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5)
흔히 강대상에서나 성도들끼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라고 말하며 또 그런 언급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고 넘어갑니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조금 따져볼 필요는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하지 않고 ‘대신하여’ 죽었다고 말했는데 틀림없이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골랐을 것입니다.
‘위하여’라는 의미는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그 후 구원 받은 성도를 보호하고 인도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위하여’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하여’에는 예수님이 단지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개념만 강조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위해 선행과 공적을 이룬 예수님의 행위라는 측면이 앞서기 때문에 인간도 그 십자가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 쪽에서의 절박한 의미와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리 크게 궁급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이 인간에게 더 좋게 해주려고 죽었다는 오해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인간 전체를 위한 구원 사역이었다는 객관적인 진술이라면 ‘위하여’라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었다는 주관적 고백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간단하게 ‘인간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나를 위하여’ 죽었다고 하면 어떤 느낌부터 듭니까? 뭔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신자가 된 후에도 자꾸 하나님에게 복만 받으려는 섣부른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 특별히 나를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이제는 초점이 자신에게 맞추어졌습니다. 내가 반드시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가 분명히 포함된 표현입니다. 구태여 단어 하나를 두고 따져 본 이유는 바로 이 차이 때문입니다. ‘위하여’에는 내가 반드시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표현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위하여’ 대신에 ‘대신하여’라고 말해야 맞습니다.
말이란 이처럼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되면 예수님이 해주신 것뿐이라 구태여 내가 그 분을 위하여 해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미 말한 대로 자꾸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이제는 내가 그분을 위하여 해드릴 것만 남았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죽음에서 구원해주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셨으니 우리로선 목숨을 다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는 십자가에 벌써 죽어 없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없어졌는데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2:20a)이라는 고백이 진심이었다면 어떻게 나를 위해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육신적으로는 우리가 죽지 않고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그것도 새 사람으로 거듭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우리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새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가 된 후에 예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단순히 의의 열매 내지 종교적 성과로만 해석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아주 성결하게 살아야 하고 품성과 인격을 고매하게 바꾸려거나, 아니면 교회 일에 아주 큰 성과를 올리려고만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의 열매란 반드시 그분의 의의 열매여야지 자기의 의의 열매가 되어선 안 됩니다. 또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어야지 그분께 무슨 선물이나 세상 업적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따져 우리가 예수님에게 과연 무엇을 해드릴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성경공부와 기도를 열심히 한들, 또 이웃에 구제와 선행을 많이 베푼들, 심지어 교회를 크게 지어 바친들,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 당신에게 무슨 큰 유익과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진정으로 바라며 또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모두 내가 나를 위해 산다는 인생관을 가졌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스스로 자기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마저 배반했기에 그것을 원상으로 회복하려 한 것 아닙니까?
선악과란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는가 안 섬기는가 살펴보다가 섬기지 않으면 바로 벌을 주겠다는 심술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당신의 품 안에서 살아야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랑을 박차고 사단을 좇아갔습니다. 오직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애(自己愛)가 죄의 출발이며 옛사람의 실태입니다. 그 자기애를 죽이는 것이 바로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사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 오직 예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은혜만 입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를 피 흘리기까지 죽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완전히 죽지 않고는 내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단순히 위로나 치료나 개선에 불과하지 중생이 아닙니다. 옛사람에 붕대만 감은 것입니다. 정말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란 바로 자기가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특별히 하나님마저 그 사랑을 키우는 일에만 동원하겠다는 의지이자 성향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믿음이 새로워지거나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또 그것이 바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며 그분께 드릴 유일한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으면 비로소 그분이 우리 속에서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신자에게 가장 원하는 일이자 또 바로 그것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나 대신 죽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위해 죽은 십자가를 나를 대신해 죽은 십자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9/4/2005
아직도 자기길에서 자기를 위해 발버둥 치는 저의 낡은 옛사람이
성령님 은혜로 진정 거듭나길 기도합니다.
귀하신 목사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