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0) 3/30/200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국기에 대한 맹세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장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원인을 살펴 보면 재미 있는 것들이 많다. 우선 수다를 떨어 스트레스를 해소 한다. 또 여자들은 조금만 아파도 호들갑을 떨며 제 때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는데 반해 남자들은 병원은 커녕 말도 않고 혼자 끙끙거린다. 남자들이 꼭 성격이 곰 같이 미련해서가 아니다. 가정을 책임지다 보니 앓아 누워버리면 큰일이다 싶어 그런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아내들은 남편들을 진정으로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다른 흥미 있는 이유는 매월 생리하면서 피를 쏟는 것이 새 피를 형성시키는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만든다고 한다. 간혹 일부 잘못된 교단에서 성경에 생명은 피에 있으니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해서 신자더러 헌혈을 금지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 말씀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살인을 하지 말라는 뜻인데 헌혈은 오히려 남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므로 권장해야 하고 신자가 앞장서 본을 보여야 한다. 나아가 생리가 여자들 장수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듯이 헌혈은 보약이다.
이와 동일한 잘못이 오늘의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범해지고 있다.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니까 국기에 대한 맹세나 법원의 증인 선서도 거부하게끔 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듯이 인간 사회의 지도자를 절대 부인하지 않았다. 성경은 분명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롬13:1)고 했다. 또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벧전2:13)하라고 하셨다. 법원에서 하는 선서란 십계명의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를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뜻이므로 신자라면 당연히 자원해서 해야 하고 선서를 했으면 진실되게 증언해야 한다.
교회 장로의 맹세
예수님이 맹세를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율법에 의하면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2) 거짓 맹세 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실된 맹세만 하라는 것이며 한 번 한 맹세는 반드시 지키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꼭 지켜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을 여호와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꼭 엄격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맹세란 어떤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보증의 뜻으로 약속 위에 하는 또 다른 약속이다. 그리고 보증을 세울 때는 항상 약속의 내용보다 질적, 양적으로 큰 것을 걸어야 한다. 백만원을 빌리면 수 백 만원짜리 보석이나 자동차를 담보로 해야지 수 십 만원짜리 시계나 자전거를 담보 물로 잡는 바보는 없고 또 그렇게 해선 담보물로서 아무런 효능이 없다. 그래서 맹세는 보통 어떤 식으로 행해지는가? 약속을 어기면 내 성을 간다든지, 평생 당신의 종이 되겠다든지,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 계집애라 불러도 좋다 라고 한다. 돈 백 만원에 내 인생이 살고 죽는 것이 아니며 나라는 인격과 존재를 걸고 꼭 갚겠다는 뜻이다.
약속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간이 갖다 걸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거명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또 못 지킬 때 혹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벌이 두렵기도 해, 하나님 다음으로 센 것들을 맹세의 보증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34-36절에 지적한 대로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마태복음 23장에 더 자세히 나오지만 성전, 혹은 성전 제단 같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들에 걸고 맹세를 했다. 혹시 실수하여 못 지킬지 몰라 하나님을 빼고 맹세했던 것이 차츰 처음부터 아예 지키지 않을 속 셈으로 동원할 수 있는 큰 것은 가능한 다 동원하여 거짓 맹세를 남발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머리 모두가 문자적으로만 여호와란 단어와 다르지,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요, 머리카락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맹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지적한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문구를 조작해도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한 꼴 밖에 안 된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맹세할 때에 어떻게 하는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꼭 지키겠다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신앙적 명칭만 사용 안 했다는 것 뿐이지 사실은 이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자에게 맹세한 것이다. 그들이라고 아무 의미 없는 텅 빈 공간인 푸른 하늘에다 대고 맹세하지는 않는다. 하늘을 두 쪽을 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맹세하는 것은 당초부터 지킬 마음은 없고 어떻게 하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나쁜 심보가 아니냐,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맹세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해서 금한 것이 아니다. 맹세를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말 진실 되게 약속을 이행하고 서로 믿는 사이라면 구태여 맹세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약속만 잘 지키면 된다.
알기 쉽게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어디 가서 돈을 꿀 때에 교회 장로라는 직분을 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명색이 그래도 내가 교회 장로인데 돈을 떼 먹겠습니까? 안심하고 빌려 주시면 장로의 직분을 걸고 꼭 갚겠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아니라 장로의 직분을 걸었지만 불신자에겐 하나님에게 맹세한 것으로 들린다. 장로가 하나님을 걸고 맹세한 것이니 믿고 빌려주어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끔 유도한 것이다. 그래서 37절에서 그런 맹세는 악에서 좇아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돈을 빌려 주고 받는 데는 장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에서 장로를 세울 때에 돈 잘 갚는 실력으로 보고 세운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왜 꼭 돈 빌릴 때만 장로임을 내세우는가? 돈 거래 할 때는 상대의 신용도, 성실성, 돈을 버는 능력, 사업성과 전망을 보고 빌려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 돈의 몇 배 되는 담보물을 잡고 빌려 주어야 한다. 같은 교회 성도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믿고 빌려 주어야지 식의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37절에 옳다, 아니다만 하라고 한 말을 시쳇말로 바꾸면 예스, 노를 분명히 하라는 뜻이지 않는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돈 거래는 더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담보 없이 빌려 준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 떼일 때도 내가 당신에게 특별하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겠소 라는 간접적인 의사표시다. 성도끼리 담보 없이 빌려 주었으면 도와 준다고 생각하고 빌려 주어야 하고 설사 떼이더라도 원망을 말아야 한다. 율법에 의하면 성도들끼리 돈 놀이는 아예 못하게 되어 있다.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된다. 장로 직분을 들먹이며 빌려서 떼먹은 사람이 물론 더 나쁘지만 그것만 믿고 빌려 준 사람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장로가 평신도에게, 신자가 불신자에게 돈을 빌릴 때 왜 이런 식으로 당당하지 못하는가?. “장로와 평신도 내지 신자와 불신자라는 관계를 떠나서 이야기 합시다. 혹시라도 제가 교회 장로나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믿고 빌려 준다면 저는 안 받겠습니다. 저를 그 동안 죽 지켜 보았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시고 그 동안의 제 신용도와 이 사업의 사업성만 보고 빌려 주십시오.” 거기에 더 보태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겠습니다만 사람 일이란 아무도 그 앞 날을 장담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장로보고 빌려 주었더니 떼였다는 말 만은 피차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 받을까 두렵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돈을 빌리지도 않고 이 사업을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칫 이것도 오바 액션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니 이런 저런 이야기 아예 하지 말고 가장 좋은 것은 충분한 담보 물건을 제공하면 된다. 담보물을 동원할 재간이 도저히 없으면 평상시에 신용을 잘 닦아 점수가 750점 이상 되는 크레딧 리포트를 제출하면 된다.
옷 로비 사건의 해프닝
모든 인간이 평생을 가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딱 하나 있다. 최고 권력을 쥔 대통령, 돈이 제일 많은 재벌회장, 지성이 가장 앞선 대학총장이라도 할 수 없다. 아무도 할 수 없기에 누구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소원은 하되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란 자기의 앞 날을 모른다는 것이다. 일년, 한 달, 하루, 한 시간 아니 5분 앞을 알 수 없다. 단 5분 앞만 알아도 성공하지 않을 인생이 없다. 장로가 만에 하나 안 갚을 수도 있다는 말이 처음부터 안 갚을 작정을 한 것이 아니다. 장로쯤 되는 신앙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그 분만이 치리 하신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예수님이36절에 머리 터럭을 우리가 하나라도 검게나 희게 할 수 없으므로 함부로 장로든, 하나님의 이름이든, 땅이든 무슨 이름이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는 꼭 지키겠다는 뜻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 질 수 있다는 보증의 말인데 5분 앞도 못 내다보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그 열심과 성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맹세를 안 지켜도 된다고 가르칠 나쁜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험하고 고달픈 인생살이를 살다 보면 전혀 예상 밖의 변수들이 작용해 자기 의도와 달리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처음에는 아마도 어떤 유대인이 율법을 해석해 주는 바리새인을 찾아와 이런 식으로 털어 놓고 의논했을 것이다. “맹세는 했는데 지금 졸지에 사기도 당하고 요즘 전쟁과 불경기가 겹쳐 벌이가 없어서 돈을 도저히 못 갚을 지경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들이 아파 병원비로도 숱하게 나가 당장 아파트 렌트비는커녕 끼니마저 못 이을 지경입니다. 이 판국에 사람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야지 빚부터 갚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돈이 원수지 사람이 원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맹세 했다고 꼭 제 때 갚아야 됩니까?”
바리새인이 그 형편을 알아 보니 사정이 딱한 것이 사실이었다. 맹세를 안 지켜도 된다고 할 수 없고 또 굶어 죽더라도 빚부터 갚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넌지시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으로 맹세했습니까? 아무리 형편이 딱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논하러 간 사람이 아마 “기억이 나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여호와라고 하나님 이름을 직접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하늘이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얼버무렸을 것이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이번 만은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치고 나중에라도 경기가 나아지면 열심히 돈을 모아 꼭 갚도록 하시요”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바리새인이나 빚진 자를 두둔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너무 사정이 딱한 자에 한해 예외를 허용하자는 선한 의도로 일단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율법에 약간의 융통성을 부여하자, 곧 바로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려 그것을 역이용 했다. 그만큼 인간이 영악하고 치사하고 비겁하다. 왜 예수님이 이혼 증서에 관한 이야기 다음에 이 맹세에 관한 말씀을 하셨겠는가? 여자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반드시 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을 핑계거리만 생기면 멋대로 이혼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듯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만은 꼭 지키라고 한 것이 역으로 거짓 맹세하는데 다른 이름을 마음 놓고 사용한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가 계획하는 목적을 이루고 이익을 챙기고 자기 혼자 살 길을 추구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속이는 데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그것도 명색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말이다.
몇 년 전 한국의 옷 로비 사건 때의 해프닝을 기억하는가? 4명의 고관부인과 재벌회장 사모님이 국회의 청문회에 불려 나왔는데 하나 같이 교회 집사 내지 권사님이었다. 그래서 청문회 시작할 때에 성경에 손을 얹고 거짓 증언하지 않기로 맹세까지 시켰는데 4명의 증언이 모두 틀려 전 국민이 헷갈린 적이 있다. 아마 당시에 하나님도 헷갈렸을 것이다. 진실을 몰라서 헷갈린 것이 아니라, 아니 어떻게 해서 저 사람들이 서울에서 내노라 하는 큰 교회의 집사나 권사가 되었지? 집사는커녕 신자가 된 것도 신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천국의 비서실장에게 “한국어로 인쇄 된 성경에 하자가 있나. 예수의 십자가의 이야기가 거기엔 빠져있나? 생명책을 다시 가져 와보라. 저 네 명의 여자의 이름이 올라 가있는가 확인 해보자. 나도 슬슬 치매 증세가 오나?”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신자가 신자 된 증명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 꼭 성경에 손을 얹고 “자 찬양하고 기도합시다”라고 해야만 신자가 된 증명이 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해야만 신자가 신자 된 표시가 나타나는가? 남들이 우리의 무엇을 보고 신자라고 인정해 주는가? 또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내가 신자라는 것을 어떤 것으로 주지 시키고 인식시키는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어느 교회 신자라고 명찰을 써 붙이거나 명함을 찍어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말로 신자라고 외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신자가 신자 됨을 평소에 사는 모습 외의 그 어느 것으로라도 증거 하려 들면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 쪽에서 예수의 ‘예’ 자도 꺼내기 전에 벌써 상대가 “혹시 예수 믿는 사람 아니세요? 교회 다니는 사람 맞지요?”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장로가 돈을 빌릴 때에 왜 꼭 장로 직분을 들먹거리는가? 자기가 신자인 것에 자신과 당당함이 없어서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그 분의 거룩과 의로 내 삶이 바뀌어진 부분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생명력을 나눠 받아서 자기의 인생을 통해 빛이 남에게 비춰나가지 않는다. 자기 삶과 존재로서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기껏 자랑하는 것이 “제가 그래도 한 천명 나오는 교회에 세 명밖에 없는 장로 중에 한 사람입니다”이다.
신자가 세상 앞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본문식으로 하자면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태여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진실성과 성실성이다. 돈 빌리러 가면 상대가 먼저 “우리 사이에 맹세는 무슨 맹세를 합니까? 담보도 안 걸어도 됩니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금 한국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크게 자랑 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고 나아가 부끄러운 자리에 까지 이른 가장 중요한 이유 한가지를 들라면 신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믿음과 생활이 따로 놀고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의 향기가 베어 나오지 않는다. 나아가 예수 믿는 신자라는 것이 자칫 말만 앞서는 사기꾼이라는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있다.
물론 신자도 사람인지라 5분 앞을 못 내다 보기는 마찬가지며 또 죄의 잔재가 남아 고의로 그럴 수 있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정말 본의 아니게 약속을 펑크 낼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진실은 통하는 법이다. 신자라면 IMF같은 불가항력이 닥치더라도 그 동안에 한 달도 빠지지 않고 하루도 어기지 않고 꼬박꼬박 이자와 함께 갚는 그 빈틈 없는 성실성 때문에 빚쟁이가 먼저 찾아 와서 “힘들지요? 당분간 이자만 받든지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원리금 갚지 않아도 된다”라고 유예해 줄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작 따로 있다.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신자로서의 성실성, 결심과 헌신과 노력은 높이 사야 한다. 그러나 그런 차원으로만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상식이자 기본이다. 신자는 그런 일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일이 터지고 졸지에 사기를 당하고 설상가상의 불행이 닥친다 해도 반드시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그 분만의 은혜와 권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무리 사방이 암흑으로 갇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의 빛은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가릴 수 없다. 자신의 현 상태로는 약속을 지킬 일이 캄캄하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신자가 한 맹세가 헛되고 거짓되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신자더러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 단순하게 도덕적 의무감이나 종교적 형식의 경건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순종하여 온전히 그 분의 인도와 보호에 자신의 전 인생을 100% 내어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말이다. 너희가 너희 능력과 성실성과 노력과 열심만으로 맹세하거나 맹세한 것을 지키려 하지 말라. 본문 3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거룩과 의와 생명과 진리와 빛에는 온전히 ‘옳다, 옳다’만 하고 사단과 죄악과 불의와 죽음과 거짓과 어둠에는 생명을 걸고 ‘아니라, 아니라’만 한다면, 나머지 모두는 하나님 당신이 책임져 준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세상에서 조롱 당하고 멸시 받는 것을 하나님 당신이 좌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보다 자기 자녀들의 이름이 세상에서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신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 당신이 지키시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빼앗기지 않는다. 신자가 이 믿음으로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서 있고 그래서 ‘예스’ 해야 할 때 분명히 ‘예스’ 하고 ‘노’ 할 때 정확하게 ‘노’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의 본질이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도무지 맹세하지 않아도 되고 맹세할 이유가 없다. 신자란 인간 사회에 쳐진 이웃과 이웃 사이의 담을 주님의 사랑으로 허물고 이 땅에 참 신뢰와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실천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다. 말하자면 맹세가 필요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만이 그 일을 하도록 요구 되고 있고 신자는 그 일에 전 존재와 전 인생을 걸 때만이 신자가 신자 된 증거를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그럼에도 현재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라. 유엔 결의안을 지키겠다고 알라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 후세인은 12년을 요리조리 빠져 나갔고, 머리 터럭 하나 인간의 힘으로 희게 할 수 없음에도 부시는 여호와의 이름에 맹세하고 이라크를 희게 해 주겠다고 덤비고 있다. 이 천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와 지금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헛 맹세를 남발하고 있다. 알라를 아는 백성이나 여호와를 아는 백성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확신하지 못하면 절대 인간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명이 발달해도 가망이 없다.
고린도 후서 1:19,20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왜 예수에게는 예만 되고 아니오가 되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였을 때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말이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도 자기들의 사역을 주님에게만 온전히 믿고 맡겼을 때 주님이 이루어 주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의 인생도 주님의 그 권능과 은혜에 온전히 내어 드리기를 소원한다면 똑 같이 아니오는 없고 오직 예만이 역사하는 인생이 된다. 맹세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하나님이 이뤄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노' 하는 그런 모습의 신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그런 신자가 되길....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