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열조(列祖)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 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抗拒)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렘2:5-8)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야의 열두 정탐꾼 사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죄를 범했습니다.(민13,14장) 그래서 하나님을 청종치 않은 모든 사람들이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사십 년간”(민14:34)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후대의 신자들은 이 사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는 불만과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 벌을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한 것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다닐 수도 없는 곳에 보냈습니다. 그것도 잘못한 날 수의 365배의 기간 동안 말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심한 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로 얼마를 살게 했습니까? 무려 40년입니다. 그것도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떡과 반석에서 터진 생수로 먹여서 의복이 헤어지거나 발이 부릍지 않도록 하면서 말입니다.(신8:3) 당시 인간의 평균수명이 지금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았을 것 아닙니까? 정탐꾼 사건 때에 순종하지 않은 세대는 전쟁을 나갈 수 있는 나이(20세) 이상이었습니다. 평균으로 따지면 30-40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망 시기는 다 달랐겠지만 어쨌든 당시로선 장수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만의 완전한 공의에 근거해 그런 벌을 내렸지 괜한 심술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땅을 통과케 한 일을 기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도 절대 잊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반인은 물론이고 제사장과 선지자들마저 여호와는 없다고 하고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당장 죽어도 시원찮을 자들을 40년간이나 더 살게 해줄 정도의 은혜라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라도 결코 쉽게 잊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패역이 어디 있습니까?
사망의 땅에서 생명을 40년간 유지해주었다면 하나님에게는 결코 잘못이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민14;28)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민14:1)이라고 불평한 대로 해주긴 하되 오히려 40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습니다.
지금 인간과 하나님이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더러 절대로 가데스 바네야 같이 배역하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고 평생을 두고 바라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 아닙니까? 바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 준 일입니다. 전쟁과 도적이 없었고 들판에 나가면 먹을 것 마실 것이 있으니 그저 놀고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거기다 아침에 일어나 구름기둥 불기둥이 지시하는 대로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면 그만이었습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아무 염려 없도록 필요한 것 다 마련해 주고 심지어 그날 할 일까지 가르쳐주는데도 즉,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 주어도 싫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놀고먹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놀아도 뭔가 신나고 화끈하게 놀겠다는 것입니다. 염려 걱정이 없어지는 것 까지고는 성에 차지 않고 제 멋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심심풀이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염려를 없애는 일마저 자기가 해야지 남이 그렇게 해 주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살아갈 것을 다 마련해 주어도 그렇습니다. 시쳇말로 무슨 깽판을 쳐도 좋으니 자기 일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깽판을 쳐놓고는 또 자기 원하는 대로 그 깽판을 빨리 바로잡아주지 않는다고 난리를 칩니다.
“너로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3) 인간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하다고 절대로 행복지지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미국에서 슈퍼로또에 당첨된 자들의 말년(末年)이 전부 비참한 불행으로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를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존재 자체가 원래부터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설계했기에 하늘에서 주는 만나와 생수가 아니고는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부패한 인간은 만나와 생수 대신 사단이 주는 냄새나는 고기와 썩은 물이 더 좋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사망의 몸에 맞는 사망의 양식만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국 그런 이스라엘에게 어떤 불만을 터뜨렸습니까?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르느냐?” 무슨 뜻입니까?
“광야에서 40년간 아무 재미없이 지낸 것이 그렇게도 억울하더냐? 너희들이 가장 원하는 대로 놀고먹게 해주었는데도 왠 불평이냐? 가데스 바네야에서 바로 죽였어야 하는데도 40년간이나 편하게 더 살게 해주었는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이냐? 내가 너희한테 불의해서 너희가 나를 멀리 했다면 나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너희의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맞춰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나를 불의하다고 하느냐? 만약 너희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해주었더라면 사망의 음침한 땅에서 살아나올 자가 과연 한명이라도 있었을 것 같으냐?”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기분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싫고 미워합니다. 자기 인생의 목표나 가치에 비교하여 가름하는 법도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도덕과 법률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밥 먹듯이 안 지킵니다. 가장 사랑해야할 가족도 자기가 귀찮고 힘들면 무조건 싫어합니다.
종교적 계명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의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기 기분대로 맞춰주지 않는 하나님은 아예 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부유하고 똑똑해야 합니다. 신자라고 크게 예외가 아닙니다. 고대에 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이스라엘뿐인데도 하나님마저 불의하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솔직히 자기가 기도한 때와 방법대로 응답 안 된다고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습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서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여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신자니까, 또 당신이 하나님이니까 무조건 순종하라고 절대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속에서 의롭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의를 매번 발견하기 힘들면 최소한 하나님은 절대로 의로운 분이라는 확신을 갖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의로운 하나님을 기억만 해내어도 당연히 그분 뜻대로 살고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옳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데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이 걱정입니까?”
하나님이 왜 하루 분의 잘못을 일 년으로 환산하여 광야를 돌게 했습니까? 불순종한 죄가 너무나 괘씸해서 톡톡히 맛 좀 보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루 잘못을 일 년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일한 잘못을 365 번 범하고 또 그 숫자만큼 회개해도 잘 고치지 못하는 너무나 어리석고 패역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과 하나님의 의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수백 번 생각해도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사망의 땅을 통과케 한 것이 이해하기 힘든 심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잘못에 대해 365배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365배의 상을 받은 것이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는 영원토록 신실하고 완전합니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처럼 특별히 우리 눈에 도저히 하나님이 의롭지 않게 보일 때, 즉 자기를 도무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 길로 이끌거나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게 할 때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최근 하나님에게서 무슨 불의함을 본 것 같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세워서 남들 가지도 않은 길로 이끌고 있는지 의심 내지 불만이 생깁니까? 그런 때일수록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365배 이상, 아니 도저히 수치로 따질 수조차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단 하나라도 찾아내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일수록 그 본인에게 괴롭고 힘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드린 기도와 마음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 주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벌써 이 세상에 없는 몸이 되었거나 최대로 잘 봐주어 감옥에 갇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세상에 그런 큰 거짓말이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9/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