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왕하 7:3,4)
아람의 포위 공격으로 이스라엘 성중에 먹을 것이 동이 났는데 그 와중에 성 밖의 네 문둥이는 대적 아람에게 항복하러 갔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윤리로는 아무리 굶어 죽게 생겼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어야 합니다. 성중에는 아이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덤빈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든 죽게 생겼습니다. 성중에 들어가나 성 밖에 있어나 굶어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신에 항복하면 죽임 당할 확률이 높긴 하지만 포로로 잡혀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로서 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도는 항복하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세상 윤리는 공동체의 존속과 유익만을 목적으로 인간이 제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윤리가 적용되는 일차적인 한계는 민족과 국가입니다. 그 한계를 넘어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 윤리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도덕을 잘 실천하다가도 나라 간에 이익 다툼이 생기면 도덕보다 나라가 우선이 됩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전쟁이 발생하면 그 동기와 과정 등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국민 된 도리로서 무조건 참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국가 간의 분쟁을 줄이기 위한 인간적 대책은 공동체를 최대한 키우거나 하나로 만들어 통일된 규정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가 꿈꾸던 전 지구적 제국이 인간 윤리가 지향할 수 있는 최종 한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시고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윤리가 배제되어선 그 어떤 시도도 바벨탑의 재판으로 끝났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윤리는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에 당연히 민족과 국가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대상으로 삼기에 앞서 각 개인을 먼저 거듭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한 죄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신 후에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동일한 은혜 가운데 들어 온 자들끼리 모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공동체는 가시적, 현실적, 조직적인 구조를 취하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가시적 공동체라도 이미 특정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에 문화, 인종, 민족, 국가 등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공동체라야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의 공동체도 이 땅에 존재하는 이상 가시적 형태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릅니다. 간단한 예로 불신자 아버지와 나머지 신자 가족 간에는 가시적인 한 가정 안에 두개의 비가시적인 영적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윤리가 가시적 공동체의 존속과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윤리는 비가시적인 영적 공동체의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이슬람과 유대교는 기독교와 더불어 절대적 유일신을 믿는 대표적 종교로 인간은 그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이슬람은 모든 인간이 ‘알라’에게 복종하게 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칩니다. 또 두 종교 모두 엄격한 도덕적 삶을 강조하고 실천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신앙관이 아주 확고하고 심지어 바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이슬람은 전 지구적인 회교제국 설립을 위해 개인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전자는 정치적, 후자는 종교적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둘 다 인간 사회의 가시적 공동체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기들이 소속한 공동체의 보존과 유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인간적 윤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도덕, 사상, 종교에 기초한 제국이 인간에 의해 설립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그 십자가 앞에 무릎 꿇기만을 원하십니다. 또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먼저 믿은 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 없어져야 합니다. 이름도 없는 땅 끝까지, 이름도 없는 신자가 가서, 이름도 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고 또 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눈에 보이는 민족과 종교라는 장벽을 넘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면 개인을 살리기 위해 공동체가 함께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윤리입니다. 그렇다고 개인주의를 표방하거나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에 복수와 신원도 그분께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우선하여 개인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만이 살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전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직접 순교로 인도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한 생명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지금 네 문둥이도 죽음 대신에 항복을 택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시종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안식일에 거룩한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생명을 그것도 가축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명 보존을 위해 하는 일이 인간 윤리와 저촉된다고 하나님의 윤리까지 벗어난다는 법은 없습니다. 개인이 살아야 공동체가 살지 공동체를 살린다고 반드시 개인이 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자기가 속한 종교, 교단, 교파,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걸라고 명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오늘날 심심찮게 목격되는 장로파와 목사파가 목숨 걸듯이 교회라는 가시적 조직체를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을 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생명을 걸어야 할 분은 오직 자기를 지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세상은 필연적으로 가시적인 현실적 공동체와 비가시적인 영적 공동체가 함께 존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가서야 쭉정이와 알곡이 나눠질 것입니다. 그 분류 기준은 절대로 선행이 아닙니다. 인간의 윤리로만 산 자와 하나님의 윤리로 산 자로 나눠질 것입니다. 가시적인 현실적 공동체의 유익만을 위해서 산 자와 눈에 안 보이는 한 개인의 영혼을 위해서 산자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네 문둥이 같은 자들은 알곡으로, 반면에 큰 교회의 많은 목사와 중직들은 쭉정이로 분류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관심 쏟지 않는 세상의 벼랑 끝에서 오직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섬기는 이름 없는 자들에게 먼저 찾아가실 것입니다.
이들 문둥이는 유대 율법으로는 성중에서 살 수조차 없습니다. 성안에서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으로 겨우 연명해야 합니다. 성중에 아이도 삶아 먹는 판에 유대 사회에선 천벌을 받은 죄인 취급하는 문둥이들에게 줄 음식을 따로 남겨둘 리는 만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굶은 지가 오래 되어 죽음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문둥이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율법도 어디까지나 위생적, 제의적 관점에서 명한 것이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죄인취급을 받았기에 사실은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을 민족을 등진 매국노라고 비방할 근거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성중에 가도, 성 밖에 있어도, 대적에게 가도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한 말의 숨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들은 사실상 자기 민족이나 대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소속한 공동체 자체가 없다면 그 공동체의 보존과 유익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월남이 패망할 때에 배를 타고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자를 두고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네 문둥이들은 인간 사회의 윤리로 따져 벌써부터 죄인으로 완전히 낙인찍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 밖에 나서 구원 밖에 있었던 자들로 대우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온 이스라엘 중에 가장 선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주신 생명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는 자와 자기 자식까지 삶아먹는 자를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보시지 않겠습니까? 또 입술로는 하나님을 수도 없이 외치지만 속마음은 눈에 보이는 공동체에 더 가있는 자보다 그들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눈물로 지새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윤리는 딱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되 특별히 죄에 빠진 자를 더 큰 긍휼로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인간을 보실 때는 개인이건 공동체건 당신의 그 사랑 앞에 얼마나 겸비하게 무릎 꿇는지 만으로 선악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신자가 취해야 할 윤리적 태도도 오직 이것뿐입니다. 다른 사람 모두가 불쌍하든지, 자기가 불쌍하든지, 아니면 둘 다이든지 해야 합니다. 신자는 인간적 윤리에 어긋나 죄에 빠진 자를 정죄하기 보다는 더욱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럴 여유가 도저히 없다면 최소한 자기 영적 상황이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는 벼랑 끝에 있음을 깨달아 그분께 엎드려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세상과 사람 앞에서 떳떳한 의인입니까? 하나님 앞에 그분의 긍휼만 바라는 죄인입니까?
9/30/2006
허상이 아닌 실상을 따르기 위해서는
무릎 꿇는 일 외에는 아무 방법도 없다는 취지의 말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