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6) 6/15/2003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1-4)
은인이 원수로 변하는 까닭은?
미국 이민 오는 사람들은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직업이나 거주지 교회 등 미국생활의 진로가 결정된다고 한다. 이제 막 이민 온 사람은 미국의 모든 제도에 대해 생소하기 때문에 이민 선배가 가르쳐 주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어 운전면허증과 사회보장번호 취득, 은행구좌 개설, 아파트 렌트, 자녀 학교 입학하는 문제부터 시작해 직업을 얻고 비즈니스를 개업하고 비자나 영주권 얻는 것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그 이민 선배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이 사이가 좋으나 이외로 그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한다. 심지어 좋지 않게 끝날 뿐 아니라 원수 사이로 발전하는 것을 종종 본다. 어떤 분이 그 이유를 좀 특이하게 분석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비즈니스와 영주권 문제까지 도움을 청하다 보니까 한국에서 이민 정착 자금으로 얼마를 갔고 왔는지, 한국에서 과거가 어떠했는지, 심지어 개인의 신상에 관한 비밀까지 드러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도움을 주는 상대에게 평생 코가 뀌는 것 같아 그것이 싫어 은혜 받은 쪽에서 먼저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다. 아주 일리가 있는 분석인 것 같다.
그러나 부모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든 비밀과 상처를 친구에게 고백한 후에 오히려 서로 더 신뢰하고 그 관계가 깊어진다. 단지 비밀을 털어 놓았다고 해서 그 관계가 왜곡되어질 수는 없다. 이 쪽에선 비밀로 털어 놓았는데 어느 사인가 모르게 약점으로 둔갑한 것이다. 도움을 베풀어 준 쪽에서 그 비밀을 자기만이 안다는 것을 무기로 해서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이용하려 드니까 도움 받는 쪽에선 약점 잡혔다고 느껴진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제하고 선행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2절에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다. 남에게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4절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다. 보상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도움 준 것은 도움 준 것으로만 끝을 내라는 뜻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며 특별히 이민 사회에 꼭 지켜져야 할 권면이다.
이민 사회의 치명적 잘못
솔직히 우리가 하는 선행의 대부분이 겉으로는 자랑을 하지 않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꼭 “누구누구라고 구태여 이름을 밝히지 않겠지만..”이라는 식이다. 주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듣는가? “내가 언제 제 돈 빼먹자고 했나? 과일 상자 사 들고 인사하러 오라고 했나? 아무리 그렇지만 내가 저한테 해 준 것을 생각하면 가끔 전화라도 해야 하지 않나?”
돈이나 선물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은 잘못이다. 도움을 준 쪽에서 먼저 전화를 하면 어디가 덧나는가? 자기는 셀 폰을 일부러 꺼놓고 그 사람한테서 몇 번 전화 오는지 세고 앉았고 속으로는 “아니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소홀히 대접해도 되는 거야?” 욕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선행인가? 전화를 자주 하라는 것이 바로 전화로라도 문안 인사를 받아야겠다는 심보다. 자꾸 주위에 하소연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자랑하는 것이다. 남을 깎아 내리면 자기는 올라 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착각은 없다. 자기는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 데 상대는 나의 그런 배려마저 몰라주는 배은망덕한 놈이다라는 것이다. 너무나 비열하고 치사한 자랑이다.
이민 사회의 치명적 잘못이 무엇인가? “나하고만 가장 친한 줄 알았는데 요즘 알고 보니 다른 사람하고 더 친하던데” 라는 섭섭증이다. 이 문제만큼은 믿음이 좋고 나쁘고 상관 없이 다 걸려 넘어진다. 물론 그 원인은 우리 모두 외롭고 제대로 된 친구 하나가 아쉽기 때문이며 그 사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다 같이 외로운 처지니까 더욱 서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금새 토라지고 시기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자기 보다 남과 더 친한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내가 너를 도와 준 것이 얼마나 많으며, 나 만큼 너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가 없는데 무엇이든 나하고 의논해야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무슨 뜻인가? 진정으로 친구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뜻보다 상대를 은연중에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고 자기가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심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꼭 전화해라, 찾아 오라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상대가 먼저 찾아 오게 되어 있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 문을 먼저 열면 상대도 자동으로 마음 문을 연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저 친구가 요즘 왜 나를 이렇게 소홀히 대접하지 하는 섭섭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절대 상대를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근래 내가 간섭을 많이 해 귀찮게 했는가 자신을 먼저 되돌아 보아야 한다.
밥 먹은 것을 세는 바보
선행을 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항상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로선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지금 예수님은 의를 실천하면서 자랑하지 말고 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누구나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차원의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 그 보다는 훨씬 높은 경지의 선행을 신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이3절에서 비유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남이 모르게 하라든지, 떠벌리지 말라든지, 선행한 후에는 겸손해져라 고 하지 않으셨다. 오른 손이나 왼 손 둘 다 자기 몸에 붙은 것이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남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 오른손 왼손 자기들끼리도 몰라야 한다. 네가 한 일을 네조차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모를 수 있는가? 이민 온 첫 날에 공항에 마중 나가 준 것만 해도 왔다 갔다 네 시간이 소요되고 그 시간 동안 벌지 못한 돈과 들어 간 기름값과 공항 주차비가 얼마인데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서 갓 도착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공항 주차비는 낼 생각도 하지 않는데 그것도 자칫 비행기가 연착하면 만만찮은 비용이다. 첫 날에 들어간 시간적, 금전적 손해는 그 날 이후 계속해서 돌봐 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 이 모든 것들을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잊게 해주시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이 비유는 걸을 때에 오른발 왼발 내 딛는 것이나 밥 먹을 때에 오른 손으로 밥을 퍼 먹고 왼손으로 신문을 들고 보는 것과 같은 일을 의미한다. 누가 오늘 저녁 밥을 먹으면서 오른손으로 밥은 몇 숟가락, 반찬은 몇 젓 가락 집어 올렸으며, 왼손으로는 신문을 어떤 방향으로 몇 번 접었다 폈다고 기억하는가? 도저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할래야 할 수도 없고 기억하려 들수록 더 어려운 일이다. 또 그것을 세어 기억해 남들에게 자랑하는 바보는 세상 천지에 한 사람도 없다.
무슨 뜻인가? 신자의 선행과 구제는 바로 이 오른 손으로 밥을 먹고 왼 손으로 신문을 붙들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에 완전히 베인 습관, 태도, 라이프 스타일, 일상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힘이 빠져 능력이 드러나지 않으며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어야 한다. 밥을 굶으면 속이 쓰리고 아프듯이, 잠을 자지 않으면 멍해지듯이 말이다. 신자가 이웃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고, 원수를 미워하고 있으면 마치 매일 오른 손으로 밥을 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왼 손으로 먹겠다고 설치는 꼴과 같다는 말이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고 은밀히 구제하는 것이 정상이며 그렇게 하지 않거나 시기 질투하고 있으면 비정상이다.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자는 언제나 정상 생활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기 마련이다. 비정상적 생활은 항상 수고와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않고 있으면 스스로 애타하고 통분히 여기며 하나님 앞으로 철저히 부셔진 모습과 갈급한 심령으로 나와야 한다. 회개하고 안타까워야 한다. 나아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구태여 회개하지 않아도 죄를 짓거나 이웃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면 절로 눌린다. 성령님이 함께 하므로 우리 지성이나 도덕성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자신을 되돌아 보지 않아도 우리의 영이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편한 점이 늘어난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잘못과 죄들이 이제는 예리하게 가슴을 찌르는 아픔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죄에 민감해지고 사랑에 갈급해지게 된다.
라이프 스타일이란 항상 해야 하고 평생 하는 법이다. 중간에 안 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법이다. 또 먼 장래에 가야만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룰 수 없는 일이다. 평신도는 구제 안 해도 되고 집사가 되면 성도들만 사랑하고 장로쯤 되어야 이웃의 불신자를 사랑하라는 법은 없다. 또 교회를 한 10년 다녀서 믿음이 좋아지고 집사가 된 후에야 새벽기도, 구역예배, 성경공부에 안 빠지고 참석하면 된다는 법도 없다.
그런 생각들은 모두가 지금 당장 하지 않겠다는 핑계일 뿐이다. 자기 삶의 목표와 가치가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다는 증거다. 라이프 스타일이 변화되지 않았다. 기도, 말씀 안 봐도 불편하거나 힘이 빠지는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목사의 목청만 아프겠지만 절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신자가 말씀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본인이 손해다. 아주 큰 손해다. 하나님 쪽에 손해 볼 것 전혀 없다.
왜 초신자의 기도는 잘 들어 주시는가?
아무리 신자의 선행이 라이프 스타일이라도 간혹 남들에게 나팔 불고 자랑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껏 할 수 없었던 일을 생전 처음 하게 되었을 때다. 미국은 고등학교 재학 중 만 16세 되는 생일 날에 맞추어 운전면허를 따게 한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코흘리개 아기 같던 아들이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은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이웃에 자랑해도 된다. 또 어지간한 부모는 중고차라도 한 대 사 준다. 신자가 처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면서 울었다든지, 단기 선교 사역을 가서 전도를 열심히 했다는 것들은 성도들 끼리 나눠도 된다.
그러나 10년 20년이 지나도 운전할 줄 아는 것만을 자랑하는 아들이나, 매일 운전 잘 하고 왔다고 상 주는 아버지는 없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다. 초신자 시절에는 기도가 응답이 잘 되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흔히들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녀도 믿었다는 것 하나말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에게 “제가 잘 믿었지 않습니까? 잘 믿었으면 무엇인가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무엇입니까? 믿은 표시가 안 나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하고 있다는 뜻이다. 매일 운전 잘 했으니 상 달라는 꼴이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은밀하게 구제하라고 하셨다. 그럼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단순하게 무명, 익명으로 선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꼭 무명으로 선행해야 더 기뻐하신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선행했지만 하나님은 다 이실 테니까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나에게만 축복해 주시겠지 라는 은근한 기대 심리를 가지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단 한 시도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 아무리 우리가 하찮은 구석에서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도저히 어디 내세울 것 없는 도움을 주었더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신자는 절대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행과 구제도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품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더러 은밀한 곳으로 찾아가서 선행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소외되고 구석진 곳으로 가 핍박 받고 힘 없는 자를 도와주고 위로해야 한다. 눈물과 한숨이 마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자들이 은밀한 곳에 얼마나 많은지 보라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며 제사장 나라다. 빛이 없어 어두운 곳에, 소금이 없어 썩어 가는 곳에, 죄에 빠져 죽어 가는 곳에 찾아가야 한다.
신자는 은밀한 곳으로 찾아 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며 은밀히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분이 모든 것, 우리의 선행과 구제마저 주장하시고 인도하신다.
“너는 외롭고 힘들게 사는 이웃에게 찾아만 가라. 너 또한 남을 도울 만큼 돈과 여유와 힘이 충분히 없고 너 또한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너는 그래도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고통과 시련 가운데 힘들어 지치고 쓰러진 어떤 영혼이라도 내가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알고 믿지 않느냐? 나의 사랑과 은총과 권능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믿는다면 너는 단지 찾아가기만 해라. 너가 가진 것이 부족하고 없다면 상대를 위해 아무 것도 안 주어도 된다. 기도만 해주어도 된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고 그를 돕겠다. 기도할 줄도 잘 모르고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면 상대의 고통을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으면 이웃과 함께 같이 있어만 주어도 된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세상의 온갖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셈이다. 대신에 세상에 갖춘 것 하나 없어도 십자가 주님의 사랑만 있어도 하나 부족함 없이 충분하고 완전하다.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되련다.
어떻게 해야 선행이 우리의 일상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될 수 있는가? 내가 한 구제를 나도 기억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매일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한 번씩 찾아가야 하는가? 아예 자선 사업가로 나서야 하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도 사실 아니다. 내가 상대를 내 영향력 아래 잡아 두고 통제하고 조정하겠다는 생각과 욕심만 버리면 된다.
바울 사도는 고전13:5에 이것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라고 표현했다. 상대로부터 인사나 보상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이다. 상대가 잘 되기만을 바라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에 그 자식이 나중에 훌륭하게 되어서 남에게 자랑하고 싶거나, 자식이 부모에게 잘 해 주는 것을 바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직 자식이 잘 되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을 일일이 일지처럼 적어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자식을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 일상의 삶일 뿐이다. 사랑 자체가 정상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이다. 여느 부모라도 항상 안타까운 것은 다른 부모보다 더 잘해주지 못한 그것 만이 가슴 아플 뿐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하고 없어서 괴롭고 있으면 가장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어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연애할 때에 애인의 생일날이 닥치면 무엇을 주어야 가장 좋아할지 생각하고 고민한다. 심지어 가장 좋아 할 것을 마침 알아내어 그 선물을 장만하게 되면 내일 이 선물을 전해주면 얼마나 기뻐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밤새 즐겁지 않았는가?
제가 목사로서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해도 틀림 없이 목사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의 상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다. 단지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와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거룩과 의와 생명으로 아름답게 바뀌고 풍성하게 열매 맺으며 자라는 것을 지켜 보는 것 만큼 가치 있고 기쁜 일은 이 세상에서 없다. 그 영혼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어떤 시련과 환난도 기도하고 말씀으로 이겨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보면 정말 신나고 섬기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른다.
상대가 잘 되는 모습, 스스로 혼자 일어서고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는 그 재미가 말할 수 없이 큰 데 구태여 내가 조종하고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성도들끼리 친하면 친할수록 목사는 좋은 것이다. 여러분들이 구역별로 이웃별로 자주 만나 서로 사랑하고 섬겨라. 같이 기도하고 말씀 보며 교제하라. 목사를 구태여 불러 같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어려운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찾아가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있어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러나 끝까지 기억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제발 남을 도와주어 사랑하려 들거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도와주는 것이다. 내쪽에서 먼저 가슴을 열고 진정하고 참 된 인간 관계에 들어가기를 소원해야 한다. 내가 남을 도왔다, 이웃에게 베풀었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자랑과 보상이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따라 떠오르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인간에게 뿌리깊게 남아 있는 태생적 죄의 본성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며 그것은 내가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대신에 남을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선행과 구제라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라도 남을 통제하고 조종해야 하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 내고 남에게 자랑해야겠다는 것이다.
이민 사회에 다 같이 힘들고 외롭고 어렵다. 하나 같이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바로 그러니까 내가 아프고 힘든 만큼 상대도 아프고 힘들 것이라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인정이라도 해 주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그 아픔, 눈물, 한숨, 분노, 상처가 무엇인지 찾아가 알아 보고 내가 가진 것 중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 한다. 같이 있어주든, 기도해 주든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도 주고 오든 정말 그 보잘것없이 베풀었던 그 위로와 기도와 구제로 인해 그 사람이 아픔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모습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라.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절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가치 있는지 체험할 수 있다.
그럴 때에 그 상대의 유익이 상대의 유익으로만 절대 끝나지 않는다. 내가 기쁘고 내 영혼이 충만해진다. 상대로부터 감사나 보상을 받아서가 아니다. 사랑 그 자체가 가지는 그 능력과 은혜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3,4) 또 그런 사랑 안에서 만이 우리를 은밀하게 지켜 보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 된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9) 상대의 아픔, 슬픔, 상처, 한숨이 바로 내 아픔, 슬픔, 상처, 한숨이 된다. 오른 손이 구제한 것을 왼손이 기억할래야 할 수 없게 되며 오직 상대의 필요한 것만을 채우려 애쓰는 신자가 누려야 할 가장 정상적이고도 일상적인 삶이 된다.
하나님 쪽에 손해 볼 것 전혀 없다." 아멘!!
주님의 말갛게 씻어 주신 죄사하심의 은총 앞에 엎드리 울며 감사하는 맘으로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이웃일지라도 넉넉히 이해하며 보듬어 안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