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42:1-4)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하는 모습이나 역할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비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하여 병이 낫거나, 방언과 통변을 하거나, 찬양 집회에서 가슴 가득 감동이 밀려오지 않고는 성령이 역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외로 성령이 역사하는 모습을 훨씬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 말은 흔히 성령 충만으로 이해하고 있는 특정 은사(charisma)들은 성령의 역사 중에 극히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은사가 외적으로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목적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만 성령의 근본적 역사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할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역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신 목적 내지 성령이 이룰 결과를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이방에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벌써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이해와는 차원을 달리하지 않습니까? 가깝게는 유다 멸망 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멀게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대신에 “세상에 공의를 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개인적 유익이나 교회의 번영에 앞서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기 위해 당신의 신을 준다고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사역할 것이라고 합니까?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마땅히 세울 자격과 능력이 있음에도 당신의 권세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 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공개적인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하고, 아니 받으려고 하지 않고 구석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조용히 사역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또 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이유가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들만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둘 다 완전히 절망의 나락에 빠져 벼랑 끝 인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가만 놔두면 곧 상한 가지가 썩어 죽게 될 것이며 등불도 꺼져 완전히 흑암에 던져질 만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가망 없다고 포기해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자들입니다.
사회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을, 그것도 유대 사회가 아닌 이방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역의 대상들이 세상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이름도 빛도 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살리는 사역 또한 이름도 빛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성격 자체가 주위에 크게 소리 외칠 일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경제적 육신적으로 궁핍한 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이방에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했으므로 오히려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가는 자들입니다. 사단의 권세에 메여 죄악과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이제 곧 죽어갈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영원한 진리를 모르고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 그것도 동족이 아닌 이방인들을 상대로만 사역을 하다 보면 인간적으로는 얼마나 쇠하고 낙담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와 있고 그분의 인도만 따르기에 낙심하거나 피곤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해당되지만 그 의미는 오히려 오늘날의 신자에게 정확하게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방에 직접적으로는 공의를 많이 베풀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이방에도 영원토록 구원의 진리가 될 십자가 복음만 완성시켰습니다. 이방에 공의를 베푸는 일은 하나님의 신을 받을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소명으로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자가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아야 할 목적과 그 결과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신자더러 불신자에게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베풀기 위해 성령을 주셨는데 그분의 인도대로 따르면 이름도 빛도 없이 정말 인생의 막장에 다다른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이 신자에게 직접으로 주는 유익은 그런 사역을 할 때에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활력이 샘솟듯이 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을 볼 때마다 그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어서 반드시 그들을 찾아가거나 최소한 거부하지 않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결론도 다시 음미해볼 만합니다.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방의 광대한 본토보다는 이름 없는 섬들이 복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권세, 명예, 재물이 없어 힘들고 나약한 자들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은혜를 받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사역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해서 신자를 쇠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도 당연히 이름 없는 자들에게 이름 없이 전해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성령 충만한 상태임을 어떤 것으로 점검하십니까? 하루 종일 설교나 찬양 테프 들으면서 눈물 흘리며 혼자 감정에 복받쳐 있는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신자를 한 없이 낮아지게 해서 십자가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지금 이름도 빛도 없는 자들을 찾아가서 예수의 생명을 나눠주고 있습니까? 그런 열정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성령 충만한 신자란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을 따라 이방에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있기에 하늘에 속한 기쁨과 평강과 능력을 누리며 살고 있는 자입니다. 기도원이나 교회에 모여 박수치며 찬양하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기도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들만 상대하면서도 쇠하고 낙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 아무 군말 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신비한 능력과 감정적 충만이 따르더라도 그 배후에 성령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8/1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