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1-5)스스로 모순된(?) 바울

조회 수 1095 추천 수 41 2007.04.02 19: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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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엔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16:1-5)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것 때문에 바울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 교제를 하다가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는 유대인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다”고 그를 책망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2:11-14)는 뜻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자 그들의 개종절차가 자연히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모세 율법과 할례를 그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AD. 50년경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그때에는 오히려 베드로가 나서서 “하나님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행15:8,9) 했기에 복음 안에선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많은 논의 끝에 사도 야고보가 제안한 대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행15:20) 네 가지만 멀리하면 이방인을 기독교 신자로 입교시켜 주기로 결의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 신자는 할례 같은 성전 결례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 이방인들을 위해 변론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아버지가 헬라인인 디모데에게 구태여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할례를 전혀 강조하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만 지키게 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행동이자 베드로를 야단친 그도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셈입니다. 그럼 그도 베드로처럼 외식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버리지 말고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해답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라는 표현에 숨겨져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공회의 의결대로만 지키라고 권면한 평신도와는 달랐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선교 여행에 동행할 참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동역자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섰으므로 바나바를 대신할 중임을 맡기 직전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디모데를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엄마가 유대인이므로 유대파 신자 가운데 디모데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따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유대교에선 이런 경우 엄마의 신앙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바울은 양친이 다 이방인이었던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도록 말렸기에(갈2:3) 복음을 혼동하여 원칙을 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가 모든 사람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혹시라도 장애가 될지 모르는 일을 미리 제거한 것입니다.

최근 미국 뉴욕의 큰 한인 교회의 존경받고 영향력 있던 담임 목사가 간음을 고백해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신자들 사이에 아주 심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백을 했으니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측과 평신도에게 상처를 주고 복음에 장애를 일으켰으니 다시는 목회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의견이 나눠져 분분합니다.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는 형편이라 그 사건을 두고 직접 언급할 입장은 안 됩니다만 성경적 원리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본문처럼 사역자에게 적용되는 윤리 기준은 평신도보다 훨씬 더 엄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목회 서신서(디모데 전후서, 디도서)에도 그렇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목회자의 자격을 논할 때에 간음, 살인, 도적, 거짓증거, 이웃의 것을 탐내는 일 등은 아예 떠 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다윗도 간음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 사건에서 쉽게 간과해버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의 왕이라는 위치는 여자를 얼마든지 거느려도 되었습니다. 심지어 남의 여자를 빼앗아도 죄가 되기는커녕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왕의 말이 바로 법이자 그 본인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나태에 빠지고 욕정에 눈이 어두워 간음과 살인이라는 죄를 범했지만 구태여  왕의 체면을 구겨가며 신하들 앞에서 그 잘못을 시인 안 해도 뭐라고 따질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단 선지자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주위 사람들이 그 잘못을 알고도 아무도 시비건 자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 잘못을 깨닫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인간이 한 두 번의 실수를 범한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다윗처럼 간음과 살인죄까지 저질러도 복음 안에선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완전히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추함을 처절하게 애통해 하며 온전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또 회개는 오직 하나님과 일대일로 직접 대면하여 은밀히 이뤄져야 합니다. 다윗이 금식하며 성전에서 “주께만 범죄하였다”(시51;4)고 고백했듯이, 그것도 “주께서 주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51:17)으로 말입니다.  

목회자는 성경대로, 예컨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자보다 평신도가, 평신도보다 직분자가, 직분자보다 목회자가 더 선하게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물론 구원 받은 모든 성도는 받은 은사와 직분만 다르며 평신도도 만인 제사장직을 받은지라 윤리 기준에 차별을 둔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최소한 다섯 달란트의 역할을, 세 달란트와 한 달란트 받은 자도 각기 받은 만큼의 역할은 해야 한다는 듯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와 평신도가 책임 맡은 양 떼들의 숫자와 범위는 각기 다릅니다. 그들이 미치는 현실적 영적 영향력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좋은 일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나쁜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 되므로 특별히 부정적 영향력은 오랜 기간에 걸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사역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기독교를 싫어하는 여타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여파마저 엄청납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완전한 윤리 기준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해야 하고 혹시 잘못을 범하면 마찬가지로 그 기준에 걸맞게 목숨을 걸만큼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윗이 성도로서 간음한 죄만 단순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 대신에 백성을 다스려야 할 왕이라는 위치를 걸고 회개했기에 그분의 마음에 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는 좀 안이한 윤리 기준을 적용해 어지간한 죄는 모른 척 넘어가도 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맞닥트리는 기회는 아무래도 사역자보다 평신도에게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성도라면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일대일로 완전히 용서 받을 때까지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 특별히 목회자의 회개는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양 떼들의 용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강요, 조종, 위계, 거짓 참회 등을 동원해 형식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사역에서 물러나 무릎 꿇고 기다리며 양 떼들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바꿔 말해 목회자의 회개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는지의 여부는 자기가 맡은 양떼들의 용서로 확증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특별히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개인적인 은밀한 죄는 한두 가지 범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회개가 진정한 모습으로 교인들에게 비춰졌고 평소에 양떼들을 온전한 사랑으로 섬겼다면 교인들은, 참으로 아프고 힘든 과정을 함께 거쳐야겠지만, 그 죄를 개인적인 순간의 실수로 용서해 줄 것입니다. (물론 목자에게 사역을 다시 맡기느냐 마느냐는 용서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 또한 양떼들의 결정에 온전히 의존해야 합니다.) 만약 교인들의 용서가 없다면 그 동안에 그 목회자의 섬김과 사랑에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4/3/2007

김형주

2007.04.03 01:07:00
*.173.42.18

아멘!!!

김문수

2007.04.03 02:57:01
*.74.196.1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4장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장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린도전서 7장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장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 빌립보서 1장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장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서 1장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히브리서 13장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허경조

2007.04.03 13:41:41
*.183.39.5

아멘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그 교회에 지교회법이 없으므로 교인들의 용서(공동의회에서의 투표) 의 과정없이
제3자인 노회의 중재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같아 아쉽군요.

운영자

2007.04.03 14:24:09
*.104.227.103

고든 맥도날드 목사가 동일한 경우였습니다. 그는 간음 한 죄를 스스로 자백하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몇 년을 칩거하며 회개했습니다. 나중에는 본 교회 성도들이 용서하고 다시 목회자로 불려 들였고 이전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목회와 저술 활동을 더 활발히 하게 되었습니다.

상기의 글에서 목회자는 완전한 윤리 기준으로 살고 완전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해서 잘못을 결코 용서해주지 말고 목회 현장에 다시는 발을 붙이지 말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아니 핍박한 바울마저 진심으로 회개케 해서 가장 위대한 사도들로 삼아주셨지 않습니까?

문제는 진심으로 회개한 여부와 그 회개를 사역자가 맡고 있는 양 떼들이 인정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허경조님의 말씀대로 각 교회마다 지교회의 헌법이 있고 그대로 따르는 관행이 하루 빨리 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뉴욕 사건의 경우도 노회에서 해당 목회자를 다시는 뉴욕과 뉴저지에선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많은 아픔을 오랜 기간 같이 겪은 후에, 말하자면 서로간에 영적으로 더 성장해진 후에 해당 교회의 신자들이 그 목사를 다시 모시고 싶다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노회가 교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셈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측면에 대해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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