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니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6-29)
공관복음서 셋 다 기록하고 있는 사건입니다.(마17:14-21/눅9:37-48) 귀신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예수님은 바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자기들은 고칠 수 없었는지 물었더니 세 복음서 공히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면서 기도를 강조하는 대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 둘 다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 셈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를 해야만 귀신이 쫓겨 가고 병이 낫는다고 말합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간절히 울면서 부르짖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어 기도합니다. 믿음에 힘을 보태어 그 키워진 믿음으로 기도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를 해야만 능력이 나타난다는 정도도 모르는 신자가 있습니까? 아니 기도를 믿음 없이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까? 또 믿음에 억지로 의지력을 더 보탠다고 실제로 믿음이 늘어납니까? 믿음이란 항상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안 믿어지는 것을 자꾸 믿으려 애를 써본들 저절로 믿어지게끔 되는 상황으로 바뀌지 않는 한 절대 믿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연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제자들이 전혀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고 또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경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날도 성도나 목회자가 귀신들린 자를 붙들고 정말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치유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도 예수님에게 치유가 안 되는 이유를 물었더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동일한 대답을 들었다면 도통 말이 안 됩니다. 분명히 기도를 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믿음에 찬 기도를 뜨겁게 말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처음 귀신을 쫓아 보려 했을 때에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대신에 굿이나 귀신 쫓는 어떤 민간요법을 했을까요? 단순히 말로 타이르거나 혹은 기도 없이 안수만 했을까요? 의학적으로 간질을 치료하려 들었을까요? 그 어느 것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기도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절) ‘능히’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차이를 간과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능히’가 없으면 제자들이 아예 아무런 수단도 동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신을 쫓을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쫓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경우입니다. 대신에 ‘능히’가 있으면 귀신을 쫓으려고 뭔가 시도를 하긴 했었는데 잘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도 말고 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설령 있다고 쳐도 기도 없이 했겠습니까?
이 구절의 원어적 의미도 “귀신이 나갔어야만 했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제자들이 당연히 쫓아내리라 기대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축사(逐邪)를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기도도 아주 세게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잘못 말씀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한 진의는 무엇이 됩니까? 참된 믿음에 바탕을 둔 참된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제자들은 기도를 하되 형식에 치우친 기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무당이 굿하거나 스님이 염불 외우듯이 어떤 정해진 형식이나 기도문(祈禱文)에 따라 기도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하면 귀신은 당연히 쫓겨나갈 것이라고 믿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상대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긍휼이 없이, 또 지금 그 자를 묶고 있는 흑암의 세력에 대해 신자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단지 기도만 한 것입니다. 기도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와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기도를 수단으로만 동원한 것입니다. 요컨대 기도라는 수단을 동원하기만 하면 귀신은 쫓겨 가야 한다는 기도만능주의라는 형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믿음도 ‘기도 자체의 권능’을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지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만 하면 귀신이 쫓겨 가야 하면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입니다. 굴속에 있는 보물은 도적들의 것인데 그 일당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야!”만 해도 그 보물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유란 귀신 전부를 가리키는 의미로, 혹은 귀신 중에도 특별히 악독한 종류라는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귀신을 쫓는 것은 영적전쟁 중에서도 가장 센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만 하면 귀신이 쫓길 것이라고 기대하는 믿음 정도로는 부족하고 아주 온전한 믿음 위에서 영적인 기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기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구태여 강력한 믿음일 필요가 없습니다. 순수한 믿음 즉 의심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믿음입니다. 의심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신자의 순수한 기도는 언제든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한 믿음입니다.
영적인 기도 또한 너무 신령하고 초자연적일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사용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기도가 천국 보좌에까지 상달되어서 이 땅을 조종하고 있는 사단의 눈에 안 보이는 권세를 언제 어디서든 묶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 분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자세로 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는 분명히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시 잊고 기도만 하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억지로 믿음을 키워서 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적인 의심만 하지 않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주저주저함, 자신이 없음, 이해가 안 되어서 곤혹함, 이것저것 따져보고 싶은 마음들이 드는 것도 불신앙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자기는 믿음을 갖고 기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부분이 주문 같은 기도와 기도에 힘만 보태는 기도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자신이 없으니까 은연중에 기도 자체에 자꾸 힘을 붙이려 듭니다. 기도 자체에 힘을 싣는다고 하나님에게 힘이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당신 외에는 단 한 치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심지어 신자의 기도의 세기에도 상관없이 항상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스스로 이 질문을 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 갈 것 같습니까? 별로 자신이 없습니까? 아니 천국 열쇠를 이미 당신이 지니고 있는데 왜 자신이 없습니까? 그 열쇠를 언제 어디서든 천국 문을 여는 데에 그냥 사용하면 됩니다. 또 바로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9/7/2006
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힘주어 기도하면 기도의 힘이 더 세진다고 생각 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위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귀한 말씀 전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