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5-8)
영어에 ‘After-Christmas Blues’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태여 번역하자면 ‘성탄절후우울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나누며 즐겁게 지낸(미국은 완전히 추석 같은 명절로 변질했음) 후에 갑자기 찾아오는 허전함을 말합니다. 한국이 4강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후에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살지 하면서 오히려 더 쓸쓸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상에서 세상에는 결코 없는 너무나도 장엄하고 경이로운 광경을 생전 처음 목도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도 “이제 산 밑에 내려가면 방금 보고 겪은 그런 감동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오히려 고뇌와 염려에 파묻힐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연히 초막을 짓고 남아 있겠다고 요청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에 밖에서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도 변화산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합창을 지켜보았습니다.(눅2:13,14)
정확히 크리스마스 밤에 진짜 천국 찬양대가 틀림없이 헨델의 ‘메시야’와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장엄한 합창을 부르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군천사가 떠난 후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구유의 아기를 찾으러 빨리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성탄절후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눅2:19)했습니다. 그녀도 변화산의 제자들과 같은 체험을 이미 한 번 했습니다. 수태고지를 하러 온 천사를 대면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고 이제 목자들을 통해 간접적인 체험을 하나 더 보탰습니다.
그녀 또한 그런 신령한 체험을 아쉬워하며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단지 모든 것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 수태고지와 출생 때 있었던 천사들의 찬양과 성전에서 만난 두 선지자의 예언을 평생을 두고 마음에 두었습니다. 예수의 성장 과정 내내 한시도 잊지 않고 그 말씀대로 과연 이뤄지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또 기도하며 소망했을 것입니다.
신자가 장엄하고 신령한 영적체험을 한 후 평상으로 되돌아가면 ‘성탄절후우울증’이 자연히 나타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자들과 마리아에게는 그런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하나님이나 그분의 사자를 직접 만났고 또 그분의 분명한 계시를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신령한 종교적 체험을 해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 인격적 대면이 없이 단지 분위기나 스스로의 감정적 흥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언제 그런 일이 있은 양 완전히 딴 판이 됩니다. 그런 체험을 빠른 시일 안에 다시 하지 못하면 우울증마저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면이 있으면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받게 되고 또 그 말씀을 자기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이 생깁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에게는 성탄절후우울증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 내 기뻐하는 자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의 초막을 짓고 살겠다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 하나님이 혹시 생길지 모를 후유증까지 막으시고 나아가 당신의 소명 가운데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오히려 성탄절후우울증을 즐기려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기도하여 환난이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을 신앙의 가장 크고 은혜로운 체험으로 간주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으로 대면하는 체험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든 그 은혜 체험만 가장 귀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오직 그런 체험을 어떻게 더 많이 더 자주 할 수 있는가를 신앙의 가장 큰 목표로 삼습니다. 당연히 이전의 감격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동일하거나 더 크지 않으면 은혜가 안 되기 때문에 우울증이 나타납니다. 나아가 마치 그런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더 신령한 표시인 양 생각합니다. “너희들은 진짜 더 깊은 은혜를 잘 몰라!”
신자가 이전의 감동과 같거나 더 좋은 은혜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으니 안심하고 받을 수 있는 은혜만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못 견딜 정도로 아주 위험한 처지에는 빠트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신자 쪽에서 큰 수고와 희생이 따르지 않고 또 예측 가능한 범위 내어서 쉽게 믿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롭습니다. 이전에 받았던 은혜와 질적 양적으로 비슷하거나 나은 것이 아닙니다. 매번 독특하고 경이롭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에서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아주 큰 위험과 고통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생전 처음 겪는 너무나도 풍요롭고 경이로운 은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참 신자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은혜라도 소원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받습니다. 한마디로 에스더처럼 죽으라면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평생을 두고 마음에 새겨 기도하고 그대로 따르며 그분만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는 그런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그분이 존재하고 신자를 보호 인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를 날마다 새로운 은혜로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당신께서 신자에게 평생을 두고 함께 이뤄나갈 소명을 주셨기에 실제로 그 말씀대로 이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그 당장에는 그분의 인도에 대한 구체적인 경과를 이해하지 못해도 신자를 향한 평생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은혜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평생을 두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더더욱 결코 해선 안 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서 계속 머물겠습니다!”입니다. 다른 말로 이전의 은혜만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후우울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막을 짓고 살겠다는 제자들을 향해 앞으로는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했습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당신만의 영광스런 계획으로 초대했고 또 그것을 이뤄주실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고 또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신자에게 주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과 땅을 전부 아우를 은혜가 기껏 이전과 동일한 정도이겠습니까? 나아가 하나님 당신의 열심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거나 뒤만 바라 보고 있는 것을 도저히 묵과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신자의 오늘은 항상 새로워야 합니다. 내일은 더 새롭습니다. 정확하게는 ‘더(better or more)'가 아니라 ‘다르게(new or another)’ 새롭습니다. 만약 신자로 하여금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은혜라면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닙니다. 간혹 신자가 영육 간에 너무 침체해 있어서 단지 위로하여 당신의 동행하심만 재확인 시켜주는 은혜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성탄절후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루 빨리 성탄절이 되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오지 않으면 그 우울증을 치유할 방도가 없습니다. 신자가 기도하여 당면한 문제와 고통을 해결 받지 않으면 우울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태도가 이와 하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나마 성탄절이라는 년 중 최고의 기쁨과 재미를 소원하지도 않고 현재의 괴로운 일만 없애 달라고 하니 그보다 훨씬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날이 갈수록 질적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습니다. 그에 따라 신자의 이 땅에서의 일생도 결코 완성이 없습니다. 완성이 없다고 형편없이 마쳐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아침마다 예수 안에서 보낼 그날 하루를 벅찬 기대와 감격으로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녁에 오늘도 무사했다는 안도로 끝나는 불신자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분의 기뻐하시는 자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라도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짓고 살겠다거나, 이전에 지었던 초막이 더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지금 바로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새롭고 경이롭고 정말 평생을 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그 말씀을 말입니다.
9/1/2006
오늘도 새롭고(new), 다른(another)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