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후5:15,16)
예수님이 우리 각자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당연히 신자의 구원 이후의 삶은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뜻 대신에 예수님의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어야 합니까? 자기가 세워 놓은 소망과 계획을 다 버려야 합니까? 윤리적 죄는 하나도 짓지 않고 구제와 선행에 열심이어야 합니까?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맡은바 직분에 모든 것을 희생하여 최우선적으로 충성해야 합니까? 지금 본문에는 그렇게 하라고 언급한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은 두 문장이 접속사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문장은 이유나 근거가 되고 이어지는 문장은 그 결과나 권면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로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죽음의 근본적인 의미가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진 재물, 권세, 명예, 외모, 지성, 교양, 심지어 도덕성, 종교성마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땅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어야 할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공회원들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었어야 했고, 가장 멀리했어야 할 사람들은 죄인, 세리, 창녀, 병자, 어린아이, 과부들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였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기준의 반대가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쌍하고 고달픈 사람을 더 사랑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인간의 겉모습 대신에 속사람을 판단했다는 의미 즉, 겉으로 위선을 떠는 자들 대신에 그 마음의 본성이 착한 자를 좋아했다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위선을 떨고 그 중심에서부터 더럽고 추한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겸비한 모습으로 나오는지 아닌지의 여부만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윤리적 인간적 겸손을 높이 산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본인이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자는 아무 매섭게 저주하셨고, 반면에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꼭 자기 죄를 회개하여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받아 주셨습니다. 어떤 형편과 죄악에 빠져 있더라도 단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만 인정해도 누구든지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인간 스스로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며 반드시 성령의 간섭이 있어야 함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육체대로 판단하시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자가는 당연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착하고 똑똑한 자들만 하나님이 사랑하셨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한 순간에 모든 인간을 몽땅 다 죽여 없애야 했습니다. 홍수 때 당대의 의인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 때의 아브라함처럼 그래도 살아남을 자가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노아든 아브라함이든 육체대로 하면 우리와 하나 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일방적 은혜로 구원 받은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에도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사11:1,3) 인간을 그 육체대로 심판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재물, 권세, 명예, 교양, 지성, 도덕성, 종교성, 그 어떤 것들도 심지어 영성마저 인간을 절대로 더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자신은 그리스도마저 육체대로 알았던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저히 메시야답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 죄 많은 자들만 상대하고 자신 같이 의로운 자들을 오히려 매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자신은 어느 누구보다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서마저 큰소리 쳤다는 뜻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심판하려 했다면 자신부터 제일 먼저 죽었어야 했다는 것과 또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한 이유는 바로 자신부터 살려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너무나 큰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자기 대신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살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제는 자기도 어느 누구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도덕적 삶, 사회적 선행, 종교적 공적들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또 다시 그분에게 그런 것들을 바쳐야만 그분을 위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분 앞에서 모든 신자는 오직 “죄인 중의 괴수”로 서 있을 뿐이며 반면에 그분은 그럼에도 보이고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않고 신자를 사랑해 주십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하면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드릴 것,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은 그분이 나에게 하셨듯이 이제는 아무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자신부터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선 자신의 정체성을 재물, 권력,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지성, 교양, 도덕성, 종교성, 영성 등 자신이 가진 것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을 더 성숙시켜서 나는 최소한 이 정도로 의롭고 신령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나 소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을 육체대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 수준이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도 최소한 그 수준에 어울리는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식만 취했다 뿐이지 다시 예수 믿기 전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물론 성도는 이웃을 용서하며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없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며 전도와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두말하면 입만 아픈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빼고는 예수 안 믿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라면 무슨 일이든 반드시 예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예수 안”이라는 근본적인 의미가 예수를 믿었기에 불신자보다 더 착해져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해질 수 있을 만큼 그 본질이 절대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한 바탕 위에서만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부터 자신을 육체대로 알지 않겠다는 것은 다른 말로 내가 나를 봤을 때에도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기야말로 의인은커녕 가장 추악한 자인데도 오히려 가장 의롭다고 자랑했었고 하나님이 있다면 나 같은 자에게 복을 주어야 한다고 큰 소리 쳤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지금도 거기에서 백 보 오십 보이기에 날이 갈수록 더더욱 불쌍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런 깨달음마저 전혀 불가능했었습니다. 내가 나를 가장 불쌍하게 보는 일이 어떻게 스스로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전에는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육체대로 보았기에 결코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했지만,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고 나니까 비로소 남들도 똑 같이 나만큼 불쌍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예수 믿은 은혜요 권능의 핵심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 그분께 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을. 너무 고상하고 위대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 십자가 자체가 고상하고 거창하고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은 세상의 모든 추하고 더러운 찌꺼기들을 몽땅 태운 곳이었습니다. 또 그 찌꺼기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온갖 모습으로 자기를 치장했던 것들입니다.
이제 신자 또한 십자가에 자기의 전부를 태워 없애야 합니다. 종교적으로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아름답게 보고 있고 그래서 주위 사람도 이 아름다운 나에게 걸맞게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고집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육체대로 판단하겠다는 성향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말씀, 기도, 구제, 봉사, 전도, 십일조에 열심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아직도 다른 사람을, 특별히 자신을 육체대로 보고 있다면 그 모든 섬김은 허접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는 중일뿐입니다.
9/5/2006
깊은 은혜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을수록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지도자라는 목사님들도 그렇고, 우린 너무 자신을 자랑하려 합니다.
지식과 능력과 업적과 성과 등(목사님께서 위에서 지적하신 모든 자랑할만한 것들)을 내세우며 말입니다.
근데, 그게 무슨 효능이 있을까요?
세계최대교회가 주님께 도움이 될까요? 목적있는 교회가 없으면 주님 사역은 불가능할까요?
우린 하루빨리 이런 헛된 자랑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저부터 먼저.....................
알면서도 못하고 있는 한심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 주시는 목사님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