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6:33-7:2)믿음을 키우려면 믿음을 죽여라

조회 수 1542 추천 수 131 2006.09.24 06: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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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6:33-7:2)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 사마리아성을 에워싸는 바람에 성중에는 아이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이런 큰 재앙에 대해 왕과 엘리사와 왕의 장관 세 사람이 반응하는 모습이 각기 다릅니다. 사람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 대응하는 태도도 바로 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왕은 재앙이 여호와께로 왔으니 더 이상 여호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이 재앙을 그치게 해서 이전보다 더 좋게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관은 하나님조차 그런 기적 같은 구원은 베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신자는 환난을 당하면 엘리사와 같은 태도를 취하여야 합니다. 환언하면 다른 두 사람의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잔뜩 안은 채 그 내색은 않고 어쨌든 하나님의 벌이니까 피할 길이 없고 가만히 당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슬람 같은 일종의 숙명론적 신앙관입니다. 이슬람도 유일신과 구약성경을 믿으며 아브라함을 같은 믿음의 조상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든 일어나는 현상 그대로를 알라 신의 뜻이라 믿습니다.  단적인 예로 차를 몰고 가다 고장이 나도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차는 버려두고 걸어가는 식입니다.    

간혹 신자도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시므로 환난을 당하면 ‘순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체념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는 가운데는 사단과 인간의 죄와 부패된 피조세계가 만들어내는 잘못을 당신만의 선한 뜻이 있어 묵인하는 부분도 상당히 있습니다. 따라서 숙명론은 사단과 인간의 잘못과 세상의 모순이 빚어낸 폐해마저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야기시킵니다.  

숙명론이 겉으로는 인간이 신의 뜻에 감히 항거할 수 없다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기왕에 발생한 외부적 현상을 아무런 내적 여과나 검증절차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신에 대한 맹종이 인간에게 유익한 현상에 대한 것이라면 그나마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잘못된 상황이라면 그대로 그 잘못을 수용 내지 방치하는 셈입니다. 인간이 그 나쁜 현상을 적극적으로 개선 변화시킬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숙명론은 오히려 어떤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 방임주의에 불과합니다.      

왕의 신하의 경우는 왕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재앙을 겉에 드러난 현상만 보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동원해 나름대로 연구 분석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점검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라도 이 일만은 해결해낼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려버렸습니다.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습니까? 그로선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쯤이면 먹을 것이 풍부해져서 너무나 싸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말이 도저히 성에 안 찬 것입니다. 지금 먹을 것이 완전히 동이나 자식들을 삶아 먹고 벤하닷의 군대는 눈도 꿈쩍 하지 않고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데 어디에서 식량이 그것도 바겐세일 할 정도로 생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창을 낸다 해도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모세 시대처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나도 바겐세일 할 정도까지는 절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주시지 썩어 없어질 정도로 과하게 주는 분이 아니라는 영적 지식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자기 지정의와 지난 체험에만 의존하여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마저 자신이 지레짐작해버렸습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통상적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시지만  그런 원칙도 얼마든지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지 않았고, 또 그 현상을 자기 지정의와 경험으로만 판단하지 않았고, 대신에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를 붙들었습니다. 신자가 환난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때 그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믿음으로 엘리사 같은 담대한 선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굶은 지 너무 오래되어 헛것이 보이려 할 때에 자식은 차마 삶아 먹을 수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밖은 적군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는데 내일 우리는 푸짐한 뷔페로 식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러면 신자들끼리도 이구동성으로 “너무 굶어 정신이 이상이 되었나봐? 하나님 저 사람을 긍휼히 여기어 제 정신이 들게 해 주시옵소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신자는 환난 때에 엘리사와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엘리사는 특별히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믿음이 그렇게 되도록 노력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한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여 여호와의 직접적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분명한 말씀을 받지 않고는 “내일 이맘때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선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당신이 정해서 섭리하는 법칙까지 초월해 기적을 보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살아 계신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환난이 닥치면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왕이나 왕의 신하 같은 태도를 취하기 일쑤입니다.

엘리사 같은 믿음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말 만큼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엘리사 같은 신령한 능력이나 은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수십 년이나 했어도 환난만 닥치면 온전한 믿음도, 온전한 불신앙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딜레마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신자는 엘리사를 본받기에 앞서서 왕과 왕의 신하를 본받지만 않으면 됩니다. 억지로 믿음을 키워 엘리사와 같은 수준이 되려고 해봐야 되지도 않습니다.

여호와를 익히 알고 있었던 왕과 신하의 믿음에서 결정적인 하자는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 연약하고 성숙되지 못한 것입니까? 재삼재사 말하건대 그들도 최소한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식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믿음보다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권세가 제일 큰 자입니다. 자기 말 하나로 다 되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권세로도 충분하니 하나님이 그리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 별로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또 실제로  체험해 본 적도 없습니다. 현 상황에선 왕인 자기도 속수무책인지라 구태여 하나님을 더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신하는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왕의 최측근 참모로 무슨 일이든 왕에게 자문하는 모사(謀士)였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이라 해도 자신이 판단하여 아니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있었던 잘못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권세가, 다른 사람은 지혜가 너무 뛰어났던 것입니다. 그 세상의 권세와 지혜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앞선 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세상 지혜가 뛰어난 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잘 인정하지 않는 법입니다.

역으로 말해 믿음은 자기 권세를 없애고 자기 지혜를 없애야만 제대로 발동합니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만 더 믿으려 한들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몸속에 암세포가 왕성하게 활동하여 혹 덩어리가 커가고 있는데 그것은 그냥 둔 채 몸이 튼튼해지기 위해서 영양을 자꾸 더 섭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반 세포보다 활동력이 더 센 암세포에게도 영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에 오히려 암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껏 우리 식으로 키우려 했던 믿음은 오히려 죽여 없애야 합니다. 암 덩어리는 놓아둔 채 자꾸 영양만 보충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아직도 의존하고 있는 인간적 권세, 능력, 지혜, 건강, 재물, 주위의 도움 등 모든 것을 먼저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떤 간섭과 인도에도 자기 생명을 걸고라도 따르겠다는 준비가 먼저 완전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에 힘입어 그분의 권세에 따라 반응하겠다는 자세가 믿음입니다. 또 그런 자세로 잘 준비시키는 것이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미 잘 믿고 있는 기본적 믿음(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히11:6) 위에 동일한 믿음을 더 늘리려 억지로 용을 써봐야 피곤해지기만 합니다.      

신자는 사방팔방으로 피할 길이 도무지 없는 재앙이 닥쳐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벌이나 간섭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선 절대 안 됩니다. 구원의 길을 달라고 울부짖으셔야 합니다.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또 자기의 얄팍한 세상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지 말고 심지어 자신의 신앙적 실력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상황을 아예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 무조건 울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도 현실을 예리하고도 냉철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분석해낸 문제를 두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전에, 아니 항상 갖추어야 할 것은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 자세, 아니 믿음입니다. 신자가 자기 능력과 지혜를 죽이면 죽일수록 믿음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까지 완전히 내어드리고 자기 속에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열정으로만 가득 채워지면 누구라도 엘리사와 같이 그분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오늘은 당장 굶어죽게 생겼어도 내일은 호텔에서 뷔페 식사를 즐길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절대로 자기 생각에서 나온 희망이 아니요, 의지적인 믿음으로 쥐어짜낸 가식적 환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온전하게 헌신한 신자에게 직접 심어주신 그분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는데 따르지 않을 신자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환난을 당해 반응하는 신자의 태도(불신자의 태도가 아닙니다)는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숙명론적으로 체념하는 것, 2) 인간 이성으로 스스로 지레짐작하는 것, 3) 믿음도 불신앙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그저 하나님께 떼쓰며 매달리는 것, 4)엘리사와 같이 재앙 중에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아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해당됩니까? 혹시라도 4)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솔직히 3)입니다. 단 자꾸 믿음을 키워서 4)로 바꾸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엘리사보다 더 신령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9/23/2006

김문수

2006.09.24 08:12:20
*.75.11.125

아멘!!!!!!!!!!!!

허경조

2006.09.24 10:51:23
*.80.180.152

아멘 아멘

정순태

2006.09.24 11:08:36
*.75.152.56

"세상 권세가 앞선 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세상 지혜가 뛰어난 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잘 인정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주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듯하여 더욱 가슴 아픕니다......

저 자신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김광찬

2006.09.24 22:40:39
*.8.157.111

아멘 †
구체적인 믿음의 길을 인도해 주신
말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형주

2006.09.25 00:57:43
*.173.42.18

아멘!

김유상

2006.09.27 03:31:06
*.170.40.27

아멘! 절 향한 말씀 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시정토록 노력하겠습니다.

날마다순종

2021.01.15 14:32:59
*.14.99.253

날마다 나를 죽이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좆기를 간구합니다. 진토같은 성정으로 언제까지 들쑥날쑥 하겠냐만은 언제가는 망설임없이 날마다 순종토록 변화시켜 주실 것임에 그 소망과 감사함으로 즐거이 주님 좆습니다. 성령님 그리 할 수 있도록 늘 저를 도와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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