나 녹음기 역할만 한 것으로 악령에게 입술만 빌려준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무당의 방언은 통역이 필요 없는 일반 언어로 주로 행해지기에 주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도 두 종류입니다. 현실적 형통과 질병치유를 약속하거나, 아주 큰 공포나 염려를 부르는 것들입니다. 세상 쾌락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을 등지게 하거나, 겁을 주어서 자기 졸개로 부려 먹으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령은 신자를 당신의 자녀이자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십니다. 신자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동의가 있어야 방언을 하게 합니다. 자기 의지로 방언을 한 것이기에 방언할 때나 한 후에 정확한 내용까지는 몰라도 자신이 행한 것을 다 기억합니다. 방언을 많이 하면 통역은사도 함께 받거나, 최소한 그 의미를 성경에 비추어 대략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 있게 말씀하시고 무엇보다 당신 뜻을 신실한 신자에게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 성령 방언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열매 맺습니다. 신자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 뜻에 순종해 살며, 불쌍한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열망이 샘솟듯 생기게 합니다. 또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신자 개인이 평강과 안식과 확신과 위로를 얻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만 생기는 악령의 방언과는 정반대입니다.
교회 기도회나 성도들 모임에서 방언을 한다고 해서 다 성령의 방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만 아니라 심판 때에 뽑히어 불에 던져질 쭉정이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신령한 표시를 내거나, 영적 우월을 자랑하거나, 현실의 형통과 출세를 보장하는 식의 내용이라면 성령의 방언이 아님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분별이 안 되면 그런 방언을 하는 자를 일단 금하게 하거나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의 방언에 반드시 통역을 붙이라고 바울이 권면한 까닭입니다. 대표적으로 약 20년 전 캐나다 토론토 블레싱 집회에서 짐승 울음소리 방언을 한 것은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악령의 짓입니다.
방언을 훈련해서 받을 수 있는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훈련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적합한 각양 은사를 나눠주신다고 말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적합하게 나눠준다는 것은 각 사람들이 섬겨야 할 사람이나 직무가 각기 있다는 뜻입니다. 그 소명을 실현하는 데 가장 필요한 은사의 종류를 성령이 정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훈련해서 방언을 받겠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아주 교만한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특정한 매뉴얼 안에 가두는 짓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을 스스로 위반할 리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당신께 평생을 헌신한 종에게도 그러합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종 모세조차 반석에 물을 내라고 말로만 명하라는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로 친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한 발자국도 들여 놓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은사가 훈련해서 받을 수 있다면 왜 유독 방언만 훈련해서 받습니까? 통역, 신유, 능력, 믿음, 섬김, 예언, 지혜, 지식 등 다른 은사도 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신유가 훈련 한다고 일어납니까? 핍박을 또 순교마저 기꺼이 견디어내는 강인한 믿음의 은사를 훈련해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훈련하여 은사를 받을 수 있다면 성경에 그런 언급이 있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섬기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훈련해서 받으려고 자원하는 교인도 없고, 그것을 훈련시키는 교회는 없습니다.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십자가 복음을 죽을 때까지 증거하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자원하는 신자가 없다는 자체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유독 방언만 훈련해서라도 받겠다는 이유는 영적우월감을 가지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자기를 더 편애하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하나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기도를 하고 싶다면 혼자서 골방에 서 은밀히 그런 소원을 아뢰면 됩니다. 방언을 받든 못 받든 성령님의 뜻입니다.
초대교회와는 사정이 다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4-17)
이 기록이 방언을 훈련해서 받을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했지, “방언 내지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되 머리로만 납득한 것이지 자신의 존재론적 깨어짐과 거듭남의 체험은 아직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근본 역할이 옛 자아가 깨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예수를 위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에게 안수 받은 자들에게는 자기 전부를 산산조각 내는 철저한 회심기도가 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통곡도 따랐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바울의 안수 받은 자가 방언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야말로 오히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적합한 은사를 나눠주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기록 즉, 훈련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사도들과 당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가장 충만하고도 유별나게 드러났던 것은 그 시대적 특수사정을 감안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게 해서 그분의 구주되심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확실히 입증하려는 뜻입니다. 기독교와 성경이 체계적으로 완비되기 전에 즉,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가 로마제국 안에 확고하게 퍼져나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한 후에 구별해서 세운 자들이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