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아인슈타인이 인생 말년에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졌는데도 아직도 외롭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 의미는 인생에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되돌아 봐도 완전히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고 여전히 뭔가 부족한 부분이 남아 있더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반드시 고상한 도덕을 실천하고 심오한 사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까지 불리었던 신학자이자 의사인 슈바이처는 실상은 아주 냉혹한 의사로서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성공이 과학이라는 한정된 분야였듯이 그 또한 선을 실천했다는 부분을 빼고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 사회에선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여자를 수도 없이 사귄 플레이보이로 판명 났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외롭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사랑할 대상도 없었고 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 해주는 상대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외로움이란 인간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하나님만 잘 믿으면 그 외로움이 없어지고 충만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담은 범죄 하기 전 역사상 어느 누구도 체험 못한 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동행을 체험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아담도 그것도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외로웠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외에 인간끼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외로움을 없애려면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웃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서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함께 살며 서로 사랑하게 했습니다.
다른 말로 아담과 이브는 타락하기 전까지는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이 고독과는 전혀 관계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과, 또 서로 간에도 진정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범죄 하자마자 바로 서로 손가락질 하며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각자가 자기 살 방도부터 먼저 챙겼습니다. 자기에게 속한 것을 따로 움켜쥐려는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 감출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죄란 이처럼 자기의 것으로 자기를 둘러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타락 후의 모든 인간에게 고독은 생래적인 영원한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려면 그 근본적인 외로움을 없애주어야 합니다. 도덕적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열심히 하고, 철학적 사고를 깊이 있게 하며, 과학적 업적을 많이 쌓아도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기에 그 교제를 회복하지 않고는 절대로 외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죄가 인간으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완전한 사랑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리인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셨습니다. 삼년간 동고동락하며 인간적 사랑을 가장 깊이 나눴던 제자들마저 외면했던 그 외로운 자리에서 인간의 고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생래적 고독의 첫 번째 원인을 제거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죄와 그로부터 생긴 인간 사회의 온갖 죄악도 깨끗이 씻어주셔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옥의 형벌로 떨어질 심판에선 구원이 되었지만 또 다른 고독은 해결 안 된 채 구원 받은 신자의 책임으로 넘겨졌습니다.
바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동료 인간을 사랑 못해 외로웠던, 즉 죄와 상관없이 생긴 고독의 문제는 신자더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도 외로워지는 문제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없어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룰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웃 사랑의 모습을 아담과 이브의 예처럼 부부 간의 사랑에서부터 찾으려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신적인 결합이자, 최초의 교회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더불어 아내도, 아내와 더불어 남편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과 완전한 동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랑의 결합이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도 되어야 합니다.
간혹 구조적으로 가정을 못 갖는 불행한 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휠체어 탄 핸디캡 여인이 목사님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저는 너무 외롭습니다. 저는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를 만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동행을 이루었어도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하니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회복시켰습니다. 이제 이웃끼리 사랑은 신자가 회복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증거는 자신의 인생이 외롭게 여겨지는지 아닌지 여부입니다. 신자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웃이 자신에게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벌거벗어도 서로 간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지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럴만한 가족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불신자나 핸디캡을 이웃으로 알고 지냅니까?
외로움은 반드시 외로운 자들끼리 만나야만 없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으면 인간이 한 없이 고독해지는 존재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자라야 그 고독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쇄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이웃들의 그런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하게 성공한 인생을 살려는 소망을 키우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0/4/2006
"죄란 이처럼 자기의 것으로 자기를 둘러싸버리는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 - 역시 목사님다운 신선한 진리 한조각을 맛보고 돌아갑니다.
감사!!! 샬롬!!!
*ps : 김문수 각하! 맘대로 진급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별 좀 달아 주실 수 없으신지요?
말 타면 종 두고 싶다고, 부사관에서 장교로 출세하고 나니, 엉뚱한 욕심이 생기는군요!
역시 주제 파악도 못하는 저의 한계를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습니다......널리 이해하시기를~~~~~^^;;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세상에~~~~~~대위가 어딥니까? 대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