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민31:1,2)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요 가장 신령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떠나 초반 인생 40년은 애굽에서 중반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단순히 외국에서 오랜 유랑 생활을 하다가 말년 40년만 동족과 함께 했기에 기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를 이스라엘의 대적나라에서 다 보냈습니다. 물론 이는 그를 후에 민족의 구원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로를 대적하려면 애굽 왕궁의 사정을, 또 출애굽 후 백성들을 이끌어 가려면 광야의 지리와 기후 등을 잘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 준비와 훈련을 쌓기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모와 동족들은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자기는 그 적국의 왕궁에서 왕자로 호사스럽게 자라면서 마음이 편했을 리 없습니다. 그가 언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았는지는 불명합니다. 생모가 유모가 되어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자 그의 아들이”(출2:9,10) 되었다고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생모에게 유대 신앙과 전통을 배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을 테니까 결정적인 시기가 이를 때까지 바로의 왕궁에서 참고 기다리라는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면 어느 정도 크고 난 후에 알게 되어 굉장히 큰 충격을 받고 방황을 했을 가능성인데 어느 경우가 되었던 그런 입장에 처해 있는 자의 심경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동족을 구해내라고 했을 때에 모세는 몇 번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자기가 자랐던 애굽에 대한 미련도 조금 작용했을 것입니다. 적국인 애굽을 좋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계모이지만 자기를 키워준 엄마와 또 왕궁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시종이 혹시 살아 있다면 이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게 되는 것 아닌가 염려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열 번이나 재앙을 당한다면 누군들 살아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재앙은 어떠했습니까? 단지 애굽의 우상 신들에게 내려진 징벌이었고 마지막에도 장자(長子)만 죽이는 벌을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로의 공주, 즉 모세의 생모와 친구들은 살려 준 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마음까지 세심하게 감안하여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신 모습이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애굽의 백성들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고 그들로도 참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에게 주는 명령이 또 무엇입니까? 이제는 자기 처의 동족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처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딸로 그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광야 도피 시절에 안식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 장인은 모세에게 지혜를 주어 이스라엘의 행정과 재판 체계를 세우게 했던 자입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에 자기 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모세는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을 두 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모든 개인적인 정분과 인륜과 의리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순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굽이나 미디안 둘 다 자신과 어떤 미묘한 관계에 있든지 또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의 대적이기 이전에 순전히 하나님의 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세상에선 당시 최강국이었지만 완전히 우상신들에 놀아나는 사단의 왕국이었고, 미디안 또한 이방족속이긴 마찬가지이되 바로 얼마 전에 발람의 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켰기(민25:1-9) 때문입니다.
신자는 특별히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일을 개인의 일보다 앞서 수행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일을 가정과 직장 일보다 우선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드러내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서 모든 입으로 당신께 경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진정으로 불쌍한 죄인들에게 바라며 또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분 대신에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이면 신자 또한 좋아해야 하며 그분이 싫어하면 신자 또한 싫어해야 합니다. 당신께서 울고 웃고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저주하는 대상과 일과 사람에 대해 신자도 똑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대해선 철저하게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주하며 싸워 이겨야 하는 대신에 그에 묶여 있는 사람과 일과 환경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눈물로 기도하여 구원해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히려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가 훨씬 많습니다. 아니 신자가 실제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쟁터이며 교회는 단지 그 전쟁을 잘 수행하기 위해 훈련 받는 연병장일 뿐입니다.
가족이라도 불신자일 경우 냉정하게 대하거나 그 관계를 끊으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잘 사는데 하나님이 꼭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따집니다. 그러나 신자가 볼 때는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선 절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며 오히려 죽음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지금 걸려 있는 인간적 의리와 인륜을 전부 떠나서 하나님부터 따르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시켜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십시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의 그의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 온 가족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라고 하면서 오히려 제자들을 가리켜 자기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그 심경을 한 번이라도 짐작해 보았습니까? 오히려 터져 나갈 것 같은 안타까움과 그럴수록 더더욱 깊이 사랑했을 것 아닙니까?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끊어버려야 합니다.
물론 현실에선 그 구분이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까지 냉정하게 끊고 맺어야 할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는 한 가지 기준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 의리와 감정은 자꾸 커지는 대신에 예수님의 마음이 안 느껴지면 아무리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고 어떤 일이 옳아보여도 냉정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주위에서 비방을 받더라도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오히려 고마워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도 모세에게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여 합력으로 선을 이루었듯이 신자의 냉정함을 당신만의 따뜻함으로 되갚아 주십니다.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신자도 가장 싫어하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단과 사망입니까? 그 이전에 하나님은 “당신의 부재(不在)”를 가장 싫어합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도 당신의 부재의 결과일 뿐입니다.
신자가 세상 속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서 혼자만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교회부터 오히려 하나님이 부재하고 있지나 않는지 자꾸 염려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모세, 아브라함, 예수님은 세상을 보며 심지어 자기 가족을 보며 비참한 기분을 가눌 수 없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고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겠습니까?
8/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