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18:22)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가 참 목자인가 삯군 목자인가를 따지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말의 증험과 성취함의 유무(有無) 여부입니다. 쉽게 말해 선지자가 말한 그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컨대 목사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면서 어떤 예언을 했는데 그대로 이뤄지는지, 어떤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는데 그대로 응답이 되는지, 또는 성도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물었을 때에 상담해준 내용대로 하여 그 결과가 유익하게 나와야만, 참 목사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선지자라는 성경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선지자(先知者)라는 우리말 표현 때문에 마치 장래 일을 미리 알아서 예언(fore-telling)하는 자로 오해합니다. 나쁘게 말해 점쟁이, 좋게 말해 예언자가 선지자인양 생각합니다. 성경의 선지자는 세상을 향한,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의 초점은 항상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일부분이지만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신 백성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오는 구원과 심판을 말하려니까 결과적으로 장래 일을 미리 말하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점쟁이 식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언은 성경 전체를 통 털어 사실은 아주 드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대언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식에게 항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공부 잘해라, 나쁜 짓 하지 말아라. 다 네 장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게 된다. 지금 식으로 놀기만 하면 두 달 후에 있을 수능고사 점수가 형편없어 지방 캠퍼스에도 못갈 것이야.” 분명히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지만 점쟁이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뜻, 그것도 자녀에게 자나 깨나 바라는 소원을 말한 것이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예언자적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가운데 드러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세대 모든 인종을 초월해 그 사명은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임박한 징벌을 피할 길이 없고 자꾸 그런 일이 쌓이면 마지막 심판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구체적인 예언을 말하고 성도들의 장래 일을 위해 현실적인 대책을 말해주고 또 기도해준 그대로 되어야 한다면 죄송한 말로 목사가 아니라 점쟁이입니다. 성도들도 목사에게 그런 것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물론 목사가 어떤 문제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거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현실적으로 상세하게 단정지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그런 구체적 인도는 항상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 일대일로 교통하여 받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은 성령을 모든 성도에게 내주토록 했지 않습니까?
선지자의 증험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선포한 메시지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확신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밝히는 성경의 아주 좋은 예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여 시드기야 왕의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만 아니라 70 년간의 포로 생활을 거친 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것도 벌써 그 이전에 예언했습니다.(렘25:11)
이처럼 그의 선포에도 장래 일을 미리 구체적으로 예언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부로 포함된 것입니다. 단순히 선지자 개인의 신령한 능력으로 미래를 점쟁이 식으로 알아맞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상황은 몰라도 70년 후의 귀환은 예레미야 사후(死後)의 일이라 그의 당대에 과연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예컨대 목사가 짧게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후의 일을 하나님에게 계시 받았다고 마음대로 선포하고 다녀도 그를 검증해볼 재간이 없고 자칫 거짓 추종 내지 맹종하는 자들만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에게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예언을 절대 주시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신자들의 엄정한 분별력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말에 대해 자신의 증험과 성취를 보인 것은 따로 있습니다. 친족에게서 기업 무를 자의 신분으로 땅을 사고 그 문서를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보여준 후에 인봉하여 토기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존케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 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렘32:15)는 예언을 실제 솔선수범해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난 한참 후에 일어날 포로 귀환에 대한 예언이 정말로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계시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동원해 망해져 가는 나라의 땅을 사서 그 땅문서를 여러 날 동안 보존케 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난 후라도 정말 그 말씀대로 성취가 되면 그 문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미한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되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목사 말의 증험도 예언이나 상담한 대로 이뤄지느냐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를 보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설교 했으면 정말로 교회 안에 목사를 미워하는 자마저 더 사랑하는지 보라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라고 권면했으면 목사 부부부터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목사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구역장이 기도하고 설교한대로 구역원들에게 하는지 또 교인 부모가 아들더러 공부 열심히 하고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타일렀으면 부모들부터 집에 들어오면 책을 읽고 밖에서는 절대 부정하거나 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죽고 한참 후에 일어날 일, 즉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전혀 없는 말에 대해서도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해선 근 백년을 그대로 묵혀 두었습니다. 한 때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한국의 모 목사는 그 종말년도 훨씬 후에 만기가 되는 채권에다 자기 재산 증식을 위해 투자해 놓은 것이 들켰지 않습니까? 주위 사람들이 정말 목사가 자신이 예언한 년도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만 살펴보았어도 그런 난리를 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말에 대한 증험과 성취함은 오직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해 보이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어떤 세상적 핍박과 현실적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한 말이 진리임을 확신하기에 그 진리를 실제로 실천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이 세대와 전혀 다른 길로 가야 함을 모든 사람이 보아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본문에서 정작 깨달아야 할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약 그런 증험이 없으면 거짓 선지자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자기들 말을 여호와의 말인 양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사람들로 두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꾸 두려워지는 말만 하면 일단 그 선지자를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두렵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려워지면 누구라도 자연적으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선지자에게 묻게 되고 그럼 선지자는 뭔가 열심과 정성을 바치라고 준비된 다음 수순을 밟아 간다는 뜻입니다.
종교 개혁의 직접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연옥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한껏 고취 시킨 후에 그곳에서 탈출하려면 면죄부를 사야한다고 유도한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항상 종말이 곧 닥치는데 재산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교회에 바쳐 천국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꼬드기지 않습니까? 전형적인 삯군 목자들의 수법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삯군 목자만 탓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계에서도 경제학적으로 따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통합니다. 종교를 가지는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실의 두려움만 없애거나 복을 더 많이 받으려고 덤비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삯군 목자가 생기는 법입니다. 다른 말로 두려움만 없애려 들거나 현실의 복을 받으려는 교인은 삯군 목자와 참 목자를 절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이런 맥락에서 순진하고 무지한 평신도들을 고의로 역이용하는 목자는 정말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도 신자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예언할 때에 누가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시드기야 왕이 그를 옥에 가두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가오는 재앙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풀어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사람들로 인해 자신이 유익을 보는 방향으로는 단 한치도 유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부터 환난을 먼저 당했고 심지어 자신의 예언을 몸으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종말론을 이야기하려면 그 본인부터 당장 재산을 전부 처분해서 교회가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눠줘야 합니다. 이제 곧 종말이 오니까 그들이 평소 때 꼭 먹고 입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못했던 일을 한 번이라도 해보게 말입니다.
따라서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아주 간단한 구별법이 있습니다. 그 목자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나가고 그래서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괜히 하나님의 심판만 두렵고 목사 개인과 교회라는 조직체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자꾸 생기는지 따져 보면 됩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더 키우고 이미 구원 받은 신자 된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확신하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도록 이끌어야 참 목자입니다. 참 목사는 반드시 당신이 설교한대로 살든지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설교 내용이 좋아도 사실은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8/4/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