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저희가 상(床)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왕상13:18-20
이스라엘을 분열시켜 북왕국을 세운 여로보암에게 남왕국 유다로부터 온 한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했습니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북왕국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지내러 가는 것을 막고자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레위 자손이 아닌 자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선지자를 벧엘에 있던 한 늙은 선지자가 거짓말로 속여서 자기 집으로 청해 들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선지자더러 이스라엘 땅에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속인 선지자는 벌을 받지 않고 속아 넘어간 선지자만 사자에게 물려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벧엘의 선지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반면에 유다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여로보암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정확히 선포해 북왕국으로 파송한 하나님의 일차적인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또 그는 벧엘 선지자의 초청을 받고는 처음에는 분명히 거절했지만 천사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는 권유에 자신에게 주신 명령이 수정되었나보다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선지자만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의 원칙이 좀 공의롭지 못한 듯 여겨지지 않습니까? 단순히 신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시험과 유혹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순종하라고 해석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말하자면 교과서 같은 해답만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항상 그 신앙은 율법적이 되고 메말라 실제로는 큰 능력이 되지 못하며 나중에는 지치게 됩니다. 성경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세밀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선 이 경우는 평신도와 달리 선지자 즉 목회자를 징벌하는 케이스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지자니까 더 엄격하게 벌을 주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유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자신이 직접 받았습니다. 만약 그 소명이 변경 내지 취소된다면 그 또한 본인에게 직접 말씀으로 주실 것인데도 그런 확인 절차를 전혀 밟지 않았습니다.
십대 청소년들은 친구들에게 가장 큰 영향(peer pressure)을 받습니다. 그런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열 명을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표에서 제일 긴 선을 골라보라고 하면서 미리 9명에게는 두 번째로 긴 선을 고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나머지 한 명이 과연 자기 소신대로 제일 긴 선을 고르는지 친구들을 따르는지 보려고 한 것입니다.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은 친구들이 택한 선을 틀린 줄 알고도 골랐습니다. 친구들의 눈치가 먼저 보였고 그들에게 맞설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선지자는 마치 십대 아이들이나 저지를만한 어리석은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동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자기가 하나님에게 잘못하는 것은 아닐지, 나아가 그 선지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델의 선지자가 받았다는 말씀이 자기가 받은 말씀과 같거나 비슷하면 몰라도 정반대의 내용이라면 반드시 의심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가 받은 소명은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선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선 절대로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심판만 선포하거나, 여로보암의 마른 손을 펴지게 해주어 답례로 대접하려는 것을 받지 말라(왕상13:1-10)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금식 기도하면서 소명을 감당하라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의 죄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을 전혀 먹고 마시지도 않는 모습으로 경종을 울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이스라엘 경내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명령에 따랐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베델의 선지자가 “천사가 네 집(이스라엘 경내)으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말했다”고 했을 때에 이미 그 말의 진정성 여부를 따져보아야 했습니다.
또 그는 자기 소명을 문자적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문자적으로 명령을 받는 사람은 최소한 문자적으로라도 그대로 지키려 애를 씁니다. 하나님은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미 완수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그동안 금식한 것에 허기도 지는데다 이제 유다 땅이 가까웠으니 이쯤에선 먹어도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동료 선지자를 배려하는 인간적인 체면도 보태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경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스라엘 전 백성들에게 지금 북왕국이 얼마나 죄로 더러워졌는지 당신의 뜻을 이 선지자를 통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과 상대해서 벌을 주고 또 다시 고쳐준 큰 업적에 자만했는지 모릅니다. 선지자로서 대단한 능력을 보였던 지난 업적에만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베델의 늙은 선지자는 개인적 호기심인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심(가능성이 더 높음)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선지자와 교제를 나누고 싶은 열정이 앞서서 그렇게라도 거짓말하지 않으면 절대 자기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리라고 짐작한 것입니다.
그는 또 우상숭배로 타락한 북왕국에 대한 영적인 안타까움을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그 유다 선지자의 곁에 함께 묻어 달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왕상13;32)
하나님의 징벌의 원칙은 인간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나 인간의 상식과는 다릅니다. 특별히 선지자에게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 특별히 그 뜻을 제대로 깨달아 따르는지만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 명령에는 절대 오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의로 추측하여 수정, 포기, 대체할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언제나 거룩하고 공의롭고 완전하므로 반드시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 뜻을 제대로 모를 때는 차라리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회자는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일대일로 직접 받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 세대의 죄악을 통렬하게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로 초대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말씀을 자기가 책임지고 전하되 자기의 삶에서 완전히 실천하는 모습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깊은 영적 교제가 목회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사태는 유다 선지자가 죽은 3천여 년 전이나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 것은 둘째 치고 성경을 푸는 것마저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유명 목사,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를 짜깁기하여 자기 것으로 포장합니다. 내용은 매끄럽고 그럴듯한데 영적 권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받은 말씀에 자기의 전부를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씀만 골라 모으다 보니 죄에 대한 통박과 십자가 복음이 결여되어서 더 그렇습니다.
나아가 동료 목사들을 하나님보다 먼저 의식합니다. 세상적으로 눈길을 끌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큰 일만 하려듭니다. 부와 권세를 쥐고 있는 교인들의 눈치부터 살핍니다. 자기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변개, 곡해 합니다. 청중의 기분에 맞춰주어 교인 숫자만 늘리려 듭니다. 한 가지 큰일을 이루고 나면 평생을 두고 그것을 훈장처럼 달고 다닙니다. 적은 일과 작은 자에게 충성하는 것을 아주 번거롭게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더 엄격한 징계나 심판이 이런 목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일반 성도라고 크게 안심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하여 하나님과 일대일로 말씀을 통해 깊이 교제하는 일이 드뭅니다. 목회자들의, 그것도 대형 유명 교회의 목사들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릅니다. 마치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기도하지 않고 목사가 기도해주기만 바랍니다. 그것도 자신의 유익과 형통을 위해서만 말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마저 목사에게 미룹니다. 심지어 상식적으로도 세속적이고 빤히 잘못된 일을 갖고 와서 그럽니다. 목사가 승낙하면 성경에 반(反)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핑계를 대며 밀어붙일 작정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이 임재해 내주하고 있습니다.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저 편하게 입에 떠 넣어주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세상은 악하고 추한데 아니 갈수록 더 그렇게 되어가는 데도 성도의 안일함과 나태함이, 더 정확하게는 죄악과 우상숭배가 흘러넘칩니다. 이스라엘 경내에서는 절대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성도와 교회가 나서서 먼저 더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말씀은 사라지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기술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한마디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심판과 구원이 실종되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호4:6,9) 반드시 목회자들에 대한 심판이 먼저 오고 중할 것입니다. 또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8:11)도 임할 것이며, 아니 이미 임했습니다.
9/11/2006
언젠가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터 성령을 거두신다는 말씀(살후 2:7)과 하나님의 집(교회)에서 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벧전 4:17)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슴깊이 새겨보아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백성을 정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예리하게도 지금의 현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들을 대할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많은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의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바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렘9:14...) 말씀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faithfulness, 즉 말씀을 왜곡함이 없이 하나님이 뜻하신대로 곧이 곧대로..., 물론 하나님의 뜻을 옳바로 찾아서...)입니다(고전 4:2)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 자들을 하나님이 도무지 알지못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할때가 온다(마태 7:22-23)는 사실은 참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