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63) 5/18/200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분쟁하는 교회
불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에 잘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려 비난을 한다. 그들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 십자가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기독교를 다 같은 종교로서의 가치는 인정하며 그렇게 하는 중요한 근거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다. 상식을 뛰어 넘어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은밀한 죄성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심오한 윤리적 가르침은 심지어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까지 평가를 받는다. 그런 평가를 받는 구절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들라면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본문일 것이다.
그 말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안의 사람들을 신자로서 자격을 검증할 때 적용하는 일차적 기준으로 바로 이 말씀을 동원한다는 뜻이 된다. 영어회화학원에 몇 년을 다닌 학생이 아무리 영어 원서나 신문은 줄줄 잘 읽고 해석해도 정작 미국 사람을 만나선 “Good morning. How are you?"해 놓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고 있으면 영어회화 학원생으로서 자격이 없다. 회화 학원은 회화를 배우는 곳이지 독해를 배우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죽으심으로 몸으로 실천한 종교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교회마다 걸핏하면 싸우고 분란이 나서 쪼개지고 심하면 법정 분쟁까지 간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우고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잘 해도 신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 원수는 커녕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신자끼리 싸우면 교회 다닌 것이 완전 허사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신자 모두는 도매금으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교인 된 것이 부끄러워지고 외부의 비판에 찍 소리도 못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자가 불신자보다 이웃을 더 도와야 하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또 외부의 그런 비평에 뻔뻔스럽게 아무 것도 아닌 양하거나 반발하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또 그런 일로 기독교나 신자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내 스스로 신자 된 신분, 위치, 소속, 자격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무슨 잘못이 있는 양 생각하는 것이다.
신자의 신자 된 것은 절대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이웃을 사랑하거나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행과 구제와 공적과 의로움으로 신자가 되었다면 이 지구상에 구원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더라도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심지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거나 더 나아가 죄악에 빠져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릎만 꿇으면 신자로서 충분하다. 불신자들이 교회는 왜 저리 허구한 날 싸우고 난리를 치는가, 저럴 바에야 차라리 예수를 안 믿고 말지라고 아무리 욕을 퍼부어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신자된 신분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는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단 한 치도 줄어들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인류 구원의 진리는 세상이나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다. 심지어 신자의 신앙상의 열심이나 믿음의 세기에 비례해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자가 유일하게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바울 사도가 고백한 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내 곁에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은 신자만이 갖는 축복이자 특권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독교로서 가치와 의미를 갖게 하는 본질은 아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 자격요건이 원수를 사랑했느냐 못했느냐로만 판단한 것은 잘못이다. 그럼에도 신자 중에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 속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내 신앙 상태가 잘못 되었는 양 정죄하는 것은 이 신자된 자랑과 특권을 놓치는 것이다. 신자 스스로 신자된 것에 자신이 없으며 나아가 외부에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 주는 꼴이 된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 잃은 한 이라크 엄마
금주에 아주 끔찍한 일이 발생되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의 사막지대에서 수천 구의 시체가 무더기로 매장되어 있는 곳이 발견되었다. 후세인에 반대하는 ‘시아파’의 봉기 때에 무차별로 학살하여 묻어둔 곳이었다. 그 시체 중에는 열살 미만의 어린아이도 많이 있었고 그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엄마들의 비참한 모습이 뉴스 화면에 나왔다.
만약에 우리가 그 부모인데 사담 후세인이 눈앞에 보인다면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은커녕 용서라도 되겠는가? 말 그대로 맷돌에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이며 속에 끓어오르는 그 큰 분노를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함부로 단정지어 권면하거나 충고하거나 그렇지 못한다고 무턱대고 비난할 성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셨으니 신자 모두 할 수 있고 당연히 하여야만 하는가? 목사나 장로 체면에 내키지는 않지만 억지로라도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가? 교인들에게 집사나 장로 하시라고 권하면 자꾸만 사양하는 이유가 혹시 원수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는 아닐는지?
이라크의 아이 잃고 통곡하는 엄마가 후세인을 사랑하지 않고 용서할 수 없고 심지어 미워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는가? 도덕적, 혹은 종교적 죄를 범했는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무슨 뜻인가?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도덕과 종교를 초월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때문에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가장 뛰어난 종교로만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야기다. 나아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또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과 삶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측면을 전혀 심각하게 고찰해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본문 43절에서 예수님이 이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 접근하셨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 때까지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은 이 단계에까지만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윤리적 수준이 낮고 영적으로 미숙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상적 사고의 수준으로는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도덕적 잘못도 종교적 죄도 될 수 없다.
그 이라크의 엄마에게 제가 목사라고 해서 찾아가 후세인을 미워하지 마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라고 권면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결과가 될 것인가? 어디서 미친 소리하느냐고 그 자리에서 뺨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맞는 말인데 왜 실천을 하지 않고 또 바른 말 해주는 사람한테 뺨을 때릴 수 있소 라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대라고 해서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시거든 제 뺨을 계속 때려 분을 푸시고 후세인을 사랑하시지요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은 이 땅에 제일 심오한 윤리적 가르침을 주고 기독교를 가장 고급한 종교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무리 뛰어난 종교나 도덕이라도 사람의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해 주려고 오셨다. 인간 심령의 아주 깊숙한 부분, 내면의 근원에는 절대로 세상의 어떤 최고급한 가치나 덕목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다. 세상의 관습, 법률, 제도, 전통, 교육, 훈련만으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그 삶을 진정으로 윤택하고 풍성하게 할 수 없다. 세상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야만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쉽게 말해 지금 예수님은 너희 스스로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이 원수를 사랑하기를 원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이가 무슨 죄가 있어 총 맞아 죽으며, 그 총 쏜 놈을 향한 그 엄마의 애끓는 슬픔과 사무친 분노를 알고 있으며 그런 마음이 든다고 절대 나쁜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정작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이 세상에 서로 미워하고 원수지고 그래서 죽고 죽이는 그런 일들이 제발 안 생겼으면 좋겠다. 대대로 복수에 복수를 불러 오고, 전쟁으로 수 많은 목숨이 아무 가치 없이 죽어가며, 민족과 민족이 서로 저주하는 일들이 너희가 겪어 본 그대로 얼마나 너희에게 고통과 슬픔만을 주었지 의미와 기쁨이 있더냐? 그런 속에 평강과 자유함은 눈을 닦고 찾아 볼래야 없지 않더냐?
그런데 그런 일들을 너희가 만든 법률과 도덕과 관습과 종교로 해결이 되더냐? 인간의 의지로 훈련하고 노력했더니 그 문제가 없어지더냐? 근래 미국에서 국토방위청을 신설하고 후세인을 두들겨 패서 없앴더니 테러가 근절이 되거나 줄어들었느냐 아니면 혹시라도 줄어들 전망이라도 보이더냐? 당장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또 다른 테러가 생기지 않았더냐?
이 땅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한 것이 내가 더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한이 없어지고 정말 온전히 신뢰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참 된 사랑으로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며 섬기게 되길 바란다. 이 땅에 채워지는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는 것이 아담 이후로 한 번도 변하거나 약해지지 않은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반드시 그 뿌리부터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영으로 너희의 영이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도덕과 종교로는 채워질 수 없었던 그 영혼의 빈 공간이 채워져야 하고 그렇지 않고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너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도 너희 안에 거하고 결국은 너희가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늙고 병든 한 노예
신자 불신자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감히 원수를 사랑하려고 덤비는 것이다.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원수는 사랑이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해 보려는 노력이 헛된 것이고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수가 원수인 상태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원수가 원수인 상태에서 빠져 나와야만 비로소 사랑할 건덕지가 생기는 것이다. 원수가 변화되어야만 한다.
내가 아무리 도덕과 종교의 힘으로 노력해보아야 원수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만으로 그쳤다면 그 뜻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거나 원수를 변화시킬 수 있으니 우리에게 전적으로 그 일을 맡기셨을 것이다. 즉 우리더러 혼자서 그 일을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44절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외에 한 마디를 더 붙이셨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나와 원수가 함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안에 거하길 소원한다는 말이다.
한 부자에게 ‘조우’라는 아주 충성 된 종이 있었다. 창세기의 보디발의 집사가 된 요셉처럼 조우도 성실하고 정직해 집안의 모든 일을 주인 대신 맡아 할 정도였다. 하루는 일 손이 더 필요해 노예 시장에 종을 사러 주인과 함께 갔다. 주인이 누굴 고를까 라고 조우에게 물었더니 젊고 건장한 노예 대신에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늙고 병든 노예를 사자고 했다. 왜 튼튼한 노예를 두고 하필 저런 자를 사려하는가라고 주인이 되물었지만 조우는 이 번만은 아무 이유도 묻지 말고 저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주인은 그를 너무 신뢰하기에 그 말 대로 했다.
그 노예를 집에 데리고 온 조우는 계속해 음식과 약을 주며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도 그 늙은 노예는 나을 기미가 없이 항상 누워지내는 형편이었다. 하루는 주인이 일도 못 시키는 늙고 병든 노예를 돈을 주고 산 것만 해도 아까운데 계속 그러고 있으니 손해가 막심한 것 같아 조우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노예를 왜 그리 사랑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조우가 주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이 사람이 내 원수입니다. 어린 저를 납치하여 노예 시장에다 내다 판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보이기만 하면 잡아 죽여야겠다고 밤마다 다짐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원수가 늙고 병들어 똑 같이 노예 신세가 되어 끌려 나와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는 말씀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었습니다. 내 신세도 불쌍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지도 못한 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 오직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만 위해 평생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병든 노예로 전락한 모습을 보니 저 사람이 더 불쌍하고 너무나 안타까워 지금 이렇게 섬기고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이 땅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맛 보았지만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참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완전히 그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신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조우나 그 늙은 노예처럼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죄악이 가득차고 결국 썩어 없어질 이 땅에선 노예 신세라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 같이 연약하고 진토 같은 체질을 갖고 나그네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필요치 않은 자 없다. 또 어떤 형태의 인간 관계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 사이에 개입하지 않으면 그 관계가 절대 진정한 사랑과 신뢰와 위로의 관계로 바뀌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의 빛이 조금이라도 비치면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막고 있는 어떤 가식, 시기, 저주도 무너져 내린다. 그것도 일순간에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꼭 후세인과 김정일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도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가 있지 않는가도 아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는 제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뿐이다.
사실은 모든 인간 관계가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내면의 심층을 파고들면 원수 관계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사이, 부모 자식,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 마저 시기와 질투와 저주와 증오가 시시때때로 끼워 든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그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왜곡된 관계를 내 이익, 자존심, 체면을 세우는데 이용하려 들었던 자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난 후에는 그 모순과 왜곡된 관계가 얼마나 괴롭고 힘들며 안타까운지 알게 된 것이다. 영혼의 큰 짐이고 부담이 되어 고치지 않으면,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로 바뀌어지지 않으면 내 인생과 삶이 너무나 괴롭고 헛 된 것임을 제대로 알게 될 때에 그 때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생이 하나같이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 눌려 있는 노예 같은 신세임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이다. 비로소 원수가 더 이상 원수가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