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16:18) 예수에 대해 철저히 교만해져라.

조회 수 1146 추천 수 62 2007.04.15 19: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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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개구리 한 마리가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낼까 걱정하다가 철새를 따라 남쪽의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야생 기러기들에게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하고 승낙을 받았지만 함께 날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한참 궁리하다가 튼튼한 갈대를 기러기와 자기가 양쪽에서 입에 물고 가면 되겠다고 아이디어를 내었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훌륭하게 성공해 개구리는 기러기와 함께 하늘을 날며 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신기해 도대체 저런 아이디어를 누가 냈을까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우쭐해진 개구리가 “내가 생각했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며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합니다. 교만한 자는 이 개구리처럼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교만은 자기만 최고로 옳다는 고집이므로 반드시 자랑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나아가 최고로 옳다고 생각하기에 반드시 방심이 따라 옵니다. 따라서 교만 자체보다는 바로 이 방심이 패망을 자초하며 자랑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릅니다.

신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 사이에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할 수는, 심지어 그렇게 해야만 할 때가 가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만은 그럴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로 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앞에 겸손한 자이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당신 앞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반면에 인간은 어리석다는 정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신자가 그분의 능하신 손아래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것이 교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매사를 해나가면 방심하지 않게 되며 또 그분의 인도만 따르고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도 당연히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참 겸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옛 자아가 즉, 자기가 인생의 주인으로 세상에서 최고로 옳으며 자기 뜻대로만 살겠다는 고집이 완전히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 외면, 심지어 저주하고 있던 자를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 온전하신 사랑으로 용서 해주십니다. 그 은혜 앞에 교만으로만 똘똘 뭉쳐져 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참 신자가 된 가장 큰 표시는 자기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저하게 자각하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남들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자기에게 그런 구속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은 당당하게 자랑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언제 어디서든 전도만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자기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 또한 세상에 대해 못 박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취할 것이 하나도 없기에 세상 것에 대해 옳고 그르며 좋고 싫은 것을 가름해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사람은 자기가 최고로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하게 되면 당연히 자랑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 본성만은 없어지지 않기에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곤 몽땅 없어졌고 오직 예수님만 가장 소중하게 된 바울로선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고백이 당연히, 아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기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못 박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시선이 오직 살아계신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의, 아니 모든 인간의 참 겸손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겸손은 도덕적 자기 수양과 종교적 임무 수행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은 남들 앞에 도사나 성자 소리를 듣게 되는 혹은 들으려는 자랑이 따르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결과만 낳습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 앞에 자기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대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이제 신자의 진정한 겸손의 최종적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태도나 매너에서 온유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자기의 모든 문제를 의탁하는 정도로 그쳐서도 안 됩니다. 세상과 사람 앞에서 자기는 완전히 죽어 없어진 대신에 예수님의 향기만 철저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의 생명을 나눠줘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자를 보면 사망과 생명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다고 합니까?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오직 순전한 복음에만 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이자 하나님 구원의 능력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었고, 따랐고,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철저하게 교만했던, 태도나 매너에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진리라고 확신하여 남들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의미에서, 자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십자가에 대해 바울처럼 철저하게 교만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감당 못할 냄새는 내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을 사망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단지 도덕적 수양과 종교적 헌신을 재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작금의 많은 신자와 교회들의 솔직한 형편 아닙니까?

다른 말로 신자와 기독교가 참 겸손을 모르고 세상 앞에선 겸손한 척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점차 하나님 앞에 교만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하 만민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유일한 구원의 방도를 무시하는데 어떻게 겸손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소중하지 않으면 혹시 전도는 할지 몰라도  누구를 만나도 당당한 자랑이 안 됩니다. 또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받은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해야만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 하나를 하나로 받아서, 하나로 믿고, 하나로 따르고, 하나로 전해야 합니다. 이 길 외에는 기독교가 제대로 부흥하고 신자도 부흥할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혹시라도 신자나 기독교가 이 하나 외에 다른 것으로 자랑하면 아무리 하늘을 나는 개구리처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더라도 반드시 그 자랑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사망과 생명의 갈림길에 서서 생명을 걸고 갈등하도록 말입니다.

4/16/2007


조인구

2007.04.16 02:57:13
*.74.199.101

아멘 아멘

국중후

2007.04.16 12:04:18
*.8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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