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29-32)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

조회 수 1157 추천 수 40 2007.04.08 19: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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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16:29-32)



어떤 사람이 건물의 벽에 “예수님이 해답이다”라는 구호를 적어 놓았습니다. 지나가던 냉소적인 불신자가 그 구호를 보고는 “문제는 무엇인데?”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가 기독교와 예수를 싫어해서 반발을 한 것입니다만 불신자의 의문을 정확하게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해답만 알면 무슨 소용과 의미가 있습니까?

고등 수학의 경우 문제가 뜻하는 것조차 모르면 그 해법이나 정답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문제부터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은 올바른 대답을 찾는 것만큼 중요한 일일 뿐 아니라 더 우선적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 받는 일은 수학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하며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불신자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왜 구원 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    

신자들이 전도할 때 보면 미리 준비된 질문지에 따라 어떻게 하든 정답만 전하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상 질문과 모범 답안을 준비해 면접 보러 갔지만 엉뚱한 질문만 받고 당황하는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본문에서 빌립보의 로마 간수와 그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설교했거나 전도용 요리 문답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단지 찬양과 기도만 했습니다. 간수가 그것을 듣고 감동 받은 것도 아닙니다. 초점은 사도가 먼저 전도한 것이 아니라 간수가 먼저 질문을, 그것도 아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사도들이 찬양하고 기도하자 땅이 진동하고 옥문이 열리며 발에 차여져 있던 차꼬가 저절로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간수가 그런 표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옥문이 열렸으므로 죄수들이 다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법에 따라 틀림없이 자기가 대신 사형 당하게 될 텐데, 아마 사형 방법이 지극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미리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는 바울의 큰 소리를 듣게 되었고 등불을 들고 들어가 확인해 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건지게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기뻐서 도망가지 않은 죄수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이상합니다. 그런 큰 기적을 목격했으면 최소한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그분 앞에 부복하는 것이 순서인데도 사도들 앞에 부복한 것입니다. 그것도 무서워 떨며 말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큰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며 믿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단의 종들도 초자연적 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표적이 자신의 살고 죽음과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워낙 영악한 그들인지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시급한 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항상 묻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뿐인데 그 질문에 답해주는 자에게만 부복할 뿐입니다.

간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현실의 형통만이 그에게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감봉, 면직, 해고당하는 것 즉 먹고 사는 문제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형 당할 일마저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와는 달리 그런 것에는 하등 신경도 쓰지 않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날 때에 바울과 실라의 차꼬만 풀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는데도(26절) 아무도 도망가지 않고 다 남아 있었습니다.(28절) 간수는 그 사실에 더 놀랐던 것입니다. 물론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간수가 자다가 깬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얼마 되지 않아 미처 도망 갈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죄수들이 간수들에게 덤벼들지 않았고 최소한 도망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가 본 것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일이 오직 그들의 기도와 찬양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옳다고 믿고 살아 온 자기 방식과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 즉 전혀 다른 믿음을 발견했습니다. 또  생전 처음 기적을 목도함으로써 눈에 안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효과적인 전도가 되려면 불신자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먼저 제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들처럼 기적을 일으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가 자기가 사는 방식과 인생관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 줄 정도로 신자의 사는 방식과 인생관이 그들의 것과는 정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도전이 아니라면 최소한 흥미와 관심은 갖게 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렇다 치고 왜 다른 죄수마저 차꼬가 풀렸는데도 전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사도들이 하는 행동을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자기 죄명부터 알리는 신고라는 것부터 먼저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강도 살인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었는데도 실컷 두들겨 맞고 자기들 같은 흉악범이나 들어오는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전혀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한 밤 중에 일어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를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조금 있으니 땅이 진동하고 옥문이 열리고 자기들 차꼬가지 풀리는 것 아닙니까? 물론 처음에는 기적에 놀랐겠지만 곧바로 사도들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저들이 믿는 신은 어떤 분인가? 나도 저들이 믿는 신을 믿고 저들처럼 살 수는 없을까?”    

하나님이 왜 잘못한 것 하나 없는, 아니 복음 전도에 아주 열심이었던 사도들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환난과 핍박을 겪게 했습니까? 불신자 스스로는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삶과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지 않고는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선 인간을 구원 시킬 방도는 죄인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거나, 의인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거나, 둘 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 몰아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의 경우는 환난을 겪으면 하나님을 혹간 찾되 찾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하든 빠져 나갈 궁리만 하지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른 말로 불신자로선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의지하여 죽을 고비에서 빠져 나오는 생생한 예를 보아야 합니다. 질문과 해답 둘 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를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를 본문의 사도들처럼 불신자들 앞에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자도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일로 능욕 받는 일이 진정 감사해서 기도와 찬양을 해야 합니다. 신자부터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것을 불신자들로 보게 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장 먼저 시급하게, 그것도 생명을 걸고 물어야 한 가지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뿐입니다. 그 해답은 “주 예수를 믿어라”는 하나뿐입니다.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명을 구원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구원인데 어떻게 생명을 걸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전도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소개하고 그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던 생명에게 새 생명을 전하는, 아니 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만, 반드시 신자가 죽었다 다시 사는 모습으로만 새 생명이 전해집니다.

신자를 매번 죽을 고비를 겪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더러 신자의 사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나라면 벌써 죽었거나 미쳤을 만한 저런 상태에서 어떻게 저렇게도 즐겁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억울하게 사방이 막힌 지하 감옥에 갇혔어도 그렇게 살아야 신자이고 또 그렇게 살도록 환난과 핍박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은 영원토록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해답부터 제시하면 질문도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은 귀 막기 일쑤입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사는 방식이 맞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불신자 쪽에서 먼저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혹시 “신자라고 하나 다를  것 없네, 아니 더 하네?”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4/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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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구

2007.04.09 03: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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