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112:4-9)
신자라면 당연히 불신자보다 훨씬 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직의 개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단순히 거짓말로 남을 고의로 속이지만 않으면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직의 일부, 그것도 극히 일부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속이지 않은 것뿐입니다.
만약에 어떤 위험한 일이 닥치는 것을 알고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직이란 이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사실 그대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악은 악이며 선은 선이라고,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해야 합니다. 예컨대 선을 악이라고 하거나,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악이 있는 데도 악이 없다고 하거나, 심지어 악에 대해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것도 정직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의 정직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안 하는 차원으로 그치진 않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려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심지어 사고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진리 위에 서서 진리대로 행할 때만이 정직한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행동, 말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비진리(非眞理)를 두고 궁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진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또 그 진리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알고 있고 나아가 성령님이 각자에게 내주하여 진리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십니다. 불신자는 몰라도 신자의 경우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부정직을 범할 우려가 없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말을 바꾸어서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평판을 받은 한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상황이 바뀌어 했던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분의 논리에 따르면 상황이 바뀌면 했던 말도 뒤집고 또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진리는 항상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뜻도 되어버립니다.
진리란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그에 따라서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 진리가 도출된다면 상황이 급변하거나 악화해도 임시웅변으로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이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반대로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리가 있기에 인간이 중심을 잡고 그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로 부양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졌다고 부모나 자식을 방기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맹세에 대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는 온갖 규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런 상황 윤리에 의해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킨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장래 일을 인간이 주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맹세(진리)란 아예 맹세(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정직성 여부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지, 특별히 위급한 여건에 처했을 때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누구나 쉽게 정직할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바대로 정확하게 따르면서 신자답게 주위에 빛을 비추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칠 때에는 신자라도 믿음이 흔들리고 진리보다는 갑자기 상황 윤리가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 때에 요동치 않고 자기 믿는 바대로 생명을 걸면서까지 따를 수 있는 것이 참 정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정직한 자를 그 단계에서조차 더 나아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흑암이 닥칠 때에 자신이 믿는 바대로만 행동하여 그 환난을 이겨내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재물을 주위에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같이 재난이 닥치면 빈궁한 자는, 정확하게는 믿음이 없는 자는 더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확신하지 않습니까? 그 흑암이 흑암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룰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또 바로 그 흑암에서 궁핍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을 섬겨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라고 자기를 그런 처지에 보내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믿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자의 정직이지 않습니까?
흔히 말하듯이 신자의 믿음이 흑암을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믿음은 갖고 있기에 믿음대로 정직하게 살아야 흑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믿음을 더 세게 만들어, 사실은 이런 표현 자체가 모순입니다만, 흑암만 이겨내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센 믿음은 될지 몰라도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흑암 중에 신자를 붙들어주기 보다는 정직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믿는 것부터 정직하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여 택하였기에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지켜 주실 뿐 아니라 때로는 죽음까지도 요구하여 당신의 영광을 기어이 드러내신다는 것을 진짜 그대로 믿어야 정직한 믿음인 것입니다. 정직한 믿음에는 그 믿음을 더 세게 키울 여지나 믿음이 약해질 가능성도 없는 법입니다. 믿음은 세게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순전(pure)하게 유지 시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음을 어디에 동원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재물과 권력을 차지해서 흑암이 오면 그것으로 요동치 않으려고 합니다. 재물과 권력이 요동치 않게 만드는 힘이지, 하나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나아가 정직함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컨대 믿음이 바로 정직이며 또 정직이 바로 믿음입니다. 흑암 중에 재물을 풀어 남을 도우지 못할망정 자신이라도 믿은 바대로 행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황이 닥쳐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참 진리로 진짜로 확고하게 소유해야만 온전한 믿음이 생기고 또 제대로 정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나신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죽이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분의 그 견고한 사랑에 이미 분명히 붙들린바 된 신자가 왜 요동할 것입니까? 세상의 어떤 흑암도 신자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진리를 정직하게 믿고 있다면 어떤 흑암이 닥쳐도 자신이 요동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럴수록 주위에 요동하고 있는 자들이 더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세지 않는(정직하지 않는) 주위의 연약한 신자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유하고 있지 않는 불신자는 얼마나 더 안타깝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재물을 비롯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신자의 정직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전하고 나아가 간절히 그 이름으로 기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정직한 신자입니까? 단순히 거짓말 안 하는 정도로는 교회 나오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믿는 바대로 이 세대의 조류와 유행과 사상과는 상관없이 영원한 진리에 따르며 살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괜히 신자라고 윤리적으로만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흉내를 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먼저 가지려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그 어떤 종교적 일보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는 소원과 열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정직한 믿음부터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 없이는 정직할 수 없으며, 정직한 믿음 없이는 신자가 아닙니다. 나아가 믿은 바대로 살지 못하면 구원 받은 신자일 수는 있어도 아직 정직한 신자는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단순히 구원 받기만 한 신자입니까? 아니면 진짜 정직한 신자입니까? 혹시 신자가 아니면서도 신자인척 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3/23/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