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제자들이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8:22-25)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의지력을 동원해서 적극적, 능동적으로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믿으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의심이 생기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없애고 하나님에 대한 불평 불만도 절대 하면 안 되고 어떤 어려움도 기도로 이겨내는 모습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이런 식의 정의(定意) 내지 이해는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믿는다고 했을 때 의지를 동원해서 적극적 능동적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상대에 대해 의심이 들고 불평과 불만이 생기면 이미 그 믿음에 금이 간 것이지 서로 믿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마음 턱 놓고 믿는 것이며 진짜 실제로 믿어져야 믿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유독 하나님에게만은 왜 적극적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까? 물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또 그분의 뜻을 명확하게 모를 때가 있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서로 믿는 사람끼리도 간혹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믿은 후에 그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지 그런 일이 생겼다고 처음부터 믿음이 안 생기거나 없어져서 다시 믿음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에 대해선 인간적 신뢰보다 더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믿음을 어떻게 하든 키워보려는 노력을 두고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고 치웁니다. 광풍이 불어 닥쳐 배에 물이 차니까 지금껏 보아온 예수님의 권능을 잊어버리고 불안에 떨었기에 믿음이 없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바람과 물결도 잠재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 그런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정말 마음 턱 놓고 완전히 맡겨 놓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 어떤 의지를 동원해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사실 하나도 없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으려고 의지를 동원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경우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엄마아빠만 있으면 마음 놓고 놀고, 먹고, 잡니다. 요컨대 엄마가 옆에 있기만 해도 금방 잠이 드는 모습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믿음으로 잠재워 달라고 조르거나 심지어 기도해 달라고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광풍이 호수를 덮쳤고 배에 물이 넘쳐 풍전등화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일한 상황을 아이들이 부모와 같이 겪는다고 가정할 때에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부모가 하는 대로 그래도 따르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선 제자들이 아이이고 예수님은 그 부모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부모 되는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잠이 드셨더니.”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깨워야 일어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아이와 부모의 경우를 상정해보면 아이들은 배가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부모가 누워 자고 있으면 자기들도 안심하고 잡니다. 최소한 특별한 일이 없겠거니 하고 턱하니 마음 놓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제자들이 왜 믿음이 없다고 예수님께 꾸중을 듣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들이 이전에 보았던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잊을 수 있습니다. 또 바람과 물까지 말 한마디로 다스릴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능을 잊지 않고 어떤 위급한 경우가 생겨도 그 권능이 다시 생각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까? 눈앞에 파도가 닥쳤는데 언제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믿음은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정말 온전히 믿어져서 마음을 턱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니까 제자들도 마음 놓고 같이 누워 잘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최소한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초조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때때로 아주 위급한 상황이 닥쳐 금방 죽을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같이 마음 턱 놓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면 나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줄줄 외우고 기도를 뜨겁게 해도 이렇게 되지 않으면 종교적 실력은 높을지 몰라도 믿음은 없거나 적은 것입니다.
혹시라도 말로는 쉽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지 않느냐 반발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아직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나아가 영혼이 부패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사실은 아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쥐꼬리 같은 지식과 경험임에도 우리는 그저 자신의 이성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만 모든 것을 분석하고 판단하려니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부터 어떤 일이 생기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전존재와 삶을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신자가 하나님의 선한 뜻과 자신을 향한 소명을 붙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분명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1) 현재의 고난이 절대 그대로 가지 않고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 때문에, 2) 하나님께서 이미 해결책을 준비해 놓으셨지만 단지 때와 방법이 우리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3) 다른 더 좋은 계획이 있기 때문에, 4)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고 그 믿음에 따라 더 큰 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설마 나쁜 일이 생기게 하겠는가? 또 설령 환난을 겪게 하고 심지어 죽이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의 영광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고 죽은 후 우리는 천국 가기에 더더욱 좋지 않는가?”라는 담대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환난 때에 하나님마저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을지라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면 아이도 마음 놓고 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정말 의지적으로 노력하여 할 믿음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무시면 깰 때까지 기다리는 훈련부터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훈련이 아니라 믿음이 먼저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무실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소명을 이미 붙들었고 또 그 소명에 자신의 전부를 다 걸은 자에게 말입니다. 이런 확신이 먼저 있어야 기다릴 수 있지 않습니까?
가장 성공하고 복된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시쳇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그분이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의지를 동원해서 가짜 믿음만 키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다 가뭄에 콩나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지언정 평생이 불안하고 초조할 뿐입니다. 단 한 번도 마음 턱 놓고 하나님을 믿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8/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