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5,26)
안디옥 교회에서 AD 40년 초반에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를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자더러 신자라고 한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교회사적으로 따지면 아주 큰 사건입니다. 초대 교회는 대개 유대인들이 유대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기에 신자는 몰라도 국외자가 보기에는 유대교와의 구분이 아직은 모호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인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히 심어준 것입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인하여 사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고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여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數多)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11:19-21)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한 안디옥엔 헬라인 신자가 더 많아 자연적으로 유대교와는 다른 색채를 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단순히 인종적 문화적 구분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내용이 유대교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희생 제사와 율법을 준수하는 대신에 복음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이 배워서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교리를 학습하여 그 내용을 수긍, 동의, 숙지한 후에 그대로 따르지만 기독교만은 먼저 믿고 따른 후에 그 믿은 내용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자신이 거듭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한 경건한 인간이 믿어보려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한 죄인을 변화시켜서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자들 중에 따로 훈련시킨 사람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렀을 때처럼 그분을 먼저 따른 자들이 배움을 받게 되지 배우고 난 후에 그분을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신자들은 유대교로부터 먼저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교에서 볼 때는 같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성전 제사는 아예 부인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자기들이 사형시킨 예수를 믿고 따르니 핍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자기들 신앙의 뿌리이자 민족종교인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구원의 길이 너무나 분명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로선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 제국의 종교정책은 아주 관용적이었습니다. 모든 종족의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주라고 시인하는 단 한 가지 조건만 빼고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내의 시민들은 그런 표시로 만날 때마다 “황제가 주(主)십니다.”라는 인사말부터 서로 건네야 했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 있으면 별도의 종교로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시작하면 새로운 종교가 되기에 반드시 로마 당국에 신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종교인들이 황제를 주라고 시인하기만 하면 그 새 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는 보장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그런 정치적 상황을 의식했든 못했던 간에 이제 황제와 그리스도 중에 누가 주인지를 택해야만 할 단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바꿔 말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핍박이 유대당국에 의해 예수살렘에서만 소폭으로 행해졌던 것이 이제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제국의 전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될지도 모를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고, 그런 배움을 받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작은 핍박으로 흩어졌던 자들이 이제는 더 큰 핍박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헬라 이방인들도 함께 말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이 지식적으로 교리를 배웠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따름에 결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참 의미입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공적과 조건과 자격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진심으로 자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현대 교회에선 복음이 너무 값싼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 손쉬운 방편으로 복음을 시인하는 것으로만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음을 알고도 평생을 두고 그분만 따라야 합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을 따라 신자도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와 그리스도인은 같은 뜻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신자처럼 예수를 먼저 따른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긴 그리스도께서 살았던 방식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핍박당하는 자입니다. 역으로 핍박이 따르지 않으면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굳이 회교 지역으로 가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라도 신앙을 지키며 살기에 세상과 충돌하고 사람들로부터 손해를 입어야 할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에 결코 세상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세상이 결정해주는 셈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신자가 사는 방식 때문에 자기들 이익과 쾌락에 방해가 생기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안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들의 양심에 찔림이 생겨야 합니다. 직접적 충돌이 안 생기더라도 최소한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인식은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가장 크게 성공한 자는 외부 사람이 신자로, 그것도 신자라는 표식을 전혀 내지 않았는데도 단지 그 사람이 사는 방식을 보고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학습으로 닦아진 종교적 실력과 위장된(?) 도덕성으로 직분이 올라간다고 그 신앙이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하여 병 낫고 형통하는 것으로는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과 얼마나 충돌 내지 반대의 방향으로 그 인생이 진행되고 있느냐로 신자의 자격과 성공 여부는 결정되는 법입니다.
작금 기독교가 왜 힘을 잃고 있습니까? 외부 사람조차도 기독교 신자를 신자로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사는 방식은 자기와 전혀 다름이 없는데 단지 주일날 깨끗하게 차려 입고 경건한 모습으로 교회 갔다 온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신자들이 오직 복 받기 위해 빌고 또 목사에게서 복 받으라는 말씀만 듣고 온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로선 신자들을 자기들보다 더 수단이 좋은 영악한 자이거나, 뒤로는 호박씨 까면서 도덕군자인척 위선을 떠는 자거나, 아니면 스스로 세상을 헤쳐 나가지 못하는 연약한 자 셋 중의 하나로만 간주할 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기독교를 믿는 신자입니까? 개별 교회에 소속된 멤버일 뿐입니까? 다른 말로 불신자들이 당신을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진정으로 인정해줍니까? 아니면 교회 내에서만 단계별 제자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자로 칭찬해줍니까?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에서 핍박이 없으면 자기들 신앙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는지부터 점검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히려 핍박을 자초했습니다. 지금은 오직 핍박을 피하거나 없애려는 데에만 예수님의 이름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도용(盜用)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자,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자기의 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3/2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