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왕상13:23,24)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을 분명하게 위반한 유다의 선지자는 그 즉시로 사자에게 물려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언뜻 보면 그 심판이 너무 참혹하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지 말라는 금령을 어긴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늙은 선지자의 노회한 꾐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의 이유와 그 방법까지 분명하게 미리 밝혀 주었습니다. 베델의 선지자를 통해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2절)고 예언했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신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곳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정 먹고 마시고 싶으면 하루 속히 유다 땅으로 넘어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소명을 수행했으면 더러운 땅에 한 시라도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네 시체가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족들을 한 곳에 같이 묻었습니다. 조상들이 묻힌 묘지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으므로 타향에서 객사(客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남왕국 유다 땅에 들어서기 전 북왕국 이스라엘 땅에서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의 이유나 방법이 장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다 선지자 한 사람의 잘잘못을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북왕국 안에서 반드시 이루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북왕국이 우상 숭배의 너무나 큰 죄악에 빠져 있기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되 그 심판이 얼마나 엄정(嚴正)할 것인가를 온 백성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심판은 누가 봐도 하나님이 하신 심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도록 해서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 때문에 사자에게 물려 죽는 심한 벌을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별 것 아닌 것 같은 명령 안에도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엄숙하며 그 뜻을 어긴 자에 대한 심판 또한 얼마나 엄격한지 확실히 보여주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심판의 현장에 갔던 늙은 선지자가 어떻게 느꼈습니까?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28절) 동물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허기지지 않은 이유로도 얼마든지 동족을 죽이는 인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빠른 발과 날카로운 이빨을 견딜 동물은 하나도 없기에 언제든 나서기만 하면 모든 동물이 자기 먹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지자를 죽여 놓고 전혀 입도 대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나귀 대신에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보통 사자는 사람보다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사람은 정 먹을 것이 없을 때의 최후의 사냥감입니다. 그런데도 나귀는 죽이지 않고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사자가 제 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한 사실은 사자가 숲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은 것입니다. 그것도 “지나가는 사람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25절) 후부터 선지자가 사람들과 함께 그곳으로 도착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텐데도 말입니다.
아마도 사자는 유다 선지자의 급소만 물어서 바로 절명시킨 후에 전혀 그 시체를 먹을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자는 집단생활을 하기에 사냥을 하면 그 일행이 다 같이 와서 먹이를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자는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사자가 나귀를 안 죽인 것은 둘째 치고 더더욱 신기한 것은 바로 곁에 사자가 있는데도 나귀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함께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상상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건을 보고 들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는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 당신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선지자라도 가차 없이 벌주시는구나. 이자가 선포한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꼴을 당하겠구나!” 최소한도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간섭하고 인도하고 있음에 틀림없구나!”일 것 아닙니까? 또 그런 고백들이 온 성중에 유포되었을 것 아닙니까?
선지자가 비록 당신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해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죽음으로도 당신의 뜻을 기필코 펼쳐 보였습니다. 아니 그가 명령을 어길 것까지 아시고 베델의 늙은 선지자를 붙이시고 시험하셨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지나가는 행인들 모두가 당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하신 소도구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유다 선지자를 당신을 배반시키게 한 후에 사자를 동원해서 죽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각본을 연출하되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디까지나 시험에 빠진 선지자의 잘못을 징계를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선지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당신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오히려 사자가 나타나도 지켜 주는 모습을 연출했을 것입니다. 사자가 나귀도 안 잡아먹고, 나귀 또한 사자에게서 도망가지 않게 하신 그분에게 사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쯤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예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6:22) 왕 외에 어떤 신에게도 절하면 죽인다는 금령을 어기고 여호와께 경배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져 하룻밤을 꼬박 새웠어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사자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우글거리는 데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자가 배가 불러 다니엘을 떡 대신 돌을 보듯이 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습니다.”(단6:24) 굶주려도 보통 굶주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사자의 입을 밤새 봉하신 하나님입니다. 다니엘이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 뜻에 순종했고 또 왕과 세상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선지자와는 정반대의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의 뜻이 단지 다니엘을 보호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전국에 조서를 내려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단6:26)라고 선포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세계 최강국의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는 하늘이든 땅에서든 어떤 이적과 기사를 행하셔서라도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럼 선지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자기는 사나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하거나, 최소한 그분이 살아계심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사자에게 물려 죽게 하시고 하고 있으면 사자에게서도 살려 주십니다.
선지자는 자기 이름을 앞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형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만방의 모든 입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며 그분의 영광만 높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리오가 다니엘의 하나님을 보고 떨며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사실 그전에 다니엘의 삶을 보지 않았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자란 사람들로 자신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부르게 만들되 그 수단은 반드시 자신이 죽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대의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목회자들이 사자 굴은커녕 한 마리의 사자 곁에도 얼씬 거리지 않으려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사자들이 선지자 곁에 항상 우글거리되 꼼짝 못하고 입을 봉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목회자 곁에 사자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어졌기에 구태여 잡아먹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입니다. 유다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벌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아니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과하고 참혹한 징벌을 받은 것 같아도 오히려 본인이 의식을 했든 못했든 그런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일에 쓰임이라도 받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선지자라면 차라리 하나님의 벌을 왕창 받는 모습으로라도 쓰임 받아야합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조차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두 종류뿐이었습니다. 사자에게 절대 잡아먹히지 않는 모습을 자기 삶에서부터 보여준 다니엘 같은 참 선지자와, 오히려 잡아먹히는 유다 선지자 같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상한 제 삼의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선지자입니다. 종교단체 활동과 교제만 일삼는 직업인으로서 선지자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라카에 복음을 전하다 사자에게 물렸는데도 하나님이 지켜주었습니다. 그 후 한 쪽 팔이 덜렁거리는데도 평생을 두고 그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수행하고 있는 한 하나님이 지켜주시기에 자신은 불사(不死-immortal)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과 성도 모두가 사자 굴에 던져지는 각오와 헌신이 없이는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고는 참된 기독교의 영적 부흥은 결코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9/1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