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10:30)
참새의 살고 죽음도 오직 하나님의 권세에 달렸으니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이야 그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신자들은 정말 자신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하나님만 믿고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맞서야 합니다.
머리털까지 세셨다는 것이 수사학적 강조거나 단순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인의 경우 매일 머리카락이 50개 이상 빠집니다. 머리털이 세신바 되려면 매일 몇 개가 빠지며 몇 개가 다시 나는지 까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일대일로, 단 한시도 빠지지 않고, 일거수일투족과 마음의 중심까지 전부 아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시139:2-4) 멀리서 신자의 생각까지 아시는데 머리카락 개수야 두말하면 잔소리가 됩니다.
머리카락 개수의 변동은 하루에 기껏 50개 안팎이지만 우리 생각은 깨어 있는 동안 아니 누워 자고 있는 동안에도 얼마나 형형색색으로 치사찬란하게 변합니까? 그 생각을 멀리서도 다 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신밖에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영혼과 육신 둘 다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너희 머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말씀을 접하는 신자에게 일차적으로 생기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면 복은 못 줄지언정 다가오는 아니 현재 닥치고 있는 시련 정도는 막아 주셔야 하지 않는가?”입니다. “저도 앞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일하다가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나 그런 반응은 너무나 자가당착적이요 이기적입니다. 신자가 막상 어떤 시련을 겪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합니까? 천재지변이 아닌 한 즉 인위적인 환난이면 항상 “그 때 내가 만약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텐데”라는 후회가 꼬리를 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겪는 시련의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의 사정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신다면 왜 이 시련을 미리 막아주지 않았는가라는 불만은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시련’ 대신에 ‘나’를 막아 주었어야 했다는 말이 됩니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려 실수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았다면 그 때에 뭔가 상황을 바꾸어주던지 내 잘못된 판단을 깨닫도록 해주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작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될지 한번 생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우선 우리 수족을 잘라야 합니다. 또 머릿속에서 뇌를 빼내어 버려야 합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도 수시로 쾌락과 죄악밖에 생각하지 않고 발은 세상과 사단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끔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상과 하나님 중에 어느 쪽에 시간과 자원을 더 투자하는지 따져 보면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신자에게 시련을 전혀 안 겪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자리에서 죽이는 길 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표면적으로는 죄의 권세를 절대 경시하지 말고 정말 죽기까지 죄에 대해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깊은 뜻은 너희가 짓는 죄를 막으려면 손을 자르고 눈을 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백체가 남아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는 신자가 혹시 있을지 몰라도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지 않는 신자는 없습니다. 십계명을 거의 다 지켜서 이제 의가 완성이 되나 싶어도 마지막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에 전부 다 걸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죄에서 구원 받을 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통해 미리 하나님이 보시는 의의 기준에 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혹시 손으로(행위) 범죄하지 않더라도 혀로(말로), 또 혀로 하지 않더라도 눈으로(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미리 다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환난의 99%는 사실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입니다. 또 그중에 99%도 타재(他災-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시련)가 아니라 자재(自災)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시련을 미리 다 막아주실 능력이 없거나 우리의 머리털을 잘못 센 것도 아닙니다. 그러려면 벌써 우리는 눈, 손, 발, 혀, 뇌가 없는 아주 이상한 동물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또 엄밀히 따져 하나님이 천재는 몰라도 인재까지 미리 막아줄 책임은 없는 것 아닙니까? 혹시 이미 일어난 인재를 없애는 것, 그것도 신자와 함께 없앤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각자를 대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너무 쉽게 잊고 있습니다. 그분은 신자를 하나의 독립된 고귀한 인격체로 대우해주고 있습니다. 또 그 인격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셔서 모든 필요하고도 유익한 당신만의 수단을 동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수단에는 인간과 달리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갓난아이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지만 차츰 아이더러 일부러 위험을 겪게 만듭니다. 걸음마를 시키면서 손을 계속 잡고 시키는 바보 같은 부모는 없습니다. 무릎 보호대를 채워줄 수는 있어도 중간에 계속 넘어져도 놔둡니다. 대신에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아이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체라는 의미는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해서 시행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필수적으로 자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갓난아이 걸음마 연습도 부모가 아이를 운동선수처럼 육체적 단련을 시키자는 뜻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어른만큼 판단력과 분별력이 성숙하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서 시행하여 자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주관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인재 아니 자재를 향해 나간다는 것을 빤히 아십니다. 그러나 당장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막으려면 죽이든지 자유의지를 빼버리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인간을 아예 만들지 말든지 짐승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땅을 당신 대신 거룩하게 다스릴 자가 없어지기 때문이며 또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시는 목적 자체가 없어집니다. 우주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고서 인재를 막는 길은 스스로 넘어져서 잘못을 깨닫게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 나빠 “앗! 뜨거라” 하면서 억지로 고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과 교통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것만이 복되고 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인재를 스스로 자청해 놓고 그 뒷설거지만 하나님께 요구하지 말고 미리 하나님의 뜻을 물어 하나님이 시킨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시련과 환난이 생기면 그때야 말로 얼마든지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불평, 원망, 심지어 지금 당장 고치라고 명령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 하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나아가 귀신을 쫓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까지 받은바 된 신자가 진짜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직도 스스로 인재를 자청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절대로 환난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핍박은 더 늘어나고 심하면 순교까지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신자에게 염려와 불안은 없어지고 나아가 그 모든 시련들을 시련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육신만 멸하는 환난이지 영혼까지는 절대 멸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손과 발이 잘려져 백체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천국을 소망해 여호와의 궁정에서 일하기만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인격체로 변화되어져 가며 또 그 변화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자 보람이자 기쁨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 하나님이 왜 이 환난을 막아주지 못했는가, 아니면 왜 당장 없애주지 않는가라는 의심과 불평이 듭니까? 가장 먼저 인재인지 천재인지, 만약 인재라고 인정이 되면 타재인지 자재인지 따져 보십시오. 그 답이 “인재로 자재다”라고 나오지 않으면 아직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아니 스스로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며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기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또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 하나님이 있는데 그분께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오늘도 그분의 나라와 의만 생각하고 그 일에 쓰임만 받으려 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따로 필요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7/2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