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22:29-32)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에게 계대 결혼을 한 여자는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계대 결혼은 형이 죽으면 형수가 그 시동생과 결혼하여 집안의 대를 잇는 제도로 율법에서 하나님이 명한 것입니다.(신25:5-10)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부활 때에도 그 제도가 유효하다고 하면 일처다부(一妻多夫)를 인정하는 이상한 하나님이지 않느냐,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느냐 따질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마디로 너희가 성경(율법)도, 하나님의 능력(부활)도 잘 모르고 있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부활 때는 더 이상 이 땅에서의 결혼 제도가 적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두 천사들과 같은 영적 존재가 되어 세세토록 이 땅을 다스리는 일에 하나님과 동역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의 말씀이 언뜻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어진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지금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부활을 부인할 구실로 삼으려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꿰뚫어 보시고 신자가 죽어 천국에 가면 이 땅의 육체는 없어져도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살아 있는 자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진화를 믿는 불신자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죽음으로 인간 존재는 영육 간에 완전히 멸절(滅絶)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우연히 생명을 얻어 이 땅에 우연히 살게 된 존재인 인간이라 죽으면 당연히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땅의 육신적 삶이 전부이고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하면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형통하게 사는 자가 가장 현명합니다. 또 그것이 인생의 지고의 목표이자 덕이 됩니다. 그러나 라멕 같이 힘을 동원해 여자와 재산을 뺏는 자가 떵떵거리는 세상(창4:19-24)은 아무 살 가치가 없습니다. 나아가 그런 세상을 만드셨거나 끝까지 방치하는 하나님이라면 경배할 의미도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이 이 땅을 완전히 유토피아처럼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아예 이 우주는 하나님 없이 물질로만 이뤄져야 합니다. 그 둘 다 아니라면 부활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야말로 신자가 이 땅에서부터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며 살아야할 가장 큰 소망이요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또 그들더러 성경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세부적인 조문들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종말에 대한 계시를 제외하고는 성경은 인간의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근본적 의미도 신자가 호흡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대 결혼 제도 또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당신의 뜻대로 보존하되 불쌍한 과부가 된 형수를 섬기는 모습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런 신성한 율법을 자기들의 부활이 없다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입증하고 또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는 목적으로 곡해하여 인용했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구원과 심판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어지며 또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인간이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추모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는 살아 있는 자를 위해선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원한 운명을 직접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까지 끼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삭과 야곱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또 부모의 신앙이 그 아들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계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뜻도 살아 있는 동안 믿음의 가계를 중단 없이 잘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마치 계대결혼을 한 여인의 천국에서의 삶에 관심이 있는 척 했지만 부활 자체를 믿지 않는 그들로선 아무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부활은 부활을 믿는 자에게만 부활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능력도 제대로 그 뜻을 아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 그들은 율법도 하나님의 능력도 자기 임의로 판단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선 당연히 부활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산 자의 하나님 되시는 그분의 일차적 관심은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신자를 현실에서 형통케 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의 신자 각자를 향한 거룩한 계획안에서 그 인생이 벗어나지 않도록 신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란 궁극적으로 신자를 영원한 천국 보좌 앞으로 초대하는 것, 바로 부활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율법의 참 뜻대로 살 때에만 당신의 크신 능력을 맛보게 해줍니다.
신자 가운데도 하나님은 믿는데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자신은 오직 이 땅에서의 삶에만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명을 지켜 남들보다 좀 더 선하게 살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예쁘게 봐주실 테니 이 땅에서 형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인 부활 가운데 참여할 뜻이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을 따른다고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판검사 될 생각은 전혀 없이 고시공부를 죽으라고 하는 자와 방불할 뿐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은 전혀 살아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죽어 없어질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 앞에 죽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전혀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에게만 살아 있는 분이 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부활을 믿고 또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 당신이 하나님 앞에 분명코 살아 있습니까?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있느냐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 아무리 궁핍하고 핍박을 받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살며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그와 같이 이웃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9/2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