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마10:17,17)
히브리어의 특징 중의 하나는 비교급, 최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강하고 좋은 의미를 나타낼 때는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두 번 말하고 최고라는 의미는 세 번을 되풀이하면 됩니다.
젊은 부자 관원이 영생을 얻을만한 선한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주지 않고 오히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의미는 일차적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이 히브리어 특징에 연관된 것입니다. 청년의 질문은 명시적 표현이 없어도 사실 비교급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계명을 잘 지키고 선행을 많이 하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얻을만한 “무슨” 선한 일이 없느냐고 물은 것은 더 괜찮은 선행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행에 비교 우위는 따로 없다는 뜻으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나에게 묻느냐”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본인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본인과 상관없이 성부 하나님만 선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대신에 이 말과 앞의 반문을 연결하면 나에게 와서 비교적 괜찮은 선에 관해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답의 끝에 영생을 얻기 위해 “나를 좇으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에 당신이 바로 그 선한 이라는 뜻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네가 지금 다른 종교지도자보다는 내가 더 나아보이므로 나에게 더 좋은 선행(better)이 무엇이냐고 묻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최고로 좋은 선(best)도 묻지 말라. 나는 오직 유일한 절대적 선(the only absolute good)이다.”
즉, 선이란 하나님의 기준에서 절대적 선뿐이지 보통급, 비교급, 심지어 최상급의 선이란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착한 자가 천국을 가고 악한 자가 지옥을 간다는, 행위 구원은 선을 비교해서 분류하는 셈인데 그것만큼 당신의 속성과 상충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이란 항상 선과 악을 ‘더’와 ‘덜’로 비교해서 나누는 것에 불과하지 절대적 선악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아무리 고매한 철학가나 심오한 종교지도자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해하는 한 그것은 진리니 내 가르침대로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요6:35,8:12,11:25,14:6, 마11:28-29)라고 선언했고, 또 구약성경 전부가 자신에 관해 예언한 것(사61:1-2, 막8:29, 요8:56,5:46,5:39, 눅24:27,44)이라고 자증(自證)했습니다.
나아가 자증과 선언을 넘어서 아예 “Come and Follow!"라고 명령했습니다. 절대적 선이신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고는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준 후에 자기를 따르라고 감히 명령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안락을 보장해주는 재산이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지고의 선행보다도 당신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명령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절대적 선을 말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완전히 입증하였습니다. 역사상 선행과 구제에 가장 열심인 사람들로 구성된 유대 대공회도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구실과 로마를 반역했다는 정치적 음모 외에 도덕적 선악에 연결된 죄는 하나도 책잡지 못했습니다. 실제 범죄한 적이 전혀 없어도 어떤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사상을 갖고 있으면 죄가 되는 경우를 양심수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가장 완벽한 양심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비교의 대상(a better god)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최상급(the best God)으로 칭송 받을 대상도 아닙니다.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the only God)입니다. 그 분을 두고 인간이 취할 태도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거부, 외면, 저주 등 100% 완전한 반대와 순종, 경배, 찬양 등 100% 완전한 찬성입니다. 그 중간 입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독교가 비교적 맞고 선하며 더 나은 종교인 것 같아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그렇게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그런 자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선은 다른 말로 그냥 단순한 선(simply good)이라는 뜻입니다. 그 수준이나 정도가 낮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른 불순물이 전혀 안 들어가 있는 순수한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그냥 선입니다. 악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이미 선이 아닙니다. 절대적 선이라고 해서 특별히 아주 강해야 하고 더 좋아야 한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특별히, 더는 그 자체로 이미 비교급이 되어버립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단순히 좋으면 그만입니다. 구태여 그분을 위해서 더 뜨겁게, 더 강하게, 더 거룩하게, 더 고상하게, 더 심오하게, 더 선하게 따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저 항상 좋은 것입니다. 더 좋은 일이 없어도 예수님이 마냥 좋은 것입니다. 더 나쁜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 전혀 밉지 않고 오히려 그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토록 주는 것 없이 싫고 밉던 예수가 어느 순간엔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가 다른 종교를 대할 때도 그냥 싫은 것입니다. 구태여 비교해서 나쁜 점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과 얼굴 붉히며 기독교의 더 좋은 점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 소개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같은 죄인도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좋다는 것은 지정의의 차원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영혼이 예수를 따르기를 소망하기에 그저 좋아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더 은혜를 베풀어 주어서 좋아하면 벌써 그분을 비교급의 대상으로 떨어트리는 아주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는 우리와 정반대입니다. 저들은 매사를 지정의로만 판단합니다. 영혼이 사단에게 묶여서 하나님을 단순히 좋아할 줄은 전혀 모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조차 상상을 못합니다. 오직 지정의로만 판단하여 기독교도 여러 종교 중의 하나 내지는 조금 더 고급한 도덕률을 가르치는 종교로 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가도 절대적 선을 맛보지 못합니다. 너무나 쉽고도 단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입니까?
그러나 비록 누가 선택의 예정함을 입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선한 유일한 하나님인 줄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직 복음 안에 안 들어와서 모른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한 걸음 더 나가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있으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자기 지정의로 판단해보고 그 가르침만 따르기로 한 자들입니다. 영혼은 여전히 사단에게 묶여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최상급 내지 비교급으로 소개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냥 단순이 동일한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취급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더 나은 종교를 나에게 묻느냐? 이미 네가 판단했지 않느냐? 하나님이 한 분 뿐이라면 구원의 길도 하나뿐일 것 아니냐? 그냥 단순히 그분을 좇으면 되지 않느냐? 어찌 이런 간단한 진리도 그 잘난 지정의로 판단되지 않더냐? 이 사단의 자녀들아!”
신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분을 따르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 가르침을 따른다고 해서, 예컨대 삶에서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분을 따르는 것과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나 누구를 만나도 그저 그냥 그분이 좋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그분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할 소망과 기쁨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신자 또한 완벽한 양심수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에 비추어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용인하지 않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전부는 예수를 단지 위인, 좀 더 나은 종교 창시자, 최고로 뛰어난 도덕 선생으로 보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고 그 분 외에는 내 개인의 구원의 길도 인류 전체가 살 길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 때문에 감옥을 가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분을 그저 좋아하는 마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저 좋습니까? 더 좋습니까? 최고로 좋습니까? 정답은 오직 하나 첫 번째입니다. 설마 지금도 헷갈린 것은 아니지요? Jesus is simply good with absolute goodness of God.
9/21/2006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저 좋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