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와 말씀 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6:33)
신자가 전혀 예상치 않은 환난을 겪으면 온갖 상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허락했으니 그냥 군말 말고 조용히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재앙을 내렸기에 거두어 달라고 하는 것은 그분 앞에 교만이 되거나 아무 소용없는 짓은 아닐까? 혹은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아니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이런 재앙까지 허락하시다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나도 모르게 죄를 지었는가? 그렇다면 나보다 더 죄 많이 짓는 교회 다른 집사는 왜 저리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가? 아니면 이전에 지었던 그 큰 죄 때문에 아직도 이러시는가?
이런 의문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어쨌든 기억나는 대로 잘못한 것들을 떠올려 하나님에게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재앙을 없애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사정은 나아지는 기미가 없고 때로는 더 악화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과연 이런 하나님을 계속해서 믿고 따라야 하는지 의심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신자라면 그 모든 질문에 다 적용되는 유일한 정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의심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배반하려 했든 마음들을 꺼내 놓고 회개하며 다시 한 번 믿음을 가다듬은 후에 열심히 기도하여 그 재앙을 이겨내려 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장기간 포위하여 공격했습니다. 성중에 먹을 것이 완전히 동이나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왕은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 구원을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아예 선지자 엘리사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죄를 통박하고 심판을 선포하니까 이 재앙도 그가 여호와께 기도해서 불러들였다고 본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잘못 하나 없이 극심한 고난을 한꺼번에 겪은 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9) 하나님이 재앙을 주셨지만 그 재앙을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면 재앙을 주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재앙 자체가 목적이라면 재앙을 거두지 않고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그냥 버려두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재앙을 당한 신자로선 재앙을 빨리 없애달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인 신자를 믿음으로 살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상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믿음으로 살게 하려고 재앙을 허락하셨는데, 신자는 어떻게 하든 재앙을 빨리 없애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앙을 거두는 것도 어차피 당신이 계획하신 때와 방법이 있다면 신자는 구원을 간구하는 대신에 그 재앙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 중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재앙을 없앨 수 있는 그분의 능력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그 능력을 얼마나 신속하게 많이 얻어내느냐를 믿음의 크기로 봅니다.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우리는 할 수 없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니까 그분의 능력에 무임승차하는 실력을 두고 믿음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훨씬 다른 것입니다. 신자가 가능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내어 그대로 따르는 실력입니다.
다른 말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권위(authority)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예로 들어봅시다. 아버지는 분명히 아들보다 힘이 셉니다. 그러나 아들이 잘못했다고 아버지가 일일이 무조건 벌을 주지 않습니다. 반드시 잘잘못을 분명하게 깨달아 고치라는 목적으로 벌을 줍니다. 언제든 벌을 주고 야단칠 능력은 있지만 그 능력을 반드시 올바른 목적과 정당한 때와 방법으로 행사해야만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섭니다.
반면에 아들을 뜯어 고치려 무조건 야단치고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단지 아버지의 벌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것처럼 할 뿐입니다. 반대로 공부 잘하면 반드시 값나가는 선물을 주겠다는 아버지도 있는데 그러면 아들은 오직 선물을 많이 타려고 아버지 말을 듣습니다. 두 경우 다 아버지가 권위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력으로 연약한 자식을 꼼짝 못하게 옭아맨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이 그렇게 합니다. 사단은 세상에 자신의 능력만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을, 신자를 포함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고 상벌(賞罰)이라는 도구를 너무나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풍요롭게 만들거나 궁핍에 떨어지게 하거나 자유자재로 할 줄 압니다. 사실은 그런 상벌에만 매달리려는 사람들의 헛된 욕심에 사단의 능력이 무임승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가 따르지 않는 한 그 능력의 사용을 우리가 믿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절제하십니다.
정말로 아버지로서의 올바른 권위를 갖고 아들을 다스리면 벌주거나 상을 베푸는 것과는 관계없이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경하게 됩니다. 또 그런 존경이 바탕이 되어야만 참된 순종이 나오고 사랑과 신뢰에 기초한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의지하는 것은 모든 신자가 할 줄 알고 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어서 빨리 재앙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하면, 아버지가 진정으로 자기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안중에도 없고 야단치는 것만 어서 빨리 그만두라고 속으로 불평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재앙을 허락하거나 거두어가는 하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꼴입니다. 비유컨대 아버지가 가진 돈만 사랑하는 것이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그분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믿음만 의지적으로 키우려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철없는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은 좀체 없습니다. 나아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들은 그 능력 대신에 권위에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시켜도 그 목적과 뜻에 의심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도 이럴진대 신자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그 능력을 믿는 믿음만 키우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도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어서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권위에 비추어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많기 때문에 신자들 눈에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에게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그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비록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재앙에 처해있고 또 그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당신께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신자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만방에 선포된다는 소망을 안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이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많이 받아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위에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얼마나 잘 반응하느냐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진정으로 존경해서 언제든 온전히 신뢰하여 무슨 일이든 순종해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선한 뜻이 있더라도 자식이 말을 제대로 안 들으면 그 아버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신자의 순종 외에 하나님의 권위가 그 능력과 함께 이 땅에 발휘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권위가 없이 능력만 나타나면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신자가 재앙 가운데 그분의 권위를 발견해야 비로소 하나님에게는 참된 권위가 되고 신자에게는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얼마나 기도 많이 해서 빨리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니까 엄마가 젖을 준다는 것을 눈치 채고 배만 고프면 울기만 하는 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므로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것은 갓 믿은 신자도 어느 누가 안 가르쳐 주고 자신이 노력 안 해도 압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애꿎은 일이 얼어나도 존경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천국에 가서 존경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성 중에 먹을 것이 동이나 자기 아들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하나님을 존경할 수 있을까 조롱을 해도, 심지어 자신도 그런 의심이 문득 스쳐지나갈지라도, 세상에 진정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임을 확신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럴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그분 앞에 경배와 감사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반응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전의 수많은 신앙 체험으로 생생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분과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셔서 사단의 종에서 빛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은혜 하나 때문에라도 더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현재 정말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자신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엘리사 시절처럼 자식을 삶아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식더러 돈을 벌어오라고 강요할 만큼 사방팔방이 다 막혀 있어도 하나님을 존경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너무 사랑스러워 믿음과 연관이 잘 안 됩니까? 그럼 쉬운 질문으로 바꿔보겠습니다. 환난을 만나면 빨리 없애달라고 기도부터 열심히 합니까? 오히려 그런 힘든 가운데도 하나님은 정말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이유와 근거를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전자는 종교적 도구를 사용해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일 수 있는 반면에 후자야말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9/22/2006
인간적 관점의 믿음과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관점의 믿음차이를
현시대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성령의 감동에의한
사실적인 분별의말씀을
듣고있는 그자체가
기적인것같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