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7) 3/9/2003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5-26)
매뉴얼과 스냅 사진
미국의 저명한 영성 신학자이자 목사인 유진 피터슨이 시편을 강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시편은 하나님이 주신 매뉴얼이 아니라 한창 경기 중인 선수의 스냅사진과 같다.” 매뉴얼이란 규정된 방법대로 따라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길잡이 안내서인데 반해 스냅 사진은 일상 생활 중에 넘어지고 실수하는 모습들을 꾸밈 없이 찍은 사진이다. 시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온갖 넋두리 신세 타령을 늘어 놓고 불평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정말 신자의 스냅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된다.
이 비유는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산상수훈을 도덕적, 영적 매뉴얼로 오해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따라 살면 축복을 받고 구원을 얻어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천국 가는 길잡이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짓는 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적한 것이다.
본문에서 돈을 빌렸으면 호리라도 남기지 말고 다 갚으라고 하셨다. 호리란 로마 시대의 동전의 가장 적은 단위인 “고드란트”를 번역한 한자 말인데, ‘잔 털’을 뜻하는 ‘호(毫)’와 ‘털 끝’을 뜻하는 ‘리(釐)’를 써서 아주 미세한 양이나 단위를 의미한다. 요즘 식으로 쉽게 말하면 일 센트라도 떼 먹지 말고 뇌물로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반복하면 강조의 뜻이다. 지난 주와 금주의 본문에서 두 번 반복한 것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로 상처를 주든지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 내 쪽의 원인과 잘못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아야 하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즉시 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되 단 일센트의 앙금이라도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지 않게 완전히 깨끗하게 해결하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옥은 지옥을 비유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계명에 지적된 살인, 도적질, 간음 같은 심각한 죄도 아니고 평소 때 알게 모르게 지나칠 수 있는 말로 상처 준 것이나 단돈 일 이십 불 잊어 먹고 갚지 않은 것조차 천국과 지옥의 문제와 결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이 천국 가는 매뉴얼이라는 말인가?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이렇게 한 번 접근해 보자. 불신자들에게 “형제에게 말로 상처 주면 지옥 갑니다. 빚을 일 센트라도 다 갚지 않으면 천국 가지 못합니다. 회개하시고 예수를 믿으시죠?”라고 전도했다고 가정 해보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십 중 팔구는 “지금 지하철에 불이 나고 이라크와 전쟁이 날 판에 기름 값은 갤런에 2불이 넘었고 불경기라 가게에 손님이라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 않는데 무슨 고리타분한 소리 하고 있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천국은 당신 혼자 가시오”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같은 때에 여러 모로 너무 힘드시죠? 그럴수록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면 병도 낫고 사업도 잘 됩니다. 저희 교회에도 출산 후유증으로 일년 넘게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던 여자 집사님을 하나님이 한 방에 낫게 해 주셨고, 최근에 예수 믿은 한 형제는 아침에 출근할 때에 차 속에서 기도하면 오후에 오더를 한 건씩 올립니다”라고 하면 “그 얘기 자세히 해 보시오. 그게 정말이라면 나도 밑져야 본전인데 교회 나가볼까”라고 당장에 솔깃해 할 것이다.
신자마저 전도할 때에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고 성경공부 할 때에 구원과 영생은 배우면서도 별로 실감을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매뉴얼로서 효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에 예수님이 “너희가 단 한 번이라도 말로 형제에게 상처를 주던지, 일 센트라도 빚 진 것 갚지 않으면 절대로 기도 응답이 안 돼”라고 말씀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절대 신자들이 성경을 대영백과 사전과 함께 책장에 고이 모셔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에 산 성경이 방금 어제 산 것처럼 깨끗하게 보관 되지 않고 매일 아침 보고 또 보아 너덜너덜 낡아지고 일년에 한 권씩 새로 사야 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아무리 사소한 죄조차 천국과 지옥에 연결 시켜본들 사람들이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예수님이 신자들을 오직 착하게 살도록 만들양 치면 착한 일 하나마다 구체적으로 경품으로 시상할 약속을 해 놓았다면 이 세상은 아마 벌써 천국으로 변해져 있을런지 모른다.
그럼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 말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왜 꼭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을까? 이화여대 교수 한 분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말기 암 진단이 나와 6개월이라는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할까 생각을 하다 자기 인생을 깨끗하게 정리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본문식으로 하자면 평소 때 말로 남에게 상처 준 것이나 일 센트라도 갚지 않은 것이 있다면, 즉 남을 용서하지 못했거나 남에게 용서 받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매일 초대해서 식사하면서 자기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대학교수쯤 되면 그리 죄를 지은 것도 많지 않았을 텐데 얼마가 걸렸는가 하면 무려 150일이 꼬박 소요되었다고 한다. 생각나는 사람만 불렀으니 생각나지 않은 것도 얼마나 많이 남았을까. 사실 그 150명은 그 사람 인생 전체를 보면 빙산의 일각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 예를 든 것이 아니라 보다 다른 뜻이 있다. 우리 모두 그 분처럼 말기암 선고 받아 몇 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죽음이 당장 눈 앞의 현실로 닥쳤다고 했을 때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무엇을 두려워 할까? 물론 죽음을 무서워 할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인간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놀이 공원의 롤러 코스터를 생전 처음 타보는 사람은 분명히 안전하고 신이 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하지만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죽음을 직면하면 정작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종국에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그 때에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다. 육신적 생명이 끝나더라도 영적 생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렵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가 두렵다. 어차피 당해야 할 죽음보다 어떻게 될지 모를 죄책(罪責)이 더 무섭게 된다.
너의 스냅 사진을 찍어 보라.
지금 예수님께서 일 센트라도 다 갚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까지 말씀하신 뜻이 바로 이것이다. 죽음과 죄에 대한 관점으로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죄 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 하는 사람과 죽음 보다 죄를 더 무서워 하는 사람이다. 평소 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특별히 아무도 보지 않고 혼자 있을 때에 스냅 사진으로 찍으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은 누구라도 반드시 이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한 사람은 죽기 싫어 아둥바둥거리며 사는 자로 불로장생, 무병장수, 무사무탈 만이 삶의 목적이다. 어떻게 하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자기 인생의 모든 초점을 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주신 단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정말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모든 자기 전 존재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두는 자가 있다. 그래서 죄와 더러운 것과 추한 것을 죽음보다 더 싫어하게 된 자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첫번 째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두 번째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형제를 욕하거든 제단에 예물을 바치지 말라고 하셨다. 형제를 욕하면 교회 나와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다. 길가다 일 센트라도 갚지 않은 것이 생각나면 즉시 가서 바로 갚아라고 하셨다. 교회에 좋은 옷 빼 입고 찍은 사진은 실제 너 모습이 아니다는 뜻이다. 평소 때 신자의 경우 특별히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모습을 스냅으로 찍으면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지리적으로 먼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 너가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한 번 찍어 볼까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교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나 찬양 할 때에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24시간 정말 우리가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 그러나 그 뜻이 단순히 수호천사처럼 우리를 인도하고 지키신다는 뜻만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님의 카메라에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스냅 사진으로 찍히고 있다는 말이다. 신자란 매 순간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 있는 자다. 매 순간 결정적 심판과 구원, 멸망과 은혜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죄와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지 않는 순간순간이란 신자에게 없다. 바로 내일 아니 이 순간 네가 죽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그 모양 그대로 살 것인가? 주님은 끊임 없이 우리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지시며 우리를 따라 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신자가 전도 할 때는 심판과 천국을 전해 놓고는 교회 와선 무병장수, 무사무탈만 빌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수님 당신은 혼자 씨부렁거리시오 나는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가겠소”가 아니겠는가? 신자가 올바른 신자 된 증거는 죄를 죽음보다 싫어하는가 일뿐이다.
남에게 절대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불신자들 가운데도 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남에게 말로 상처 주거나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것을 죽기 보다 못 견디는 사람이 있다. 흔히들 남에게 피해 한 번 안 주고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런 사람들과 신자는 그럼 무엇이 다른가? 어떤 것이 달라야 하는가?
솔직히 우리 모두 스스로 자문해 보자. 죄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죄가 좋아서 짓는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물론 우리 모두 스스로 쾌락을 쫓고 죄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죄를 짓는 중에는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할 때가 거의 대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최소한도 죄를 짓고 난 이후는 한 번이라도 상쾌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는가? 쓸개 씹은 듯 씁쓸하고 똥을 밟은 듯 불쾌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남은 것이라곤 상처와 후회와 자기 모멸감 밖에 더 있었던가? 죄가 좋아서 짓는 사람은 없다. 죄가 나쁜 줄 모르는 사람도 없다. 죄란 항상 사람을 꼼짝 못하게 얽어 매는 가공할 힘이었고 우리는 그 앞에서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종이자, 노예였다.
불신자가 평생 남에게 피해 한 번 끼치지 않고 사는 것 잘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대 자기가 도덕적으로 천국 갈 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또 정말 인간으로 참되게 살았느냐를 따질 때에 아무 점수를 못 얻는다.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과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것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그 일에 자기 인생을 걸었느냐에만 점수를 주신다. 남에게 피해 안 준 것만 자랑하는 자는 죄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자기 체면이 깍이고 자존심 상하고 남에게 욕 들어 먹는 것만 죽기 보다 싫어한 것 뿐이다.
신자는 다르다. 달라야 한다. 우리가 더 잘나고 사랑을 많이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또한 저들과 똑 같이 체면과 위신만 붙들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주님이 우리 삶에 찾아 오셨다. 십자가에 드러난 그 사랑의 레이저 광선이 카메라 플래쉬 터지듯이 우리 심령의 깊숙한 곳에 비취자 우리는 변화 되었다. 죄가 싫어진 것이 아니다. 죄는 이전부터 싫었다. 이제 빛이 더 좋아졌다.
우리 영혼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자유롭고 평강이 넘치는가를 순간순간 깨닫고 누리게 되었다. 아무리 내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 속에 상처와 흠집이 많이 남아 있더라도, 시시때때로 죄의 본성이 우리를 삼키려 파도처럼 밀려 올 때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만 꿇으면 그 분은 우리를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으시고 엎질러진 물이라도 다시 담아 주시는 역사와 은혜를 맛 보게 된다. 성경을 읽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힘들고 지친 이웃을 찾아가 손 잡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내려 오는 위로와 능력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아무리 연약한 믿음의 형제 두 세 명이 모인 곳에라도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만 불러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기적을 맛 본다.
또 신자가 이웃을 찾아가 진정으로 섬기는 중에 예수를 몰랐던 영혼이 단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으로 돌아서고 그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과 가치보다 더 소중하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그 의미와 즐거움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죄가 싫어진 것이다. 죄가 단순히 싫어진 것이 아니라 죽기 까지 싫어진 것이다. 빛 속에 들어온 기쁨을 절대 놓칠 수 없기에 목숨이 뺏기더라도 어둠으로 돌아가기 싫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았다는 정도로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자랑이 되기는커녕 아무런 의미와 가치조차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억지로 최고 좋은 옷을 입고 찍은 사진에 불과하지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는 자신조차 자신에게, 정확하게는 자신을 죄의 종으로 얽매고 있는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았던 것이다. 또 이웃 앞에 자기는 선하고 똑똑한 척 자랑하고 거만을 뜰었던 치졸한 인간의 의이며 하나님 앞에 그 만큼 교만한 죄도 더 이상 없다.
십자가 상의 다른 강도
십자가 상에 달린 두 강도 중에 회개하지 않은 흉악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를 부인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주님을 비난했다. 정말 그리스도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 말 없이 달려 죽는 것 보니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 말의 이면의 깊은 뜻은 무엇인가? 그 흉악한 사형수조차 죄를 싫어 했고 자신을 혐오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구원을 소원하고 열망했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실패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한 그 비난도 따지고 보면 “너도 인간을 구원한다고 설쳤지만 결국은 실패 했으니 우리하고 똑 같은 모습으로 지금 처형을 당하고 있지 않느냐? 세상에 구원이 있기는 어디 있어”라는 넋두리다. 자기도 세상에서 참 기쁨과 평강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해 봤지만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 보았을 것이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회개하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 과정 중에 후회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생에 하지 않았던 것이 딱 하나 있다. 하나님을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빼고 구원을 얻으려는 어떤 노력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막 죽기 직전인데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외면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도덕적, 영적 매뉴얼을 주시러 온 것이 아니다. 죄와 악한 세력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 이 짧고 한 번 뿐인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인간들의 어리석고도 추한 모습을 스냅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우리의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을 찍은 그 모든 스냅 사진을 십자가에서 자신과 함께 단 한 장도 남기지 않고 다 불태우셨다..
우리 인생이 십자가를 모르고, 외면하고, 멀리해선 절대 기쁨과 평강이 없다. 기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예수를 모르는 자의 삶은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일 따름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며칠 전 이발을 하려고 근처 슈퍼 마켓 안에 있는 미장원을 찾아 갔다. 차를 주차장에 팍킹하고 돌아 서는데 최고급차를 몰고 온 아주 잘 차려 입은 한국 아줌마 두 분이서 서로 쌍욕을 퍼 부으면서 싸우고 있었다. 지나치면서 귀를 기울여 봤더니 사연인즉 마켓에 가까운 파킹 스페이스 하나를 두고 서로 깜박이를 먼저 넣었다고 주장하며 상대가 새치기 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켓 입구에 가까이 주차해 적게 걸어려는 그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서로 핏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 같이 미국까지 이민 와 외롭게 사는 같은 동포끼리 말이다. 예수님의 영이 그 영혼에 임재해 있지 않는 모든 인간의 삶의 스냅 사진은 기껏 이런 정도밖에 안 된다. 얼마나 초라하고 치사한가?
세상 사람은 하나님은 멀리하면서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다. 신자는 오늘도 비록 또 죄 가운데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다는 안도감 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간다. 하나님 곁에 있어야만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이게 된 것 뿐이다.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죄악과 악령과 상처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덤빌지라도 주님을 붙들고 가기에 한숨을 내려 쉬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사는 길은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길 말고는 없다. 그러면 당연히 죄는 죽기보다 싫어지게 된다. 그 때 비로소 길을 가다가 호리를 갚으러 뛰어 갈 수 있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 찍은 스냅 사진이라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