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9) 3/23/2003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5:31-32)
설교의 유혹
목사님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 누구나 겪는 시험이 있다. 교회 안에 어떤 성도가 죄에 빠져 있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직접 대 놓고 야단을 못 치니까 설교를 통해 훈계하고 싶은 유혹이다. 제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음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 하려면 특정 성경 구절을 그 때마다 골라야 하지만 성경을 순서대로 따라 가는 강해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저는 사람은 말로 해선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두철미 믿기에 처음부터 말로 고쳐 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지간히 두들겨 맞아도 제대로 변하지 않다가 완전한 절망 가운데 빠졌거나 죽기 직전에 가서야 겨우 변할까 말까 하는 존재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이 세 상에서 두 가지 뿐으로 오직 하나님과 사단에게서만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전제로 하진 않았지만 설교를 다 준비하고 나면 이 설교는 어떤 사람이 꼭 들었으면 싶다는 마음은 저도 인간인지라 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마음이 든 날은 주일 예배에 그 당사자가 결석을 하거나 자기 옆에 앉은 남편이나 아내를 손으로 툭 치거나 다른 사람을 째려 보고 있다. 바로 그 사람더러 들으라고 설교하는데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참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그 설교를 끝내면 그 잘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래서 사람의 입을 통해 나가더라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서두를 말하게 된 이유는 오늘의 본문이 마침 이혼에 관한 것이고 우리 가운데 혼자 되신 분들이 몇 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설교 내용에 제가 개인적으로 의도한 숨겨진 오해가 없으므로 절대 엉뚱한 오해를 하거나 혹시라도 마음에 올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혼에 관한 기독교의 원칙
가장 먼저 이혼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원칙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간혹 부부란 하나님이 맺어 준 사이이므로 무슨 경우가 생기든 절대 이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역으로 말하면 음행한 연고라면 이혼해도 된다는 말이다. 간음은 성경적으로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5:44에서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또 마18:22에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원칙이 이 문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한 두 번 바람을 피운 것이나 심지어 딴 살림을 차렸던 가능한 용서해주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 또한 간음 죄를 저지른 배우자를 끝까지 용서해 주고 부부 사이가 이전처럼 회복되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 하신다. 그렇지만 본인이 도저히 같이 못 살 것 같고 견디기 힘들면 이혼해도 된다.
그렇다면 음행한 연고 외의 경우는 절대 이혼해선 안 되는가? 최근에 있었던 개그 우먼 이경실씨 사건에서처럼 의처증인 남편이 아내를 야구 방망이로 밥 먹듯이 패도 참고 견뎌야 하는가?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속아 결혼해 알고 보니 남편이 강도 폭력배라면? 부부 두 사람만의 문제라면 그 놈의 정이 무엇인지 참고 살겠는데, 남편의 그런 나쁜 짓을 본 아이들마저 가출하고 타락해 나쁜 길로 들어설 위험이 있다면 그래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가? 남자들만 잘못하는 죄인인 것 같은데, 여자들도 사치와 허영으로 카드를 무절제 하게 사용해 청구서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사로서 말 하기 죄송하지만 교회에 미쳐 남편과 사전에 의논 한 마디 없이 논 팔고 집 팔아 갖다 바쳐도 같이 살아야 하는가?
가정 법원 판사 예수님(?)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증서만 주면 얼마든지 이혼이 가능했다. 심지어 모세의 율법에도 그렇게 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신명기 24:1에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여자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은 것이 길어야 일 이백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여자는 기껏 애 낳는 기계, 성적 노리개감, 밥하고 빨래 하고 청소하는 식모, 혹은 들판에 나가 일하는 인부 정도로 밖에 대우 받지 못했다. 모세 당시에 남편이 조금만 기분 나쁘면 ‘보따리 싸’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쫓아 내고도 일만 있으면 불러다 종처럼 부려 먹거나 심지어 재혼을 막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서 반드시 결정적인 하자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내를 버리지 말고 꼭 내 보내야 할 때도 공식적으로 증서를 주어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재혼을 할 수 있도록 보증해 주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비친 적이 없다. 처음부터 남녀란 서로 돕는 배필이라고 규정했다.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연합하는 관계이지 둘 중 하나, 남자가 더 상위의 위치에서 여자를 주종(主從)의 관계로 다루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율법이 그렇게 규정한 것은 이런 경우와 같다. 국민학교 산수 시간에 구구셈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차, 삼차 방정식을 풀고 결국은 미적분까지 할 수 있게 함이다. 구구셈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곧 바로 삼차 방정식과 미, 적분의 원리를 설명해 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구구셈을 외우기는커녕 아예 산수에 흥미를 완전히 잃어 버릴 것이다. 당시의 인간들에게 보편화된 관습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죄악된 습성에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져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하신 말씀이다. 만약 모세 당시에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이 안 된다고 하면 그렇게 하기는커녕 아예 하나님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여자를 보호하라고 선한 뜻으로 주신 이 율법 규정이 1500여년이 흐른 예수님 당대에는 완악한 인간들이 이혼을 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증서를 주어 여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숭고한 목적이 증서만 주면 이혼을 합법화 시키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한국에선 칠거지악이라는 것이 있어 아내가 아이를 못 낳거나 남편이 바람 피우거나 첩을 얻는 것을 투기만 해도 소박을 맞았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중에 힐렐 파는 이혼해도 되는 수치스러운 일로 아내가 거짓말하거나 집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증서만 주면 이혼이 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시행했다. 한국의 칠거지악보다 더 심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뜻이 증서만 주면 이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음행한 사유 외는 이혼이 안 된다고 다시 확인하신 것이다.
그럼 여전히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교회에 미친 아내와 이혼하면 안 되는가? 본문을 자세히 다시 보시면 32절에 음행한 연고 외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은 몰라도 당시에는 앞 뒤가 안 맞는 말이다. 아내는 문자 그대로 유부녀이고 또 그가 음행했다면 당연히 간음 죄를 범한 것이 된다. 간음 죄는 당시의 율법으로는 버리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다.
요한 복음 8장에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끌고 와 그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묻는 내용이 나온다. 율법에 분명히 사형하라고 되어 있는데도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지 둘 중 하나의 올무에 걸려고 시험한 것이다. 이 때 주님은 잘 아시다시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유부녀의 간음은 사형에 해당한다는 죄임을 부인한 적이 없다. 간음은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사형의 문제이므로 예수님이 오늘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의 초점도 가정 법원 판사처럼 어떤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 말라는 것에 있지 않다.
예수님이 지금 야단을 치고 있는 증서만 주고 이혼하는 경우는 당연히 그 사유가 전부 간음 외의 원인이다. 그런데 32절 후반부에 그렇게 이혼 당하여 재혼하면 그 여자는 물론 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도 역으로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내의 수치스런 일을 꼬투리 삼아 이혼했지만 예수님은 아무리 증서를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이혼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혼한 여자나 그 여자에게 장가든 남자가 간음이 성립 되려면 여자가 여전히 전 남편의 아내라야 된다. 유대인은 이혼 증서로서 법적 이혼이 유효하다고 생각한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에서 그것은 무효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은 마누라가 집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결혼 생활을 더 지속할 수 없는 심각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부부 사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본문의 포인트는 결혼의 원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부부 관계에 있지 이혼 가능한 사유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아장아장 걷는 키 큰 남자
키가 굉장히 큰 남자가 있었다. 키가 크면 보통 보폭이 넓어 성큼성큼 걷는데 이상하게 일본 여자가 기모노 입고 게다 신고 걷듯이 아장아장 걷는 것이 보기에 흉하고 이상했다. 나중에 아내와 같이 걷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아내가 소위 말하는 숏다리였다. 자기 보폭대로 걸으면 아내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으니 일부러 천천히 좁게 걷다 보니 그것이 몸에 습관으로 밴 것이다. 한국 사람 특별히 저 같은 사람은 이해도 안 되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결혼의 원리다.
한 번 상상해 보라. 키가 190센티가 넘는 사람이 아장아장 걸으면 얼마나 창피 하겠는가? 아마 저 같으면 빨리 안 따라 오고 뭐해 라고 고함부터 지를 것이고, 일부러 남남인 양 멀리 떨어져 걷거나, 각각 따로 외출하여 나중에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거나, 아예 평생 같이 외출할 생각을 접든지 했을 것이다.
남편이 보폭을 맞춘다는 것이 단순하게 도덕적 의무감이나, 감정적 사랑의 열망만으로 쉽게 이뤄질 문제가 아니다. 아내가 힘들고 잘 하지 못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부분을 내가 먼저 나서서 기쁨으로 감당해주는 것이다. 상대의 고통, 상처, 약점, 수치를 내가 대신 져 주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의 약점이 내 몸에 습관으로 붙을 만큼 상대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그 큰 키로 아장아장 걷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몰라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전혀 부담이 없고 자연스러워질 정도까지 상대의 짐을 져야 한다.
힐렐파 유대인들이 집안 청소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아내의 수치로 간주해 이혼해도 좋다고 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아내의 수치보다 남편의 수치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부부 관계란 제 삼자가 알 수 없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따질 문제가 아니다. 서로 도토리 키재기이다. 이혼하려고 덤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양 쪽 다 들어 보면 객관적으로는 잘못이 반반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의 잘못만 침소봉대하는 습관이 있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아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해 상대만 탓하고 그래서 이혼하겠다고 덤빈다.
그런데 모든 부부 싸움의 객관적 원인은 양쪽 다 져야 하지만 더 근본적 원인, 즉 주관적으로 자기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상대의 수치를 나의 수치로 간주한다. 상대가 저지른 잘못보다 그 잘못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더 염려한다. 자기의 자존심, 체면, 위신을 세우려다 서로 싸운다. 내 마누라라면, 내 남편이라면 최소한 이정도의 교양, 지성, 매너,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의 마누라라면 교회에서 경건하고 고상하게 있어야지 경망스럽게 평신도 남자 성도랑 박장대소하며 농담할 수 있는가? 여전도 회장에 구역장의 남편이라면 장로까지는 안 되어도 최소한 목사님 설교 중에 졸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런 것들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교회에서 거룩하게 예배 본 직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들 앞에서 서로 쌍 욕을 동원해 가며 싸우는 원인이다. 자기가 그렇게 자랑하는 매너와 지성과 교양은 어디 갔는지 눈 닦고 찾아 볼래야 없다.
반 쪽의 수학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결혼의 원리는 이와 다르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남편의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단순히 음행을 하지 말라는 육신적 요구 사항만이 아니다. 부부란 결혼하는 순간 그 육신 뿐 아니라 인격, 영혼, 전 존재, 그의 삶과 인생 전체가 이제 자기의 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자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그 소유권과 운영권이 이제 상대에게 넘어 간다. 무조건 상대의 말에 마치 독재자에게 복종하듯 하라는 말이 아니다. 창세기 2:24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와 같이 둘이 합쳐야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부부란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어디까지나 반 쪽일 뿐이다. 절대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둘이 합쳐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
결혼이 하나님이 맺어 준 것임에도 예수님이 간음한 연고라면 이혼해도 된다는 뜻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반쪽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없어진 그 반쪽을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 대신 자기 스스로 제 기분대로 엉뚱한 것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 증서만 주고 다른 남자와 재혼 시키면 여전히 두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 각각의 반쪽으로 남아 있기에 결과적으로 아내의 의사와 상관 없이 간음을 범하게 만드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마누라를 야구 방망이로 밥 먹듯이 두들겨 패는 남편은 아내가 자기의 반쪽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자기를 방망이로 패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 뿐이다. 교회에 미쳐 전 재산을 털어 넣는 여자는 하나님 대신에 교회나 담임 목사를 우상으로 삼아 반쪽인 남편 대신에 그 우상으로 자기의 반쪽으로 들어 앉힌 것이다. 키가 190센티가 넘는 사람이 마누라가 따라 오든 말든 앞장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꼴은 자기 오른 쪽 다리는 뛰어가고 왼 쪽 다리는 아장아장 걷는 꼴이다. 그러면 넘어지기 밖에 더하는가? 얼마나 부끄러운 꼴이겠는가? 남편이 아내 따라 아장아장 걷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것이 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면 하늘을 보고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더 되지 않겠는가?
불신자의 결혼은 각각의 남녀가 완전한 한 사람으로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숫자로 치면 1+1=2이다. 서로 최선을 다해 사이 좋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정 못 참을만한 일이 생기면 나로선 최선을 다했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으니 이것이 나의 한계니 서로 불행해지기 전에 헤어지자고 하면 그것 뿐이다. 한국에 젊은 세대 가운데는 이혼율이 벌써 1/3이 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혼이 죄거나 허물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서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신자의 결혼은 다르다. 분명히 남남이 만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결혼으로 만날 때 까지 각각의 남녀를 나중에 만나 하나로 이룰 것을 전제로 해서 반쪽으로 지내도록 보존한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드는 하나님 만의 비밀의 경륜이자 신비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 숫자로 치면 0.5+0.5=1이다. 그래서 신자가 결혼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불신자는 이혼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결혼할 때에 완전한 한 사람으로 만났고 헤어져도 한 사람으로 돌아 가니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저들의 논리는 항상 회자정리(會者定離)이다.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다르다. 헤어지면 0.5의 반 쪽으로 돌아 간다. 혼자서는 완전한 삶이 되지 못한다. 반쪽 구실 밖에 못하는 인간이다. 병신이 된다. 그래서 영원토록 헤어질 수 없다. 또 설사 감정에 격해 잘못 판단하여 이혼할지라도 두 사람이 신자였다면 반드시 나중에 만나게 되어 있다. 어디에서 만나는가? 천국에서 만난다. 신자의 삶의 논리는 불신자와 반대로 이자정회(離者定會)다.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벧전3:7)가 부부다.
함께 죽기를 원하는가?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혼할 수 없다고 율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 결혼을 해석해선 안 된다. 또 도덕적으로 죄인가 아닌가로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도 안 된다. 나아가 사회적 통념과 풍조에 떠 밀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선 더더구나 안 된다. 오직 천국의 원리로만 부부 관계를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루 종일 같이 성경 보고 함께 기도하고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온유하게 보내며 말 그대로 집안을 천국 같이 변화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다. 신자 부부도 가끔 싸울 수 있고, 숏다리 아내를 뒤에 두고 성큼 앞장 서 걷는 꼴불견을 연출 할 수 있고, 심지어 실수든 고의든 바람도 피울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한다. 자기들의 결혼 생활을 자기들이 이뤄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하나님이 그 결혼을 이끌어 간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세상의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다. 권세, 명예, 재물, 위신, 체면, 건강, 심지어 믿음 마저 그 결혼 생활을 좌지우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이 그 가정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결실을 맺게 할 수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먼저 찾고 의지해야 한다. 실수하고 싸울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주님말고는 없다. 사람과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주님과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이 되어야 한다. 키 큰 남편이 아장아장 걷는 습관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내가 결혼 생활을 성경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는 유일한 근거가 하나 있다. 얼마나 기도하고 말씀 보는가, 혹은 부부 싸움의 횟수나 금실 좋은 것으로 따질 수 없다. 이 여자와 혹은 이 남자와 영원토록 서로의 반 쪽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가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함께 천국으로 가고 싶은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한 쪽 일방의 생각이 아니라 두 사람 공히 서로에게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소원하는가? 나머지 반쪽을 남겨 두고 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가? 비록 나중에 반드시 만나지만 그런 마음으로 부부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 만이 그 결혼 생활의 주인된 증거다.
물론 일방이 결정적인 하자를 저질렀을 경우도 있다. 본문의 말씀처럼 음행 했을 경우, 심지어 다른 살림을 차렸을 경우도 있다. 그럼 이혼해도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아직 그를 나의 반 쪽으로 인정하는가, 그와 함께 천국으로 가길 원하는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비록 그 일로 내 체면, 위신, 자존심 모두 산산조각이 났고 억울하고 분통터질 일을 나만 당했고 세상적인 피해를 내가 완전히 뒤집어 썼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심지어 내가 그를 반 쪽으로 인정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아직은 나의 반쪽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반쪽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끝까지 용서해 주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신자는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가 결혼 생활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꾸려 가기 위해선 언제나 자신과 서로에게 물어 볼 질문은 오직 하나다. 함께 천국 가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과 수치를 담당하셨듯이 우리 또한 배우자의 약점과 짐과 수치를 내가 대신 짊어져서 그것들이 내 약점과 짐과 수치가 되어 내 몸에 자연적으로 습관처럼 붙어 있게 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