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
히브리어에는 비교급과 최상급의 표현법이 따로 없습니다. 대신에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면 즉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의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전도서 기자 솔로몬은 인생이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다섯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인생 자체가 전혀 살 가치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리라.”(전12:13,14) 전도서의 이 결론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생은 허무 중에 허무(the worst of worst)인지라 아예 아무 것도 없는(無)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대조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4:8) 천국 보좌 앞에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했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가장 좋은 것 중의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모든 근거와 목표와 소망을 살아계신 주님께 맞추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무에서 유로 바뀝니다. 그 반대가 되면 유에서 무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기에 그분을 빼버리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물론 불신자 가운데도 꼭 이 땅의 쾌락과 재미만 추구하지 않는 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며 열심히 삽니다. 성실하게 인생 목표를 추구하며 남을 돕는 선한 일을 도모합니다. 자식도 훌륭하게 키우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업적도 남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막상 죽음 앞에 맞설 때에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주지 못합니다. 단순히 죽음의 공포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오직 이 땅에서 시작되어 이 땅에서 끝이 나버리기에 이 땅에서 사라지는 본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는 열심히 살 수 있는 가치와 목표는 발견해 그대로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어야 할 가치와 목표는 발견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긴 자나 거대한 부를 쌓은 자라도 예외 없이 늙음이 괴롭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 심지어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차게 사는 것은 얼마든지 자신이 있는데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에 어떻게 하든 그 죽음을 멀리하고 외면하려고만 합니다. 죽을 준비가 돼있지 않은 자는 결말이 허무하기에 사실은 살 준비도 전혀 돼있지 않은 셈입니다. 그 인생이 해 아래서 하는 수고가 모두 헛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보장 받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부터 정말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세 번 반복하여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찬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삶에 연관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에도 계셨고(과거), 이제도 계시고(현재), 장차 오실(미래)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전에도 거룩했고, 이제도 거룩하고, 장차도 거룩하게 오실 것이니까 찬양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서 인간이, 아니 성도가 사는 이 땅을 보고 찬양한 셈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아무 염려, 고통, 죄악이 없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초점은 오히려 이 세상에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자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제대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해 아래서 하는 수고가 헛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항상 찬송가를 틀어 놓고 성경만 보고 있거나 교회 일로 봉사하고 전도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년에 죽음이 두려워 어쩔 줄 모르고 이 땅에 대한 미련만 자꾸 붙드는 불신자와는 정 반대의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노년에 오히려 더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염려하기보다는 영생을 소유했음을 기뻐하고 또 지나온 삶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너무나 충만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부터 자연과 인생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짐을 받은 것이라는 확신 위에 현실의 삶을 통해 그분의 빛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태여 거룩한 성자나 신령한 성도가 되려고 스스로 너무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사역의 의미와 결과를 진정으로 깨달으면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고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소원하고 실제로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내어 드리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 보좌 앞에서 우리 또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하고 경배할 그 장엄한 광경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최고로 좋은 것 중의 최고가 되는 영광을 누릴 것을 바라며 그로 인해 노년의 삶이 더 활기차고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럼 전도나 이웃 사랑은 자연히 됩니다. 자신이 최고 중의 최고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면서 최악 중의 최악 상태에서 헛되다만 연발하며 사는 자들을 볼 때에 그 마음이 어찌 애타지 않겠습니까? 또 그 반대로 그들이 우리가 참 소망 가운데 평강과 위로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활기찬 삶을 살고 있음을 볼 때에 어찌 부럽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최악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바뀐 것을 확신합니까? 그래서 나이 들수록 기쁨과 감사가 더 늘어납니까?
4/23/2007
운영자님께...아멘을 화답하는것에 부끄러움을 갖고 있어 조용히 왔다 가지만 마음만은 누구 못지 않습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