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2 (주기도문 강해 4) 8/17/200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가?
본문 마 6:9절을 세 번째 살펴보는데 여러 분은 이 구절을 듣거나 외우면 어떤 마음의 감동과 영혼의 울림이 있는가? 그저 그냥 덤덤하신지? 주기도문은 형식적, 기계적, 습관적으로 외우는 주문(呪文)이 아니다. 처음 이 공부를 시작할 때에 정말 주기도문의 구절 하나 하나가 살아 역사하여 그 의미와 감동이 우리 심령에 100% 이상 다가와야 한다고 했다. 주기도문을 조용히 묵상하는 자체로 가슴이 떨리며 감사와 찬미의 눈물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속에서부터 전 존재와 영혼이 끌어 올려져 나와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라서 특별한 의미와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은100% 완벽한 모범적 기도임은 틀림 없으나 여전히 하나의 기도이다. 그 말은 우리의 모든 기도가 다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에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시작한다면 ‘사랑’, ‘은혜’, ‘풍성’, ‘하나님’, ‘아버지’ 각 단어 하나 하나가 갖는 뜻이 분명한 산 체험의 고백이자 증거여야 한다. 사전에 나오는 누구나 아는 정의(Definition)로서 사랑이나, 교리적 설명으로 듣는 은혜의 개념 만으로선 부족하다. 기도자 자신 만이 알고 느끼는 자기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졌던 감격과 의미가 생생하게 묻어 나와야 한다.
마치 연인의 창 문 아래에서 밤새 세레나데를 부르는 그 애틋한 심정보다 훨씬 더 강한 애정과,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에 살려달라고 고함 지르는 것 이상의 갈급함이 기도 속에 베어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와 권능을 덧입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 주기도문의 첫 구절을 단어 하나씩 그 깊은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 중으로 두 번에 걸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아 보았다. 오늘은 “우리 아버지여”에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자.
분명치 않는 한국 말
세상의 모든 언어는 그 민족의 특성을 반영한다. 한국인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다. 그러다 보니 말도 정서적 표현은 풍부한데 반해 비논리적이고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표현이 많다. 전화 온 것을 전해 주는 사람이 “김사장인가 박사장인가 하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는데 전화 다시 한다고 하든가 해달라고 하든가 했습니다” 고 하면 “응! 알았어”하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소유격, 관사, 단 복수 심지어 시제 개념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단적인 예가 본문의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아버지이지 내 아버지라고 하는 법은 없고 아예 그런 표현 자체가 어색하게 들린다. 대가족 제도 때에 형제들이 여럿 있을 때의 습관이 남아 있거나 아니면 서로 끼리끼리 모여 교제하기를 좋아하여 항상 ‘우리’가 ‘나’보다 우선되는 한국인의 기질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외아들, 외동딸의 경우도 우리 아버지라고만 하지 내 아버지라고 하는 법이 없다.
예수님이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아기로 오신 사건을 역사적 우연으로 치부할 문제가 절대 아니다. 반드시 그 때 그 장소 그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배경과 정황 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의 경륜이 숨겨져 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류를 구원할 그 은혜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도록 모든 무대장치를 완벽하게 꾸며 놓으신 후에 주연 배우인 예수님을 보내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갈4:4) 것이다.
당시의 문화, 제도, 관습, 지리, 기후, 역사 등을 깊이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항상 그러하듯이 소름 끼치도록 너무나 세밀하고 한치의 빈틈 없이 완벽하게 준비하셨다. 그 무대장치만 살펴 보아도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부인할래야 할 수 없게 만들며 성경의 기록이 너무나도 큰 은혜로 다가온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 주의 종의 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서게 마련이다.
신자들더러 성경 공부하자고 하면 아직 시간과 여유가 없고 믿음이 약해서 나중에 하겠다고 대답하지만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 나중에 공부하겠다는 것은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꼼짝 없이 하나님에게 붙잡히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로부터 손을 떼야 하고 지금 자기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포기 내지 수정해야 하니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이다. 성경 공부하는데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즐기기에도 아직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완벽한 무대장치 중의 하나가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특별히 헬라어는 당시에 가장 과학적인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오해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즉 본문의 “우리 아버지여”의 ‘우리’를 우리 말 뉴앙스인 ‘내 아버지’로 판단해선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영어로 따져 정확하게 단수를 대상으로 하는My Father가 아니라 복수의 아버지- Our Father 다.
중보기도만 해야 하는가?
그럼 당장 여러분은 좀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다. 기도란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개인적인 활동으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에서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인데 왜 꼭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가? 남의 어려움을 위해 중보기도만 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개인적인 기도를 하되 기도할 때마다 매번 반드시 남을 위한 기도를 빠트리면 안 된다는 뜻인가?
이 문제는 기도할 때에 남을 위한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아도 되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기도란 본질적으로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자기 인생을 반응하여 순종하는 행위다. 내 뜻과 계획과 욕심을 하나님에게 아부하든, 열심과 치성을 바치든, 억지로 떼를 쓰든 하나님을 움직여 성취해 내는 작업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라는 존재를 통해 실현되어지길 소원하고 그 일에 나를 온전히 바치겠습니다라고 순응하는 것이 기도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뜻을 이뤄나감에 있어서 절대 어떤 한 개인에게만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반드시 어떤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단 한 사람의 신령한 자를 찾고 계시고 믿음이 신실하고 헌신된 소수의 주의 종을 통해 일을 하신다. 그러나 그 일을 하시는 목적과 그 결과가 미치는 범위는 항상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부어지는 대상은 어떤 공동체이지 지도자를 멋지게 세우고 생색내게 하지 않으신다. 지도자는 단지 그 공동체에 복을 전달해 주는 수단과 통로에 불과하다. 모세를 들어 쓰셨지만 실제로 복을 받은 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이백만 백성들이었다. 모세 개인으로선 비록 도망자 신세였지만 애굽에서 빠져 나왔기에 자기 목숨을 걸어가며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하나님이 불러내어 시키시지 않으셨다면 말이다.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다수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기에 문법적으로 당연히 복수 소유격을 사용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도 하나님은 제자들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당신의 뜻이 실현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마태 개인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신자가 기도할 때에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 왕국 건설에 쓰임 받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일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꺼이 그 일에 순종하며 헌신하겠다는 고백이다.
우리와 그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자가 볼 때에 세상 사람 가운데 우리에 속한 사람이 있고 우리가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자들 즉 ‘그들’로 나뉜다. 알기 쉽게 말해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 구분이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 믿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신자 쪽에서 인간적인 어떤 잣대를 가지고 제 마음대로 나눈 것도 아니다. 불신자를 차별하거나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복을 받고 잘 먹고 잘 살려는 편 가르기는 더욱 아니다.
요한 복음 8:44로 가보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에 관해 성경은 8:21부터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유대인들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우리가 당신의 아버지가 목수인 요셉인 줄 잘 아는데 왜 감히 불경스럽게도 당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느냐?”라고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해 논쟁을 걸어오자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들의 정체부터 먼저 알아라고 하신 말씀이다. 47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가 누구인지 그 하시는 사역을 보고 말씀만 들어도 알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을 보니까 너희는 하나님에 속한 자가 아니라 마귀의 아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오직 두 부류로만 판단하신다. 당신에게 속했는가 마귀에게 속했는가 이다. 또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과 사역을 듣고 볼 때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인류 구원이 이뤄졌음을 믿는가 이다.
간혹 목사들이 불신자를 마귀의 자녀라고 표현할 때에 신자마저도 좀 심한 말씀이 아닌가 의아해 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아가 예수님이 방금 지적한 대로 말하는 것이다.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 귀신이 들어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자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에 속하지 않은 자면 당연히 마귀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그 중간은 없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사단도 저주하는데 단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마귀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따지는 자들은 요한 복음 8장의 이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다. 요즘 불신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만큼이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절대자는 한 분이고 그 조물주가 이 세상을 지으셨고 우주를 다스리고 있겠지 정도로만 인정한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성실히 지키며 선행과 구제에 열심인 유대인들조차 예수님이 마귀의 자녀라고 했는데 오늘 날의 불신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독교에서 예수 안 믿었다고 마귀의 자녀라고 하는 데는 그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필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사11:1-3)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다. 다윗 가문에 메시야가 와서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데 보이고 들리는 대로 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세상과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의 기준으로 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보이고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는가? 그대로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지구 상의 인구는 몽땅 다 죽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법정에 완전히 벌거벗긴 채로 섰을 때 감히 자신이 죄가 없으며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큰 소리 칠 인간이 있겠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속에서부터 사기, 궤휼, 음란, 시기, 질투, 분노, 저주, 거짓이 주체할 수 없이 솟아 나는데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큰 소리 칠 자가 있는가? 살아 펄펄 뛰는 죄의 본성을 완전히 죽인 자가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평생을 두고 수양과 훈련을 해도 그럴 수 없다. 불신자들이 “왜 예수가 와서 죽느냐? 그 사형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다고 내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자기 죄의 문제가 절대 단순하게 용서될 성질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서 믿었는가 아닌가의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불신자가 2000년 전 로마의 한 청년 사형수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기는 것은 자기 죄를 씻고 죄 사함을 받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나 혼자 얼마든지 선해져서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할 자신이 있는 데 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 죽이는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큰 소리 친 것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바로 그래서 마귀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성전 한 복판에 서서 기도한 바리새인이 “하나님이여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오늘날의 불신자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며 떳떳하게 살았노라고 큰 소리 쳤다. 바로 그런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선을 가장 더러운 죄악인 살인으로 갚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곤 하나 없었다.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배 고픈 자를 먹이며, 세상 권력과도 단 한 번의 갈등이 없었다. 의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무죄한 예수를 온갖 모함과 시기로 십자가에 달아 매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임에 틀림 없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오직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느냐 아니냐 뿐이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왜 꼭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더라면 세상이 전혀 구원의 가능이 없었음을 제대로 아는가의 문제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인간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심판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자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죽이셨음을 믿어야 한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 설교말씀을 듣고 교회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스스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고 그렇게 죽지 않으셨다면 나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그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나는 사형 집행만 기다리던 사형수였는데 어느 날 재판관의 자비와 긍휼로 그 사형 집행이 취소되는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 앞에 완전히 내 남은 인생을 바친 자가 되어야 한다.
순전히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금요일 저녁 찬양 예배에 순간적으로 환상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묘한 생각에 사로 잡힌 적이 있다. 천국 보좌 앞에 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장소 한 구석에 제가 서 있는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온 몸에 암에서 살려 주신 그 수술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채로 서서 찬양을 드리는 데 도저히 몸 둘 바 모른 채 제 속으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어찌 감히 나 같은 죄인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라는 감격이 내 속에서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그 예배에 참석해 있는 것만으로도 오직 감사와 기쁨과 경외에 완전히 사로 잡혔었다.
불신자들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 죄 값을 갚으려 평생을 두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속에 죄 씻음을 받았다는 평강과 자유함이 없다. 자기 업보(?)를 갚으려면 갚을수록 더 눌리고, 갇히고, 자기도 모르는 어떤 멍에 아래 메여져 감을 느낀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자연인은 죄의 종이자 사단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의와 생명과 빛과 거룩의 새 생명을 덧입을 수 없다.
예수님의 필터를 통과한 자는 인생이 완전히 180도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이전에는 아무 이유 없이 예수가 싫었는데 이제는 아무 조건 없이 예수가 좋아진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 보상, 은혜와도 상관이 없다. 우리의 현실 생활이 힘들던 편하든 관계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제와 그 삶 자체가 너무 좋은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그 말 한 마디에도 속에서 눈물이 절로 나오고 주기도문만 묵상해도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련하게 저며 오게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제 본문의 ‘우리’라는 개념이 명백해졌다.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끼리 우리가 된 그 우리는 어떤 우리인가? 더 이상 상대를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는 사이가 된 ‘우리’다. 교회 안에서 만은 외모, 출신 배경, 나이, 학식, 교양, 재산, 가문, 지연, 권력 등 그 어떤 것으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 두 사람의 관계에 털 끝만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 사이다. 누구누구 때문에 교회 나가지 않겠어 라는 말을 하면 벌써 그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 밖에 있는 자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부쳐 주어서 더 감사해야 한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든지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고, 나에게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또한 그들 앞에 증거 되고 전해져야 한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의 지하 동굴 카타쿰의 예배에 어떤 자들이 모였는가? 왕족, 귀족, 장군, 귀부인, 지식인이 있었는가 하면 상인, 농부, 무식한 시정잡배, 노예가 참여했고 유대인 뿐 아니라 각처에서 로마로 모인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인간적 기준으로 그들을 우리로 묶을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세상으로 치면 이 만한 어중이떠중이 같은 패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천국 언어로 하는 기도와 성령의 치유가 있었고 도저히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강과 자유함이 넘치는 찬미의 제사가 있었다. 날마다 이적과 기사가 일어났다.
대신에 그들을 우리로 묶어 준 것은 무엇이었나? 핍박을 피해 숨어 예배 보는 곳에 찾아 오는 자가 입구에서 문을 똑똑 두드리면 자기들끼리도 서로 잘 알지 못해 안에서 암호를 물었다. 그럼 한결같이 헬라어로 생선이라는 뜻의 익투스가 돌아오는 답이었다. 익투스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문장의 이니셜을 모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예수님 만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를 믿고 나면 생기는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다. 생판 남이라도 예수 믿는다는 한 마디 말만 듣는 그 순간 자연적으로10년 지기 이상의 친근감이 생긴다. 이곳 LA에서 우연히 고교 동창이나 고향 친구를 만나는 그런 기쁨과도 다르다. 단순히 어떤 동일 집단에 속했다는 동류의식과도 다르다. 세상적인 인연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도저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힘이 교류함을 느낀다. 인간이 끊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서로 묶어져 있다.
신자끼리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달라진다. 부동산 가격이 어떻고, 어느 음식점이 맛있고, 어떤 백화점에 옷을 세일하고 식의 얘기는 이제 뒷전이다. 자녀가 일류대학을 못 가고 변호사 사위를 보지 못한 것들로 괴로워 하지 않는다. 세상의 유행, 풍조, 경향,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소유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이 내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의미와 가치가 없어 아예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주는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 것뿐이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그런 것들이 인생의 목적이었는데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난 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잠겨 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그런 것들은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이자 통로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받을 뿐이다.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시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예수님의 사랑만 그 속에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한 목소리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뜻은 예수님을 삶의 주체로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가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이 갖는 의미가 엄청나다는 것을 절감하는 자들이다. 그 의미를 모르는 자는 여전히 우리가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자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아직 들어 오지 못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영광만을 세워주는 법은 없다. 이 교회도 목사인 저의 명예와 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만나면 즐겁고 헤어지기 싫은 사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교제의 재미 때문이 아니다. 말씀과 기도로 밤을 지새워도 지겹지 않고 더 힘이 나며 위로가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이 교회를 향하신 뜻은 밖에 나가 이 교회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예수님,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한지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나설 수 있는 자가 바로 우리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에게 속해진 그 신분의 변화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하고 그것이 삶의 유일한 능력이 된 자가 우리다. 여러분은 과연 ‘우리’ 안에 들어 왔는가? 아직도 ‘우리 밖’에서 헤매고 있는가?
저들에서 우리로 보게되기까진 절대로 나의 힘과 노력이 아닌 신비한 능력의 힘이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힘 앞에 무릎꿇게 되고, 그 놀라우신 섭리앞에
항복하게 되는 이 일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힘임을
알기에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너무도 감사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