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엔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16:1-5)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것 때문에 바울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 교제를 하다가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는 유대인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다”고 그를 책망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2:11-14)는 뜻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자 그들의 개종절차가 자연히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모세 율법과 할례를 그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AD. 50년경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그때에는 오히려 베드로가 나서서 “하나님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행15:8,9) 했기에 복음 안에선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많은 논의 끝에 사도 야고보가 제안한 대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행15:20) 네 가지만 멀리하면 이방인을 기독교 신자로 입교시켜 주기로 결의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 신자는 할례 같은 성전 결례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 이방인들을 위해 변론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아버지가 헬라인인 디모데에게 구태여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할례를 전혀 강조하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만 지키게 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행동이자 베드로를 야단친 그도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셈입니다. 그럼 그도 베드로처럼 외식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버리지 말고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해답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라는 표현에 숨겨져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공회의 의결대로만 지키라고 권면한 평신도와는 달랐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선교 여행에 동행할 참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동역자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섰으므로 바나바를 대신할 중임을 맡기 직전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디모데를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엄마가 유대인이므로 유대파 신자 가운데 디모데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따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유대교에선 이런 경우 엄마의 신앙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바울은 양친이 다 이방인이었던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도록 말렸기에(갈2:3) 복음을 혼동하여 원칙을 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가 모든 사람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혹시라도 장애가 될지 모르는 일을 미리 제거한 것입니다.
최근 미국 뉴욕의 큰 한인 교회의 존경받고 영향력 있던 담임 목사가 간음을 고백해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신자들 사이에 아주 심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백을 했으니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측과 평신도에게 상처를 주고 복음에 장애를 일으켰으니 다시는 목회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의견이 나눠져 분분합니다.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는 형편이라 그 사건을 두고 직접 언급할 입장은 안 됩니다만 성경적 원리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본문처럼 사역자에게 적용되는 윤리 기준은 평신도보다 훨씬 더 엄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목회 서신서(디모데 전후서, 디도서)에도 그렇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목회자의 자격을 논할 때에 간음, 살인, 도적, 거짓증거, 이웃의 것을 탐내는 일 등은 아예 떠 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다윗도 간음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 사건에서 쉽게 간과해버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의 왕이라는 위치는 여자를 얼마든지 거느려도 되었습니다. 심지어 남의 여자를 빼앗아도 죄가 되기는커녕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왕의 말이 바로 법이자 그 본인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나태에 빠지고 욕정에 눈이 어두워 간음과 살인이라는 죄를 범했지만 구태여 왕의 체면을 구겨가며 신하들 앞에서 그 잘못을 시인 안 해도 뭐라고 따질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단 선지자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주위 사람들이 그 잘못을 알고도 아무도 시비건 자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 잘못을 깨닫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인간이 한 두 번의 실수를 범한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다윗처럼 간음과 살인죄까지 저질러도 복음 안에선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완전히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추함을 처절하게 애통해 하며 온전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또 회개는 오직 하나님과 일대일로 직접 대면하여 은밀히 이뤄져야 합니다. 다윗이 금식하며 성전에서 “주께만 범죄하였다”(시51;4)고 고백했듯이, 그것도 “주께서 주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51:17)으로 말입니다.
목회자는 성경대로, 예컨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자보다 평신도가, 평신도보다 직분자가, 직분자보다 목회자가 더 선하게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물론 구원 받은 모든 성도는 받은 은사와 직분만 다르며 평신도도 만인 제사장직을 받은지라 윤리 기준에 차별을 둔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최소한 다섯 달란트의 역할을, 세 달란트와 한 달란트 받은 자도 각기 받은 만큼의 역할은 해야 한다는 듯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와 평신도가 책임 맡은 양 떼들의 숫자와 범위는 각기 다릅니다. 그들이 미치는 현실적 영적 영향력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좋은 일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나쁜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 되므로 특별히 부정적 영향력은 오랜 기간에 걸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사역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기독교를 싫어하는 여타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여파마저 엄청납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완전한 윤리 기준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해야 하고 혹시 잘못을 범하면 마찬가지로 그 기준에 걸맞게 목숨을 걸만큼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윗이 성도로서 간음한 죄만 단순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 대신에 백성을 다스려야 할 왕이라는 위치를 걸고 회개했기에 그분의 마음에 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는 좀 안이한 윤리 기준을 적용해 어지간한 죄는 모른 척 넘어가도 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맞닥트리는 기회는 아무래도 사역자보다 평신도에게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성도라면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일대일로 완전히 용서 받을 때까지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 특별히 목회자의 회개는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양 떼들의 용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강요, 조종, 위계, 거짓 참회 등을 동원해 형식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사역에서 물러나 무릎 꿇고 기다리며 양 떼들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바꿔 말해 목회자의 회개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는지의 여부는 자기가 맡은 양떼들의 용서로 확증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특별히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개인적인 은밀한 죄는 한두 가지 범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회개가 진정한 모습으로 교인들에게 비춰졌고 평소에 양떼들을 온전한 사랑으로 섬겼다면 교인들은, 참으로 아프고 힘든 과정을 함께 거쳐야겠지만, 그 죄를 개인적인 순간의 실수로 용서해 줄 것입니다. (물론 목자에게 사역을 다시 맡기느냐 마느냐는 용서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 또한 양떼들의 결정에 온전히 의존해야 합니다.) 만약 교인들의 용서가 없다면 그 동안에 그 목회자의 섬김과 사랑에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4/3/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