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이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6-8)
캐나다의 초기 개척자들이 깊은 산 속에 만들어 놓은 요새에 물자가 완전히 바닥이 났습니다. 개척자 빅터 클락은 한 젊은 인디언 안내자를 데리고 요새를 떠나 마을까지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물자를 구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추위가 엄습해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분간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어 가던 길을 멈추고 불을 피워 노숙하며 하루 저녁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습니다. 눈보라가 멈춘 다음 날 새벽 동이 터오자 놀랍게도 바로 눈앞에 요새가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벽에 동이 텄는데도 바로 눈앞에 있는 요새는 보지도 못하고 오늘도 날씨가 엉망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오던 길로 다시 돌아 가버렸습니다. 새벽안개는 오히려 쾌청한 날씨를 보증함에도 단지 뿌옇게 보인다는 이유로 여전히 눈보라가 멎지 않은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가나안 땅은 한 발자국을 내딛기만 하면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지척에 두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너무나 먼 땅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이 그분이 마련해 놓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잘 아는 신앙 이야기이자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자꾸 거론되어져야만 하는지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약속이란 약속을 한 사람의 신용과 능력을 보고 믿느냐 마느냐가 정해집니다. 아빠가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어린 아이가 의심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을 사기 위해 얼마의 돈이 들며 차로 가게에 갔다 오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는 아이로선 알 수도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약속이란 그 내용을 검토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당사자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추석에 100%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사장이 약속한 것과 부장이 한 것은 그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 가나안 땅을 누가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것도 애굽에서 사 대만에 돌아오리라고 정확한 시기까지 정해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믿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장대한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고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현실의 상황을 약속의 내용과 약속을 주신 그분의 신용과 능력에 전혀 비추어보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니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신자가 너무 쉽게 범하는 신앙 상의 치명적인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함께 하심이란 항상 바로 곁에서 아니 신자 안에 내주하셔서 한 시도 떠나지 않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당연히 그분의 약속도,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뿐 아니라 신실하심도 신자와 함께 한다는 뜻인데도 오직 그분의 능력만 함께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란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이루실 일도 함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그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신자와 함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마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 차원으로만 해석하고 또 믿고 치웁니다. 조금만 힘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금방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왜 빨리 이 쓰레기들을 안 치워주느냐고 불평부터 해댑니다.
하나님은 그 때 신자를 떠난 것입니까? 그러다 신자가 형통하여 기분이 좋을 때만 다시 돌아와 함께 하는 것입니까? 그럼 하나님은 완전히 신자의 기분과 눈치만 쳐다보는 분입니까? 나아가 기도라는 형식만 취하면 그런 불평을 얼마나 많이 자주하는지를 두고 신앙이 좋다고 합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신자들이 예사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만 본 것이 아니라 먼저 그분이 이 약속을 하셨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그 일을 그분이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반면에 나머지 정탐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대한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들 사이에서 하나님만 찾으려드니까 갑자기 그분이 실종된 것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들은 하나님만 바라 볼 줄은 잘해도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줄은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일에는 눈을 감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는 오히려 하나님은 멀리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면 언제나 하나님은 가깝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 신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목사들은 설교 할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그렇게도 강조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가장 잘 안 믿기는 사항이지만 가장 잘 믿고 싶다는 소원의 표출 아닙니까? 평소 때에 그분이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너무 자주 받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의 일은 뒷전에 제쳐두고 그 분만 찾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자라도, 심지어 눈감고도 그곳 지리에 능통한 인디언 안내인을 데리고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에선 지척에 있는 요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온갖 세상 죄악과 흑암의 세력들이 또 자신의 굽힐 줄 모르는 고집과 끝없는 욕심에 휩싸인 채로는 하나님을 절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참 신자란 하나님이 일하는 곳을 찾아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 있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 기대하고 그 일에 쓰임 받기를 기꺼이 원하는 자입니다. 자기 일을 하나님더러 해 달라고 할 때는 내주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침묵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신자가 소망을 가지고 참여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뿌연 안개를 제치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이 없고 오직 젖과 꿀만 흐르는 땅을 고집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분만 찾다가 눈앞의 요새를 버리고 되돌아갔지만 40년이 흘러 또 다시 그 땅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또 40년 후에도 장대한 아낙과 견고한 성읍은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기껏 40년이 흘렀다고 변하거나 취소될 리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고 약속하신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이 이루고야 맙니다.
그래서 신자가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을 구태여 찾으려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잠간만 생각해 봐도 너무 어리석고 웃기는 일 아닙니까?) 대신에 그분이 하고 계시는 일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아낙 자손이 견고한 성읍에서 버티고 있더라도 그 일을 일단 그분이 함께하심을 온전히 믿고 시작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40년을 광야에서 허비한 후에도 똑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을 또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게 장대하거나 견고한 장애란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그 능력)만 찾겠다는 불신앙 단 하나만 빼고는 말입니다.
7/1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