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쪽집게 같은 예수님(마5:21-24)

조회 수 2457 추천 수 125 2003.06.17 00:02:13
마태복음 강해 (56) 3/2/2003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1-24)

작심하고 하신 말씀

현재 배우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다. 마 5:1에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했듯이 산에서 하신 교훈 말씀이다. 참고로 평지 설교도 있다.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눅6:17) 서셔서 하신 비교적 짧은 설교다. 4복음서에 예수님의 설교와 비유가 많이 나오지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가장 유명하다. 마5:2에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마음 속으로 단단히 작심하여 가르쳤다는 의미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그 의미를 해석해 주거나 유대인들과 논쟁하다가 생긴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이 신자가 꼭 알아야 하고 반드시 가르치고 싶었던 말씀이 이 산상수훈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작심해서 가르쳤기에 한 장소에서 하신 설교로는 그 길이가 가장 길고 그 내용 또한 가장 뛰어나다. 전인류 역사를 통 털어 현재까지 어떤 선각자나 종교가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로 이렇게 심오하게 가르친 자가 없다. 그런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이다.  

불신자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권하면 돌아오는 일차적인 반응은 주로 “내가 왜 죄인이야? 기독교 식으로 따져도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간음하거나 거짓증거 하거나 이웃집을 탐한 적이 없고 부모 공경은 당신보다 더 낫는데 왜 날더러 죄인이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국 십계명을 잘 지키라는 뜻 아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십계명 잘 지키면 하나님을 꼭 안 믿어도 되잖아?” 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시길 꼭 누구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만이 살인 죄가 아니라고 한다. 형제를 ‘라가’(바보라는 뜻)라고 욕한 것도 살인이고 우리말 속담에 이르는 대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도 살인이라고 한다. 행동으로 짓는 죄 뿐만 아니라 말로 짓는 것, 마음으로 저지르는 잘못도 죄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은 죄의 성격을 전혀 다른 각도로 규정하셨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산상수훈을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간주 한다. 일부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산상수훈만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가르침이며 불치병을 고치고 오병이어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본인도 십자가에서 부활한 일들은 후대 사람의 조작이거나 한갖 설화로 치부해 버린다. 산상수훈만을 성경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고 다른 성경은 무시하려 든다. 신자 가운데도 산상수훈대로 사는 것만을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자도 많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죄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  단지 죄의 정의를 새롭게 규정한 말씀이었겠는가? 형제더러 ‘라가’라고 욕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있으니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겠는가 말이다.

사촌 계에 나가지 않은 사연

저희 돌아가신 할아버님에게 할머님이 세 분 계셨다. 그 말은 사촌들이 아주 많았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많았는가 하면 대학 들어가서 생전 처음 만나는 사촌도 있었고 평생에 한 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촌도 많았다. 그래서 사촌들끼리 친목계를 조직했지만 그래도 다 모이지 않았다. 저도 처음에는 열심히 참여 했지만 곧 중단했다.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제 신세가 별 볼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모임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가서 폼 잡을 일이 없어진 것이다. 잘 나가는 사촌들 꼴 보기가 싫었다. 사촌들이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랜저 승용차나 60평짜리 아파트가 눈꼴시었다.

정작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사촌들이 싫어지고 시샘이나 내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그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이룬 것이 기껏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라는 후회가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이 싫었다. 정신적으로도 “나라는 인간의 수준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었던가? 나의 인격이 이렇게까지 형편 없었던가”라는 자조(自嘲)가 따라 나왔다.

계 모임에 안 나가는 이유가 기죽기 싫은 것이 물론 90% 이상  차지 했지만 나머지 한 10%정도는 애꿎은 사촌을 괜히 미워하는 나 자신이 싫었던 것이다. 모임에만 가면 마치 쓸개를 씹은 듯한 씁쓰레한  죄책감을 느끼기 싫었던 것이다. 솔직히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구태여 그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하며 고치기 위해 따로 예수님에게 배우고 따를 필요가 없다. 불신자들 말대로 그런 이유라면 꼭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수님이 22절 말미에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히브리어 문법에는 비교급과 최상급의 표현이 따로 없다. 대신에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강조의 뜻을 나타낸다. ‘라가’나 ‘미련한 놈’이나 같은 뜻이다. 예수님이 작심하고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이 단락 앞에 있는 마 5:20식 표현으로 바꾸면 “형제를 바보 등신이라고 욕하는 자나,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은 결단코 지옥 불에 떨어지리라”가 된다.

본문 말씀이 예수님이 살인죄의 범위 안에 형제를 욕하거나 미워하는 것도 포함시켜서 지금껏 있었던 세상의 도덕 교과서 수준을 국민학교 레벨에서 대학교 레벨로 업그레이드(Up-grade) 시킨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인이라는 큰 죄를 지어야만 지옥 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도 몽땅 지옥 불에 떨어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살인죄를 짓지 않았으니 하나님 믿을 필요가 없다고 큰 소리 치는 불신자들 몽땅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강조의 표현을 하다 보니 과장이 지나치셨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촌이나 동창 모임에서 밥 값을 계산하는 사람은 주로 누구인가? 아무래도 세상적으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짜식! 돈 좀 벌었다고 더럽게 생색은 내고 있네. 공부는 제일 못한 주제에 너는 돈 말고는 자랑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  또 제일 부자 친구가 밥 값을 내지 않으면  “밥 한 끼에 도대체 얼마나 한다고 째째하긴 짜식! 저러니 좀팽이 소리나 듣지. 내가 네 정도라면 매일 호텔 부페로 대접하겠다.” 그래서 다 같이 각자 먹은 것 부담하든지 공평하게 나눠 내자고 하면 “더티(Dirty)한 놈! 어디서 더치 플레이(Dutch Play)는 배워서 아마 돈도 저렇게 해서 벌었을 꺼야”라는 생각이 어느 샌가 자신이 통제할 틈도 없이 이미 우리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모임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나 나을 것 없다. 자기가 폼 잡을 것이 없어 나가지 않고선 속으로는 이렇게 밖에 생각 못한다. “사촌들이 한 달에 겨우 한 번 모여 밥 한 끼로 때우고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하면서 무슨 친목이고 사랑이라고 웃기는 녀석들! 나는 그런 시시한 짓 꺼리는 안 해. 내가 뭐 밥 한 끼 살 돈이 없어 안 나가는 줄 알아.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가 어찌 갈 수 있으랴.”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비겁한 놈들 내가 이 꼴이 되니까 아무도 찾아 오지도 않는군. 좋아 너희들 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놈들 두고 보자”라는 섭섭함과 분개를 삭일 수 없다.  그런데 이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다. 어쩌다 정말 마음 씀씀이가 친절한 사촌이 케잌이라도 사 들고 찾아 와도 속으로는 “이왕 찾아 올 것 같으면 현찰로 도와 주지. 기껏 케잌이 뭐야. 우리가 뭐 과자 못 먹어서 환장한 줄 아나?”라는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떡하라는 말인가? 밥을 사줘도 탈 안 사줘도 불평, 찾아 와도 탈 안 찾아 와도 불평이다. 성격이 뒤 틀려 항상 불만이 입에 붙어 다니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다. 죄에 찌들어 있고 사단에 미혹되어 있으며 그 영혼이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지 못해 그리스도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자는 누구나 이렇다. 그 생각과 영혼이 마치 럭비공처럼 언제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며 심지어 자신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알 기 전에는 이 꼴이었는데 어떻게 살인하지 않았으니 예수가 필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쪽 집게 같은 예수님

산상 수훈을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따르는 것만을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 자들의 생각이 무엇인가? “그래 맞아! 바로 이것이야. 예수님이 드디어 100점 짜리 도덕을 가르치셨어. 이것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에게 꼭 맞는 말씀이야. 지금까지 관심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미처 몰랐고 노력을 등한히 한 부분을 예수님은 쪽 집게처럼 집어 내셨어. 나의 의는 그래도 남 부럽지 않게70-80점 정도는 되었지만 항상 뭔가 부족했었는데 이제는 나머지 20-30점도 채워 넣을 수 있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을 이제서야 발견했어. 더 이상 다른 성경은 읽을 필요가 없어. 산상수훈 하나면 충분해.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작심하여 입을 열어 산상수훈을 시작할 때에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왜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였는지 감히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이렇다.  “앞으로 내가 가르치는 말을 너희들은 잘 듣고 따라야 한다. 피 흘리기 까지 싸우며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따르는 사람들이 반드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눠질 것이다. ‘맞습니다. 예수님! 진작 이렇게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제가 70점 밖에 못 받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말씀 하신 그대로 제가 따라서 100점 맞을 자신이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라고 하는 사람과,  ‘맞습니다. 예수님! 저야말로 형제를 바보 등신이라고 욕하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던 자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서로 안부 묻는 것 조차 밉고 싫었습니다. 저야말로 지옥 불에 떨어져 마땅한 놈입니다. 저에게 제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어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성령의 간섭으로 이 뒤틀린 심령과 더럽고 추한 존재를 고쳐 주십시오’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들만이 천국이 저희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왜 본문 23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이라고 하셨을까? 이런 부분을 보면 참 성경이 재미있고 신이 난다. 죄송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쪽집게 같다. 왜 하필 다른 때도 아니고 경건한 마음으로 헌금 봉투를 헌금함에 넣을 때에 꼭 그런 재수 없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을까?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쳐서 새로운 한 주간도 사업이 잘 되고 사고가 생기지 않고 건강하게 지켜 보호해 주시옵소서라고 복을 간구하는 그 순간에 꼭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다. 지난 주 중에 잘 나가는 사촌을 찾아가 돈 좀 꾸어달라고 부탁했다가 매몰차게 거절 당하고 돌아 오는 차 안에서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퍼부었던 것이 떠 올랐다는 말이다. “어이쿠!  그렇게 사촌을 미워 했는데 하나님에게 헌금해도 복을 못 받는 것 아닐까?”  또 그 욕을 들어 먹은 사촌도 마찬가지다. “학교 때 공부 좀 잘한다고 폼 잡고 나를 괄시 한 것 미워 앙갚음 하느라 돈이 있어도 안 빌려 주었는데. 사무실 까지 찾아 온 것을 밥도 한 끼 안 사주고 쫓아 보낸 것은 너무 했나. 그 친구 자존심에 그렇게 굽실 거리는 것을 보면 급하긴 대개 급했던 모양인데  좀 도와 줄 걸 그랬나. 이러다 이번 새로 하는 사업을 하나님이 제대로 복을 안 주시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보다 헌금 봉투는 더 두둑하게 내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신자인 우리가 우리를 생각해도 이 정도로 한심하다.
        
신자가 제단에 드릴 예물

예수님이 본문을 통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이 “애들아 형제를 바보 등신이라고 욕하는 것은 죄야! 그런 짓을 하면 천국 가지 못해” 차원으로만 이해하고 그친다면 참으로 성경을 주일학교 유치부 수준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이것이다.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뜻이 무엇이냐?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간섭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일 텐데 지금 현재 네 꼴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형제를 욕하고 원망들을 일을 해 놓고 무슨 염치로 내 집에 와서 복을 비느냐?”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형제를 라가라고 욕을 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 형제를 바보 등신이라고 하기 이전에 자기가 먼저 미련한 놈이요 라가인 줄 제대로 깨달았는가의 여부다. 자기가 얼마나 부패했으며 썩을 대로 썩은 놈인 줄 아는 자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철저하게 자아가 깨어지고 부숴지는 경험을 했고 그것을 입술로 진심을 담아 고백할 수 있는 자다. 자기 심령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그 영혼의 가난이 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전혀 안 중에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만을 소망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너무 싫었고 미웠으며 정말 천하디 천한 모습이었다. 우리마저 우리를 바로 보기가 두려우며 외면했는데 하나님은 그런 모습조차 사랑하셨다.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바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새 생명을 심어 주셨다. 이제부터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보호하시며 우리의 존재와 심령 안에 사랑과 긍휼로 채우실 분은 오직 주님 뿐이다. 그 주님 앞에 내 삶과 생명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바로 이 마음이 없이 제단에 나오면 어떤 예물을 바치더라도 복을 받을 수 없다. 성전 마당만 밝고 갈 뿐이다.          

예수님이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그것이 도덕적 죄 이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을 찾고 제대로 그 분의 사랑을 안다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자아를 진정으로 발견했다면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지금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 수 있다. 절대 배가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배가 아픈 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만은 방해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역으로 얘기해 하나님과 교제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으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고 안 없어진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권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물을 바치는 뜻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해 하는가?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을 먼저 만들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함에 방해 되는 것들을 먼저 제거하라 그렇지 않고는 사랑을 누릴 수 없다.

쉽게 말해 최근에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 본 적이 언제인가? 라는 말이다. 제대로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형제와 원수인 상태로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우리의 심령이 럭비공처럼 천방지축으로 날 뛰는 꼴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되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 못 견디는 씁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불신자가 스스로의 의를 70-80점으로 자부하지만 나머지 20-30점을 채우기 위해 산상수훈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형제를 욕하거나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르는 자 없다. 저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새로운 차원의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뿐이다. 자신들의 인격과  도덕성에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않았다.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 심령의 실체가 럭비공인줄 전혀 모르고 농구공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신자가 매 주일 아침 마다 제단에 들고 나올 예물은 그래서 오직 하나다. 가난한 심령이다. 그 가난한 심령을 주님의 따뜻한 위로로 가득 채우고 싶은 소망이다. 하나님은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시지 않고 애통해 하는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신다. 나도 내가 싫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참 사랑으로 대해 준 적 없지만 주님만은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심을 안다. 내 구석 모든 것을 아시고 그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있지만, 아니 그 모습 때문에라도 더욱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하는 마음이다. 심지어 지금 제단에 그런 가난한 심령을 드리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또 사촌이 논을 사면 나도 모르게 분명히 배가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는 절대 장담을 못한다. 그래서 더욱 가난해지는 심령이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모습마저 주님은 아시고 계시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것으로는 위로와 힘이 되지 못하지만 주님의 그 사랑만을 붙들고 의지하고자 매 주일 뻔뻔한 얼굴로 나오는 그런 가난한 심령이다. 이것 외에 주님께 드릴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속에 정말 주님 앞에 떳떳하게 내 놓을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구슬아

2010.09.30 17:45:21
*.165.73.38

목사님 말씀은 최고!

낙타무릎

2010.11.03 01:10:54
*.129.121.229

"가난한 심령"
묵상합니다

하태광

2011.02.22 13:17:12
*.32.182.220

교회 문턱넘자마자 변하지 말아야겠군요,,ㅎㅎㅎㅎ

사라의 웃음

2011.06.09 11:23:08
*.169.8.52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저도 절대로 장담을 못합니다.
이런 저를 바라볼 때 마다 스스로에게 마구 화가 나고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하기 짝이 없고...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의 그 긍휼하신 사랑만을 갈구할 수 밖엔 없고 이 허물을 덮어 주십사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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