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2-25)
벤자민 웨어 선교사가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 16 개월간 비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풀려난 후에 기자들이 그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지루함과 절망감을 극복했는지 질문하자 그는 “저의 축복을 세워보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뜻하는 바가 감옥에 갇히기 전에 누렸던 축복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샤워할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야채를 주었고, 또 저의 가족들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발견한 은혜를 두고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그런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낙심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 염려로 지새울 것입니다. 신자라도 어서 빨리 구원해달라는 기도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결말이 날 때까지 기도, 실망, 인내, 좌절 등이 번갈아 교체될 것입니다. 아니면 걷잡을 수 없이 생기는 염려와 실망을 잊기 위해서 관심을 쏟아 부어넣을 수 있는 특정한 일이나 취미에 모든 정열을 바칠 것입니다.
간혹 의지가 아주 굳은 자는 어차피 수가 없으므로 마음을 바꿔 먹고 그 상황에 대처해 나갈 것입니다. 살아서 나갈 것은 기대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최선을 다해 살려고 긍정적,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좋으며 또 효과도 그런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타고난 천성을 끝까지 완벽하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일시적이든 완전히든 이전의 성격으로 되돌아가면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정말로 감사할 거리에 대해 감사해야지 일부러 감사한다고 해서, 잠시 위로를 얻거나 얻었다고 스스로 속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감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웨어 선교사는 절로 흥이 나서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실제로 기뻐하며 샤워했던 것입니다. 환난을 감사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 정말 감사할 거리가 있어서 있는 그대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종의 주인이 자기 이익이 끊어진 것을 알고 성을 소요케 한다고 사도들을 참소해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은 후 차꼬에 채여 깊은 옥에 가두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한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찬양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웨어 선교사처럼 샤워를 하거나 별식을 제공 받은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실제로 감사할 거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차꼬에 차인 채 그 악명 높았던 로마의 어둡고 음습한 지하 감옥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거기다 한 밤중이었습니다. 피곤해서라도 눈을 붙이고 자야할 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쳇말로 “달밤에 체조한 격”입니다. 남들 눈에는 완전히 살짝 맛이 간 사람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그들은 정말 맛이 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미쳐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예수만 찬양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감옥에 들어오게 된 것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물론 힘들고 고달픈 그런 상황 자체를 기뻐했다면 그야말로 정신이상자 내지 광신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았던 그들이라도 처음에는 분명 육체적 고통은 둘째 치고 정신적으로도 낙심하고 지쳐서 괴로웠을 것입니다. 한동안 매를 맞은 상처의 쓰라림 때문에 신음하거나 실신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오직 돈만 벌려는 탐욕에 붙잡혀 거짓 참소를 하는 자들의 죄악상과 그 뒤에서 조종하는 사단의 검은 손을 철저히 인식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줄 때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 것과 그 일을 지켜 본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도 회상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세상의 어떤 방해와 핍박에도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 당신의 능력으로 증거 되어져 감을 새삼 확인한 것입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기들이 환난에 처하든 심지어 생명을 잃을 형편에 다다르든 오직 예수의 이름만 증거 되면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 드렸습니다. 단순히 도덕적 자부심이나 종교적 성취감에서 오는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진짜로 감격에 겨워 즐거워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인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위로와 안식과 평강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찬미하고 싶은 마음이 속으로부터 뜨겁게 솟구쳤던 것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믿음을 시험하고 성숙시키려는 단순한 연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 우리 몸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이 전파되어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목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그분의 이름으로 받는 능욕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뻐해야 합니다. 능욕에 따르는 고통 자체가 기쁠 리는 없지만 복음이 전해져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예수의 심장으로 진짜 사랑한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4/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