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5) 6/8/200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의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신자더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적 훈계의 차원으로 권면하시지 않았다. 불신자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신자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안 하는 문제를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48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다. 신자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하심이 드러내 보여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까지 이르라는 뜻이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믿어 변화 되어도 너무 무리한 요구 같지 않은가? 우리가 하나님의 수준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그것도 온전히 말이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닌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겪는 신앙상의 실패는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뜨겁게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고, 매일 성실하게 말씀을 보는데도 사업이 부도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도 장로로 뽑히지 않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사람마다 사정이 각기 다른 연유지 누구나 겪는 실패는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장로가 되고 기도해서 다 암이 나으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신자라면 하나 같이 예외 없이 누구나 겪는 영적 실패는 바로 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 가는 것이다. 장로나 목사가 돈과 여자 문제에 어쩌면 저렇게 어이 없이 쉽게 넘어지는가 싶게 순식간에 타락하는 모습을 주위에서 종종 본다. 그런 외형적인 대형 스캔달은 제쳐두고 모든 평신도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갈등으로 겪는 괴로움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교회 다닌 지 얼마나 되는 데 아직도 아무 것도 아닌 이런 문제에 이다지도 쉽게 넘어지는가? 왜 단 돈 백불에 내 인격이 이렇게 순식간에 형편없이 비겁하고 치사하게 망가지는가? 정말 별 것 아닌 그것도 같은 교회 식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밤을 꼬박 새우며 끙끙 앓아야만 하는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그저 안절부절 불안해 하는가? 그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았던 것은 왜 힘 한 번 못쓰며 도대체 눈 닦고 찾아 볼래야 어느 구석에 쳐 박혔는지 보이지도 않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고민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하나님의 온전한 수준에 도달하라고 하신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실패했지만 이제 이 말씀을 배웠으니 차후 10년, 20년 뒤에는 원수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수준에 이를 자신이 있는가? 죽기 직전까지라도 성공하겠는가? 솔직히 하나님 앞에 불려 가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자신 있게 “예수님의 말씀 대로 하나님의 온전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겠는가? 그 때 가서도 여전히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이겠는가?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승전보고의 대표기도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도저히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셨는가? 목표를 크게 하면 우리가 그 반의 반 수준이라도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셨는가? 아니 목사가 지금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도 그렇게 살아라고 권면은 못할 망정 왜 시작부터 기 죽이는 말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여러분의 기를 꺾거나 야단 치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하라고 권하면 아예 자기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양 제쳐두는 경향이 있다. 먼 장래에나 혹시 가능한 일이겠거니 친다. 지금 현재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는 신앙 생활의 모든 초점을 차라리 다른 데다 둔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이런 말씀만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다. 성도들 집집 마다 근사한 액자로 응접실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큼지막하게 걸어 놓는다.
대신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문제는 어떻게 다루는가 하면, 매 주일날마다 교회 나와 기도하면서 “지난 한 주간도 이웃을 먼저 사랑하지 못하고 원수를 용서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는 간단한 한 마디의 사과로 때운다. 목사로서 제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제발 우리 교회만이라도 주일 대표기도에 이런 기도가 좀 나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난 한 주간도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서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비록 저희들은 미약하지만 주님의 권세가 함께 해줌으로써 넉넉히 승리하게 해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왜 모든 신자들의 주일 날 기도가 세상에서의 패전 보고뿐인지 참 안타깝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같은 보고는 왜 없는가? 주일날 대표기도는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승전 보고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적 패배의 원인
말 그대로 매주 대표기도로 대표되는 신자들의 영적 실패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성경의 권면의 말씀을 듣는 신자들이 너무 표면적이고도 문자적인 이해와 적용으로만 그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신자라면 당연히 그대로 따라야 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면 하나님이 좋아 하실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정도의 이해와 적용만으로는 평생 가도 절대 온전히 실천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실생활에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제대로 성공한 적이 있는가?
부모가 자식더러 공부 열심히 해서 어느 일류 대학 무슨 과에 들어가고 졸업 후에는 무슨 직업을 가지라고 권했다 치자. 그 말을 들은 자녀가 자기 적성을 분석도 하지 않고 앞 날의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이 무조건 부모가 말했으니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그 공부가 얼마나 잘 될 것이며 나중에 그 분야에서 제대로 성공할 수 있겠는가?
제 친구 중 하나가 일류회사에서 대우 잘 받고 일하고 있다가 나이 사십이 넘어 갑자기 수의과 대학에 편입학 했다. 과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지만 그 나이에 공부는 항상 일, 이등을 했다. 어려서부터 개 같은 애완 동물을 너무 좋아 했기에 수의사가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늦깎이 공부지만 할수록 재미있고 신 나니 성적이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문제도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당연히 그대로 따라야 하며 또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자 자신의 유익과 축복임을 확신하고 정말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도달하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이 무리하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그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면 온전하신 하나님처럼 너희도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너희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온전해지지도 않고 네 삶은 실패로 끝나고 네 인격이 망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신나고 재미있으며 또 신나고 재미 있어야 원수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시원 섭섭한 복수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누가 괴로울 것 같은가? 원수가 괴로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남을 핍박하는 자들은 발 뻗고 신나게 자고 있지만 갈아 마셔야 하겠다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자가 더 괴로운 법이다. 조금만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게 되면 상처 준 사람은 통쾌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자는 밤 새 끙끙 앓으며 잠을 못 잔다. 참다 못해 오밤 중에라도 찾아가 뺨을 왕복으로 서너 차례 올려야만 속이 시원하고 몇 년 먹은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시원함이 절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뺨을 때리고 신나게 욕을 퍼부을 때 잠시 잠간 그 때뿐이다. 원수를 시원하게 갚고 돌아 왔는데도 또 다시 괴롭기 시작하는데 그 괴로움의 종류가 다르다. 원수로부터 발생되는 괴로움이 아니다.
본문 44절에 의하면 예수님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분명히 잘못을 저질러 서로 원수가 되게끔 원인을 제공한 것은 상대 편이다. 자기가 당한 만큼만 정당하게 갚는다면 도덕적 죄가 아니다. 옳고 그른 것 만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정의를 실현한 셈이다. 원수를 갚고 왔으면 옳은 일을 하고 왔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복수하기 전에는 ‘끙끙’ 앓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 이것도 두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씁쓸’해진다. 무엇에 대해 씁쓸해지는가? 자기 자신이다. 분명한 윤리적 죄책감을 꼬집어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제는 도저히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다.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시원섭섭하다는 것이 시원과 섭섭의 양쪽을 다 만족시키는 표현이 아니다. 제대로 시원하게도 안 되고 완전히 섭섭해 비통에 빠지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양쪽 다 만족이 안 되어 모자란 상태로 남아 있다. 지저분한 예를 들어 안됐지만 꼭 화장실 갔다가 변을 보면 시원해지지만 뒤를 닦지 않았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이다.
모든 복수는 필연적으로 또 다시 내 인생에 도저히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씁쓸한 자국과 흔적을 남기게 된 것에 대한 후회만 넘치게 만든다. 그 후회는 새벽 안개처럼 우리의 심령을 소리 소문 없이 감싸버린다. 나아가 색다른 놀라움을 동반한다. 나에게도 이런 모질고도 악한 구석이 숨어 있었는가 하고 자신에게 놀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라는 인간이 싫어지고 심지어 자신의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 오는 더럽고 추한 냄새마저 맡게 된다. 복수하고 나서 정말 신나고 재미있어서 앞으로 억울한 일이 생길 때 마다 밤마다 상대를 찾아가 싫컷 두들겨 패야지 라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성령의 씻음
개인적인 경우를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불신자 시절에 제 인생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린 사람이 있었다. 말하자면 저에게 원수였던 사람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 사람보다 내 쪽에 잘못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절감하고 회개하였고 또 그런 모든 잘못 가운데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셔서 제 인생을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한참 이후까지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용서도 하지 못했다. 그런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그 원수를 위한 기도가 저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왔다는 말은 기도를 처음 시작한 후 또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 사람을 위해 내가 기도해야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런 기도가 나왔다는 뜻이다. 기도를 하다 보면 성령이 강권해서 시키는 기도가 절로 나오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날 새벽 그 원수를 위한 기도를 처음으로 저도 모르게 하게 되어 저 자신 놀라며 계속 기도하는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밉고 싫었던 마음이 씻은 듯 없어졌다. 용서하고 안 하고 할 겨를도 없었고 사랑의 단계까지는 근처도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완전히 없어지고 단지 불쌍하다는 마음만 들었다. 그 사람이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만 나왔다.
그런 기도를 하고 나니 근 10년이 넘게 저를 묶고 있었던 영혼의 멍에가 자동으로 벗겨졌다. 저의 교양, 지성, 도덕성, 목사라는 종교성 때문에 겉으론 내색을 안 했지만 그 사람은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제 영혼의 짐이자 부담이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온갖 죄 된 잡생각들, 시기와 원한과 분노와 저주는 목사라도 없앨 수 없었으며 아무 통제력도 발휘하지 못 했었는데 거짓말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사람으로 인해 나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불쌍해 생각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 해 주고 있다. 제 마음 속에 항상 차지하고 있던 먹구름이 걷어지고 맑고 푸른 하늘 같은 평강과 자유함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아무 소용 없는 도덕과 종교
세상의 인생살이에 옳고 그른 것만으로는 적용이 안 되는 영역이 있다. 도덕과 율법과 종교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영혼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직접 뚫고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의 영혼에 오랜 기간 쌓여진 어둡고도 성처럼 견고해진 상처, 분노, 열등감, 우울증, 불안 등이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 그 한 단적인 예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다. 상식적인 정상 인간치고 일부러 원수를 만들어 밤새 끙끙 앓기를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이 자꾸만 앙금이 쌓여가면서 결국은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섰고 그 균열이 어느 새 심연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에서 생긴 틈새는 세상의 것으로 절대 메울 수 없다. 하나님이 불어주시는 성령의 불과 바람만이 그 간극을 없앨 수 있다.
복수하기 이전에는 상대에 대한 원한으로 얼마 동안만 끙끙 앓거나 시간이 오래 가면 잊거나 약해지기도 하지만 복수하고 나선 자기 자신을 향해 생기는 모멸감이 평생을 간다. 복수를 해도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 원수를 갚지 않아도 깨끗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방법은 원수와 화해하고 사랑하는 하나 뿐이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렇다거나 도덕적으로 선한 일이니 그렇게 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참 평강과 자유를 맛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란 원래부터 그렇게 해야만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존재로 만드셨다. 독립된 한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 교제할 때에 그 사이에 가식, 위선, 자존심, 체면, 이기심, , 시기, 질투, 증오, 저주 등 사랑 이외의 것이 작용하면 그 관계는 절대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없다. 그것도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 가능하다. 또 아무리 세상의 것들로 이미 가득 채워진 가식적인 관계라 해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조금이라도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면 순식간에 그 관계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관계로 변한다. 둘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 동역자, 연인으로 바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바로 그 형상을 닮아 창조된 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본성이 인간 속에 이미 심어져 있었는데 아담의 원죄로 인한 사단의 방해 때문에 그 본성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해 사람들 사이에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었다. 그 본성이 제 모습을 회복하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것을 심어준 분이 나설 수밖에 없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존재로 바꿔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우리를 온전히 사랑해주셔야 했다.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님의 간섭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그 사랑을 우리의 영혼 속에 부어 넣어주셨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인간끼리의 사랑도 온전케 하셨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48절에서 하나님이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해지라고 하신 것이다.
누가 가장 성공한 인생인가?
사람이 이 땅에서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인가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인가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돈과 권력과 명예인가? 무병장수한 삶인가? 신자라면 성전 건축 헌금을 제일 많이 했거나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에 그 성공여부가 달린 것일까? 아니다.
평생 동안에 진정한 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가 이다. 또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부어주는가 이다. 참 사랑을 서로 주고 받는 관계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낸 자가 가장 성공한 인생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돈이 적거나, 건강이 약하거나, 명예가 높아지지 않아서도 아니다. 자기를 찾아 주고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괴로워 못 견딘다. 사랑을 주고 받을 사람을 만들지 못한 사람만큼 실패한 인생은 없다.
얼마 전 저희 집에 여행 중에 방문한 아주 신실한 여자 집사님을 제가 충고 반 농담 반으로 좀 야단친 적이 있다. 애지중지 아끼는 애완견을 이웃 집사님에게 맡겨 두고 여행을 떠나 왔는데 계속해서 그 개가 걱정이 되어 안달하는 것이다. “신자라면 주위에 정말 어렵고 힘들어 섬겨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개한테 그렇게 신경 쓰느냐? 애완견도 인간에게 필요해서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사회 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아무도 찾아 오는 사람이 없는 노인들이나 개와 함께 지내는 것이지 아직도 건장한 나이에는 그러면 안 된다. 주위를 둘러 보아라. 기도해 주고 섬겨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했다.
최근에 돌아가는 세상 풍조를 한 번이라도 유심히 바라 보라. 세상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만들고 있다. 이제는 만들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넘쳐 나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기, 갈등, 불신, 배반, 복수 들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오로지 자기 자식에게만 목을 매달고 모든 정을 다 쏟아 붓고 있지 않는가? 그나마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곤 자기 자식만 남았다. 그런데 그 자식 사랑도 속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쏟아 부은 사랑이 어쩌면 허사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세상에 갈등과 균열이 깊어지고 원수 사이가 늘어났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 사랑에 대한 갈증과 소원과 열심은 더 많아지는데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돌아 온 것은 배반 뿐이었다는 뜻이 된다. 원수란 서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자주 만나는 관계에서 생기지 평범한 일상적 사이에서는 원수가 생기지 않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참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
지금껏 각자 살아 온 햇수는 서로 다르겠지만 여러분의 인생 장부에 가위 표를 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있는 만큼 여러분이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의미다. 원수가 원수인 채로 남아 있어선 우리 삶이 괴롭고 힘들다. 절대 신나고 재미있지 못하다. 잘못하고 원인 제공한 측은 전적으로 상대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쪽에서 먼저 그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 속의 온전해져야 할 영혼이 눌린다. 참 인간으로서 반드시 발휘되어야 할 사랑의 본성이 숨겨진다. 하나님의 형상에로 회복이 더디게 된다. 삶이 재미가 없고 신이 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도덕적, 종교적 훈련으로는 절대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관계가 비틀어진 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내 마음과 영혼의 짐이 되고 내 삶의 고통이 되는지 절실하게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그 상대는 계속해서 나와의 관계를 세상의 온갖 쾌락, 이해 관계, 감정, 심지어 도덕과 종교로 판단하고 대응하여 바로 잡으려 애를 쓸지라도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만 그를 대하는 것이다. 신자가 거룩해지고 신령해진 탓이 아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성령의 권능과 은총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 사이를 온전케 해 달라고 쉬지 않고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역사 하심에만 의지하여 마지막 순간 즉 원수가 사랑으로 변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 때 우리 인생이 정말 신나고 재미 있을 뿐 아니라 참 된 성공을 맛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